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천년만년
‘소금이 이렇게 구하기도 보관하기도 힘들었다니.’
내륙 지방으로 옮겨갈 계획을 세우던 원기에게 있어서, 의외의 복병이 닥쳐왔다. 바로 소금의 존재였다.
자급자족의 생활은 의외로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굴베이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프인 리디아는 온갖 식재료를 숲에서 채집해 왔다. 과일부터, 나무껍질, 뿌리, 잎파리, 꽃까지 조달해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게임 캐릭터로 보통 사람의 세배의 힘을 가볍게 구사하는 원기와 희연, 연하는 몇사람 분의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원거리 정찰과 사냥은 연하의 몫이었다. 연하가 사냥해 온 짐승을 해체하는 것은 희연의 몫이었다.
어이없게도 게임에서 익힌 무두질이 아주 유용한 생활스킬이 된 것이었다. 실제로 동물의 사체를 해체해 본 경험이 있는 것은 리디아였지만, 해체하고 가죽을 벗기는데 한시간 이상이 필요했다면, 희연의 무두질 스킬은 단 20초만에 가죽을 분리해내는 말도 안되는 일을 해냈다.
‘20초도 길다고 난리들을 쳤었는데, 이게 진짜 사기로군.’
문제가 있다면, 무두질 스킬을 사용하면 가죽만 남고 살고기를 비롯해서 뼈다귀까지 몽땅 사라져버린다는 점이었다.
우선 가죽이 급히 필요해서 스킬을 사용하긴 했지만, 경제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집을 짓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다.
아니, 집을 지었다기 보다는 집을 팠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못이 없기 때문에 나무로 집을 짓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집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눈에 띄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토굴이었다. 원기가 땅을 파면 희연이 잘게 잘라낸 나무를 벽에다가 대는 것이다. 그리고 가죽 끈으로 나무들을 엮어서 고정한 다음, 그 위에 가죽을 몇겹으로 대는 것이다.
습기에 약하다는 점에서 장기간 머무르기는 힘들겠지만, 제법 보온이 잘되는 주거를 얻을 수 있었다.
입구라기보다는 천정에 가죽끈으로 엮은 나무판을 만들고, 그 위에 풀과 낙엽을 이용해서 위장을 해놓았다.
적에게 습격받을 경우를 대비해서 토끼굴처럼 사방으로 탈출용 출구를 만들어 놓았다.
그 덕에 원기는 자신이 인간인지 짐승인지 헷갈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대검은 삽이 아니었기 때문에, 땅을 파는데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큰 도움이 된 것이, 바로 애완몬스터인 ‘은호’였다.
만약 은호에게 땅파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런 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이 오는지 감시해라. 적을 공격해라. 공격하지 말아라. 그자리에 대기해라. 주인 곁으로 되돌아 와라.라는 명령 뿐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어디로 가라, 적을 공격하거나 말아라. 이것 뿐이었다. 그래서 원기가 쓴 것은 합체였다. 강력하고 탄탄한 발톱과 억센 앞발로 웅크리고 땅을 파는 것이다.
몬스터와의 합체는 두 가지 타입이었다. 하나는 코스플레용으로 모습만 몬스터와 융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몬스터와 합체로 전반적인 스탯이 상승하는 ‘스킬’이었다.
스킬의 경우 사용시간 5분에 쿨타임 30분이었다. 게임에선 아주 유용했지만, 몇시간 이상을 싸울 수도 있는 전장에선 생각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면, 코스플레는 그냥 모습만 바뀌는 것이지만, 미드가르드에선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었다.
게임 속에서는 원기와 희연의 능력차이는 거의 없었다. 같은 만렙 캐릭터이기 때문이었다.
덩치가 크다고 힘이 세지도 않고,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리치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미드가르드에서는 덩치가 큰 만큼 원기쪽이 더 힘도 셌고, 무게도 더 무거웠다.
몬스터와 합체하는 코스플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와 꼬리가 돋아나는 여성의 변신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지만, 완전히 동물처럼 되어버리는 남성캐릭의 변신은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강력한 발톱이 건재했고, 두꺼운 털가죽이 있었다. 습기에도 강하고 보온 효과도 강했다. 더운 날씨엔 좀 약하지만 장점이 단점보다는 많았다. 그러다보니 하루종일 호랑이 모습으로 웅크리고 토굴을 파는게 원기의 역할이었다.
쿨타임이 차면 스킬을 사용해서 바위도 발톱으로 파고들어가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네발로 기어다니며 땅만 파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토굴이 완성되자 할 일이 없었다.
‘내가 가장 쓸모 없는 건가.’
원기는 살짝 자괴감에 빠졌다. 자신을 노린 오딘의 함정에 말려든 다른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희연과 연하는 현대인이면서 이런 정글에 떨어지게 된 것을 생각하니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태평한 건 이녀석 뿐일까?’
