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함정
“무등좀 태워줘요.”
희연은 굴베이그의 돌연한 요청에 살짝 당황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어깨에 올려 태웠다.
‘아무래도 원기보단 내가 더 편한걸까?’
굴베이그가 원기를 대할 때, 정중하다고 할지 좀 어려워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퍼득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산에 지나지 않았다.
“좋았어. 원기오빠. 이대로 희연언니채로 무등 태워줘요.”
굴베이그는 인간으로 삼단탑을 쌓을 심산이었던 것이었다. 원기는 희연을 쳐다보면서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희연 역시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원기의 눈만 쳐다보았다. 원기는 한숨을 쉬고는 허리를 굽혀 앉으면서 말했다.
“어깨가 넓으니까, 어깨에 올라 앉으면 되겠네.”
원기의 주캐인 짬타이거의 경우, 얼굴은 미남이고 덩치는 북두X권에 나오는 권왕 수준이라, 올라앉고도 남음이 있었다. 희연은 가볍게 움직여서 원기의 어깨위에 올라앉았다.
희연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체면을 따지는 사람이라서, 그녀는 어리광을 부려본 적도 없고 무등을 타본 적도 없었던 탓에 내심으로는 한번 쯤 경험해보고 싶었기도 했다.
“와. 높다!”
굴베이그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가볍게 잡아도 2.5미터는 족히 넘어갈 높이였으니 좋아할 만도 했다.
“오빠. 한쪽 어깨 비었는데, 나도 타봐도 될까?”
연하가 그 모습을 보고는 부러운 듯이 말했다. 원기가 상관없다고 대답하고 허리를 숙이려는 순간, 그녀는 훌쩍 뛰어올라서 원기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 순간 그녀의 엉덩이가 원기의 옆머리를 툭하고 쳤다.
“어이, 엉덩이를 아무데나 들이대면 곤란하지. 좀 떨어져.”
“의자는 조용히 하세요.”
연하는 가볍게 무시하면서, 원기의 머리가 팔걸이라도 된 듯이 팔을 걸쳤다.
“박기사. 뭐해. 빨리 안가고.”
연하의 넉살에 굴베이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원기는 굴베이그의 웃음소리에 미소를 짓고 걷기 시작했다.
‘양손의 꽃이 아니라, 양어깨의 꽃이네. 아니. 엉덩인가.’
원기는 굴베이그가 정말로 남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본이 자신의 인격에서 비롯된 탓일까, 정말로 자신의 어린시절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딸을 가진 다는게 이런 기분일까?’
원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눈 앞에 리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어라? 리디아가 아닌가?’
“리디아 언니? 가슴은 어디다 두고 온거야?”
연하가 웃음기를 참으며 물었다. 가슴이 작아진 리디아는 신관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으로 만들어진 보울 형태의 화분을 들고 있었다. 화분에는 작은 싹이 돋아난 가지가 심어져있었다.
세계수의 일부로, 굴베이그의 세계수에서 분리해 낸 것이었다. 나이트 엔젤의 활동에 맞춰서 세계 각지에 성역을 건설한다는 제성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지구와 미드가르드를 오가는 신관이 적은 탓에 신관의 자격을 가진 리디아가 동원된 것이었다. 그리고 게임 캐릭터가 아닌 본체로 온 덕분에 가슴이 원래 사이즈인 것이었다.
“내가 들어도 될까? 리디아언니?”
굴베이그의 말에 리디아는 조심스럽게 화분을 넘겼고 굴베이그 역시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연하가 한마디를 던졌다.
“박기사, 차가 흔들려. 좀더 조심스럽게 못모나?”
원기 일행과 리디아는 굴베이그 성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향했다. 차원게이트는 기본적으로 세스룸니르에 있는 것을 사용했다. 세계수와 리디아는 현실로 직접 향하고, 원기 일행은 게임쪽으로 가서 로그아웃을 하게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오딘이 준비해 둔 장치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원기 일행이 모습을 감춘 순간 작은 폭발과 함께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
“여기가 어디지?”
“글쎄요.”
“조금 전에 저녁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세스룸니르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실내가 아니라, 기괴한 느낌의 숲속에 떨어져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강렬한 한 여름 한 낮의 햇살이었다.
미드가르드의 날씨는 한국처럼 추운 겨울은 아니었지만 제법 쌀쌀한 초봄의 날씨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
[당했군요.]
