135화 이능 봉인
프레이의 처참한 패배는, 결과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시한 경기 결과로 원성이 자자하기는 했지만,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이었다.
게임 방송사는 아예 이것을 기회로 정기적인 블러드 라인 프로를 만들어 버렸다. 부제는 “프레이의 역습”이었다.
희연에 대한 리벤지 매치의 약속이었다. 서로 장비를 천공신 셋으로 통일하고 스킬을 완전 공개한 상태에서 밸런스를 맞춰서 대결하는 것이었다.
물론 장비와 스킬을 모두 제한하고 싸우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시시할 것이라는 판단에 선택한 것이었다.
이미 블러드 라인에서 노스킬, 노템, 동렙제 맞장뜨기는 꽤 유행하고 있었고, 동영상 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0렙 최강자, 20렙 최강자, 30렙 최강자 등 완전 체급별 경기화 되어있으며, 사람들의 관심은 무차별급 만렙 최강자가 누구일 것인가에 쏠려있었다.
그리고 무제한 무차별 만렙 최강자 결정전이라고 잠정적으로 생각해 온 경기가 바로 이 경기였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무참히 져버린 결과가 나온 것이기도 했다.
결국 한희연은 최강자이지만,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웠던 탓에 ‘현질퀸’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프레이는 천공신의 부활 퀘스트를 진행해서 천공신 셋을 자신의 노력으로 갖추기로 했으며, 그 과정을 모두 방송하고 천공신셋을 갖춘 희연과 재 타이틀 전을 벌이기로 함으로써, 이벤트는 일단락 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게 되었다.
----------------------------------------
“정정당당한 대결이라. 바보같은 소리야. 결국 모든 게임은 ‘강함으로 승자와 패자를 차별하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건 좋지 않아요.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유혜서의 말에 조제성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거 다 좋은데, 당신에게 멋진 모습만 보일 수 없는게 아쉬워.”
[그래서 멋진 모습만 봐주길 원해요?]
“그건 아니긴 하지. 당신이 내 못난 모습도 다 받아들여서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길 바라지만, 동시에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공존한다고 할까.”
미소를 지으며 환담을 나눈 후 연결을 끊었다. 차원을 통해서 연결되는 능력이라서, 늘 연결되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이거 혼잣말 하는 버릇이 완전히 정착되어 가는 군.”
유혜서와 조제성은 서로가 무얼 하나 들여다 볼 때를 위해서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서로가 보고 싶을 때,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뭔가 집중해서 일할 때는 말을 걸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배려 때문이었다.
“나이트 엔젤 사업은 굉장히 성공적이로군.”
로마르 시장은 대단히 청빈한 사람이었다. 진보적인 성향의 인사이기는 했지만, 그는 좌파와 우파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참 정치가의 길이라고 여겼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서 공격을 받기는 했지만, 변함없이 자신의 길만을 가는 순교자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제성은 그를 보고 나이트 엔젤이 큰 장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시 남동쪽의 빈 땅을 죄다 사들였다. 전체 시가지의 다섯 배는 족히 되는 땅을 사들인 다음, 남동쪽의 농장지대와 이어지는 큰 길을 뚫었다.
그리고 나이트 엔젤대를 적극적으로 투입해서, 갱들과 싸우게 만들었다. 그 결과, 치안은 급속도로 좋아졌고 관광객들이 밀려들었다. 도시가 큼직한 도로를 타고 급격하게 커져 나갔고, 그것은 미리 도로망을 착실하게 깔아놓은 남동쪽 방향으로 이어졌다.
치안이 좋은 덕분에 타지역과 달리 경찰이 되겠다고 지원하는 이들도 늘어났고, 청렴한 경찰들이 많아져서 민생 서비스가 좋아지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선순환이 계속 되었다.
시의 인구가 현재 10만이지만, 수년 내에 백만을 내다볼 수 있을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슬슬 나이트 엔젤을 복귀시켜야 할 것 같군.”
시의 성장세가 나이트 엔젤이라는 아이콘을 상실하면서 조금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상황에서 나이트 엔젤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면 확실히 재미를 볼 수 있을게 틀림없었다.
치안 문제가 확실한 일본과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체감하기 힘들지만, 치안이 제대로 유지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경쟁력 차이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한국 쪽에도 다수의 나이트 엔젤을 투입할 필요가 있겠지.”
템플 나이츠의 존재를 경계해서 한국쪽의 움직임을 줄였던 시기도 있었지만, 현재는 꼭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미군의 나이트 엔젤 학살 사건이 있은 이후로, 미군의 움직임이 둔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군수 산업체들의 지분을 챙기면서, 군수 산업체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그리고, 정치가들에 대한 로비 활동을 통해서 많은 재미를 볼 수 있었다.
“너무 움추리다간 실기할 수 있지.”
“회장님. 박원기 주주님과 장수한 CEO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곧 회의실로 오실 겁니다.”
비서의 말에 조제성은 몸을 일으켜서 옷 매무새를 다듬은 다음,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실질적으로 현대에 대한 모든 사업권한은 조제성에게 있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지만, 사업이 확대되면서 지분들을 모두 분배해 나갔다.
특히 박원기에게 전체 지분의 51% 이상을 맡겨두었다. 이런 문제를 철저하게 해두는 것이 장기적인 신뢰관계를 만들어 나간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승희에게 자금 부분 전반을 맡기는 대형 은행을 맡겼다. 대외적으로 은행장은 따로 있지만, 실질적인 자금 관리를 전부 박승희가 맡고있기 때문에 이사장겸 자타공인의 은행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장수한은 제성 에이젼씨를 비롯한 문화 관련 산업을 총괄하는 책임자를 맡겼다. ‘소드 마스터’따위보다 ‘아이돌 마스터’가 되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아직은 제대로 된 아이돌 그룹을 키워내지는 못했지만, 발키리와 엘프 육체를 이용한 모델과 배우 사업은 꽤 성공적이었다. 음악성이 있는 임원진을 채용하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가 가능할 거라고 보고 있었다.