제성은 세스룸니르에서 파티 채팅을 통해서 말했다. 오딘이 장치한 것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교란하는 장치였다. 임의로 좌표를 수정해서 엉뚱한 곳으로 사용자를 날려보내는 장치였다.
[지금 위치가 어떻게 나오지요? 이쪽 세계에서는 미니맵이 표시가 되지를 않아서.]
원기 일행은 불을 켜놓고 자는 척 누워서 제성과 파티채팅을 하고 있었다. 오딘이 지켜보고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원기 일행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내막을 알고 있는 것은 일단 제성과 수한 뿐이었다.
원기의 정체가 여신이라고 알고 있는 트리아 여제를 비롯해서, 엘프의 고신관들은 미친듯이 원기 일행이 어디갔는지 찾아다니고 있었다. 제성은 고민을 하듯이 머리를 감싸고는 원기 일행과 파티 채팅을 하고 있었다.
[일단 여러분들의 위치는 직선거리로 1만5천키로 가량 떨어져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지구의 거의 남반구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을 겁니다. 전에 프레이를 통해 얻은 지도를 떠올려보면, 세스룸니르가 서울이라고 하면, 대충 호주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돌아갈 방법은...]
[일단 육로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배나 비행기를 이용한다고 해도 오딘이 내버려 둘 리가 없지요. 궁그닐로 격추해버리면 끝입니다. 캐릭터가 부활해도 바다 한가운데가 되겠지요.]
[그런...]
[역시, 오딘입니다. 여신님을 완벽하게 봉인해버린 결과가 되었군요. 그곳에 계신 이상은 로그아웃도 안되고 현실로 돌아올 수도, 프레이야 여신님으로 나타나실 수도 없습니다. 굴베이그님까지 한꺼번에 해결해 버린 셈인가요.]
원기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티 채팅은 있지만 완벽하게 이세계의 오지에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다행이라면 홀로 떨어진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조만간 준비해서 구해드리러 가겠습니다.]
[시간은 어느정도나 걸릴까요.]
원기의 질문에 조제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딘의 방해를 무시하고 원기를 구하러 가려면 거대한 선박이 필요했다. 가능하면 튼튼한 군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좋을 터였다.
그런 선박이라면, 건조에 적어도 1-2년은 걸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오딘의 정체를 알고, 오딘과 전면전을 벌여서 스스로를 지킬 힘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적게 잡아도 3년은 걸릴 것 같군.’
조제성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렵게 파티 채팅을 통해서 입을 열었다.
[원기님.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동안 군대나 다녀 오셔야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입 마치고, 군대 다녀오실 즈음에는 구출대가 갈겁니다. 그때까지 그곳에서 버티실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원기는 그제야 제성이 말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었다. 3년 정도는 구하러 올 수 없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동안 본체는 대입 마치고 군대에 보내놓을테니 조바심내지 말고 기다리라는 소리였다.
‘땅바닥을 굴러도 절대 빈손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사람이라는게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하는구나.’
원기는 마음이 살짝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 대한 정보는 없나요?]
[과거에 거인족과 아스신족이 패권을 노리고 싸웠던 곳이라고 합니다. 과도하게 집적된 신성력에 의한 폭주로 황폐화 되어서 지금은 버려진 곳이나 다름 없다고 합니다. 지금 곧 프레이를 좀 더 쥐어 짜보겠습니다만, 현 상태로는 그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다.]
[예. 그럼 내일 밤에 다시 뵙지요.]
원기는 크게 한 숨을 몰아 쉬었다.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숙제가 던져진 셈이었다.
물론 파티채팅을 비롯해서 영상채팅이나 오프라인 검색 등의 게임 캐릭터로서의 기능이 살아있었다.
‘문제는 리디아로군.’
리디아는 현재 본체로 와 있었다. 그리고 발키리들은 이곳으로 올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죽는다면 그걸로 끝이 날 수도 있었다. 정령이 된다는 것은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는 것이기 때문에, 위안은 될 수 있을지몰라도 살아있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죽음에 의한 패널티도 문제가 되었다.
레벨을 보충할 수 없기 때문에 떨어진 레벨은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대한 죽지 말아야 하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예외가 하나 있긴 있군.’
원기의 생각이 굴베이그에 미쳤다. 하지만 남처럼 안느껴지는 열살 남짓의 예쁜 미소녀를 죽으라고 굴리는 것은 역시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리디아가 신관이라는 사실과 세계수가 있다는 것, 이게 길일지 흉일지 잘 모르겠는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