창작 능력은 제로지만, 인간의 육체를 이용하는 것은 극에 달한 발키리들과 게임 캐릭터를 운용하느라 바쁜 엘프들의 껍데기를 이용하는 것은 반칙에 가까운 절대 강자로 군림하기에 아주 충분한 조건이었다.
나이트 엔젤 사건이후, 대중을 한편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가를 더더욱 실감한 후라, 제성의 수한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여, 형님.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 잘 왔다. 그건 그렇고, 너 애들하고 너무 가깝다고 매니저들이 불평이 많더구나.”
“아, 그래요? 저도 엘프들의 그런 부분은 이해가 잘 안가더군요. 특히 엘레니아가 질투라도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형님이 부럽기도 하고.”
이능 엘프사랑 때문에, 발키리가 아닌 엘프들이 제 몸으로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는 언제나 장수한에게 매달렸다. 그 때문에 업계에는 악의에 찬 소문이 돌고 있었다.
“뭐, 네가 하는 일이니, 상관없겠지. 이미 하렘화 되어있는 듯 싶으니.”
“무슨 소립니까, 완전 호스트 취급받는 느낌이에요. 전 엘레니아 뿐이라고요. 그런데, 엘레니아가 다른 애들하고 어울려 주라고 자꾸 쫓아내서 제가 곤란합니다.”
장수한의 항변에, 조제성은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조제성의 경우에도 유혜서에게 푹 빠졌을 때는 사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유혜서의 사치를 위해서 재산을 모으지만, 그녀도 그다지 낭비나 사치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곧 박원기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모이자,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 안건은 바로 이능 각성에 대한 문제였다.
“엘프들의 각성이 없다는게 문제인 건가요?”
“그렇다기 보다는 한국인의 각성이 지나치다는게 문제입니다.”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영상 통화를 켰다. 그러자 게임 화면과 함께 프레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프레이의 말에 따르면, 이능 각성 자체가 흔치 않습니다. 아마도 특별한 프레이야 여신님의 상황에서 비롯된 듯 합니다.”
[제 경우에도 수백년 동안 약 10명 남짓한 이들이 쓸만한 이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강제 각성이지요.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능 자연 각성자는 미라엣 뿐입니다.]
“특수한 상황이라면...?”
“아마도 원기군이 자신을 한국인이자,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겠지요?”
장수한이 정리하듯이 말했다.
[일단 새로운 신으로 각성한 직후에 각성자가 느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오랜 신일 수록 새로운 에인페리아를 얻는 경우가 드문 것도 분명합니다.]
“문제는 두가집니다. 엘프에서 각성이 이뤄지지 않는 것과 한국인에서 각성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지요.”
성역의 범위 내에 사는 이들 가운데 약 1%가 국제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 약 10%가 각성을 하고 있었다. 성역의 범위 내에 사는 인간은 약 1만, 그리고 학생 수는 300에 달했다. 백삼십명에 달하는 이들이 잠재적으로 각성했거나 각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우선적인 문제는 엘프를 어떻게 각성시킬 것인가 보다는 각성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로군요. 쉽지 않은 문제로 보이는데요.”
“아, 각성자들에 대한 처리 방법은 이미 프레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아냈습니다.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물론 여기서 승인을 받아야겠습니다만.”
조제성은 회심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회의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엘프들의 각성문제일 듯 싶군요. 아마, 제성 사장님께는 복안이 있을 듯 싶군요.”
원기는 제성을 보면서 말했다. 제성의 경우, 회의를 통해서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스스로 해결책을 찾고 계획을 세운다음, 회의를 통해서 보고하고 승인받는 형태로 일을 처리하는 면이 있었다.
“요는 프레이야 여신님께서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엘프와는 꽤 거리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 부분을 개선해야 한다는 겁니다.”
“전 엘프들 좋아하는데요. 곁에 있는 이들도 엘프들이 대부분이었고 말이지요.”
“그들은 엘프 본연의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를 배우기 위해서, 철저하게 여신님께 맞춰서 살려고 하는 엘프들의 모습이지요. 거북 전차에서 지내시면서 얼마나 ‘엘프다운’ 생활을 하셨는지요.”
제성이 묻자, 원기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거북 전차에서 지낸 동안은 정말로 원없이 고급 호텔같은 생활을 즐겼다. 곁에 있는 것이 엘프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의 역할은 마치 호텔 종업원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제게 필요한 것은...”
“미드가르드의 생활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될 듯 합니다. 미드가르드의 인간들이 각성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전력이 상승됩니다. 서울에서 각성하는 인간들은 방치할 수 없는 문제거리입니다. 반면 미드가르드에 있는 인간들이 각성하면 즉시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지요. 물론 엘프들이 각성하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지만, 우선은 미드가르드의 생활을 피부로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제성의 제안에 원기는 생각에 잠겼다. 희연의 트레이닝은 꽤 성공적이었다. 종이 같은 하얀 게 날아가면 닭이 습격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는 부작용이 생겼지만, 다수의 적들을 상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신감이 붙었다.
에인페리아로서의 원기에 대해서는 꽤 애착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애써 기른 능력을 활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각성자에 대한 대책 방법은 어떤 겁니까?”
“간단합니다. 능력을 봉인하면 됩니다. 그 방법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