옆에서 떨어지려고 들지않는 굴베이그를 보면서 원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특히 짬타이거랑 합체했을 때는 원기의 머리를 비롯해서 털가죽을 이곳저곳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손바닥을 비롯해 발바닥까지 만지작거리려고 해서 곤란했다.
(몬스터 변신때는 의상도 그에 맞춰 변화되는데, 조끼와 반바지가 기본 의상이었다.)
발바닥은 간지러워서 금지시켰고, 손바닥만 만지게 해주긴 했지만 손바닥역시 꽤 간지러운 편이라 꽤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다만 처음엔 머리를 쓰다듬거나 턱을 쓰다듬는게 난감한 기분이었지만, 어느 틈엔가 그 손길에 익숙해져 버렸다. 특히 턱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묘하게 기분이 나른해지면서 편안해졌다.
‘이러다가 완전히 애완동물 되는거 아닌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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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세계에서 이탈은 확실히 희연에게는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계획성이 철저한 그녀에게 있어서, 학업을 통째로 포기하고 이런 정글에서 지내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다지 동요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원기의 존재 때문이었다. 아니, 원기의 캐릭터인 짬타이거 때문이라고 해야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미 원기를 꽤 좋아하고 있지만, 원기의 실체에 대해서는 조금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원기에 대해서 부족함을 느낀다기보다는 짬타이거 상태의 원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게 옳을 것이었다.
전장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거대한 덩치로 용맹하게 싸우는 그 모습은 일반 병사들에게만이 아니라, 함께 검을 휘두르는 그녀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곁에 원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최근들어 짬타이거 상태인 원기와 별개로 움직이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꽤 아쉬움을 느꼈던 그녀였기에 적어도 2년에서 3년 정도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 못하고 늘 함께 지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꽤 만족스러웠다.
‘뭐, 남자들도 자기 여자친구가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납득했다. 그녀 스스로도 다른 누가 원기처럼 캐릭터를 만들어 온다손 치더라도 그다지 끌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 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실제로 원기와 비슷한 타입의 덩치와 전술을 가진 전사인 그렌에게 그녀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녀는 반인반호의 모습으로 곰가죽 위에 가로누워있는 원기의 모습을 보았다.
희연은 개보다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호랑이화된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털가죽에 파묻히듯이 기대서 쉬고있는 굴베이그의 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옆에서 털관리를 해준다며 털을 빗겨주는 리디아의 존재였다.
- 사실 저는 원기님을 좋아해요. 물론 희연님과 원기님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인간들의 사랑과는 다른 감정이라고 보시면 되요. 전 인간이 아니니까요.
리디아는 과감하게 그녀에게 고백한 바 있었다. 희연으로선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여도 될만한 선언이었지만, 왠지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제가 보기엔 원기님도 희연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게는 그런 인간적 감정을 갖고 계시진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곁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상해.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받아들인걸까.’
희연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리디아의 이능인 배가교환의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리디아에 대한 호감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상식을 애써 왜곡시키고 있었다.
‘그래,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야지. 애완동물에게 질투한다면 너무 한심한게 아닐까.’
희연은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리디아를 위해서 자신이 물러난다는 것은 눈꼽만치도 생각치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희연님의 마음은 진짜로군요.’
리디아는 갈등하는 희연의 모습을 귀로 느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독점욕에 가까운 사랑의 개념과 고지식함의 극을 달리는 희연의 성격을 생각하면, 리디아를 위해서 물러난다는 선택이 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배가교환의 법칙은 진정한 충성심, 신념, 애정 등에 대해서는 뒤트는 것이 불가능했다. 우회적 접근만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리디아는 인간적인 연애관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원기에게 다가서는데 가장 어려운 장애물인 희연을 통과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살충 식물을 좀더 찾아와야겠는걸.’
리디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엘프들은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벌레들의 문제에 대해서도 대처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살충효과가 강한 식물들의 존재였다.
식물들의 천적 중 하나가 벌레였고, 이 벌레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위해 강력한 살충효과를 가진 식물이 많았다.
그런 식물들의 즙을 짜서 이곳 저곳에 발라두면, 대부분의 벌레들에게서 안전할 수 있었다.
특히 깔끔한 것을 좋아하고, 벌레를 싫어하는 희연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희연에게 더 이상의 압박을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용히 희연 모르게 희연을 위해 벌레 방지 대책을 강화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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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내라. 2백만달라로 참아주지.”
“대체 왜 우리가 돈을 내야 한다는 거요.”
“우리가 나이트 엔젤을 해치워 주지 않았나. 너희를 괴롭히던 놈, 아니 계집을 해치워 줬으니 사례를 해야하는 것 아닌가?”
“남부 패밀리에게서 미화 백만불을 청부금으로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 우린 거저 먹으려는 놈들을 정말 싫어하거든. 너희들도 보통 그러지 않나? 그래서 2백만불이야. 미화로.”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그래. 기다려 주지. 뭐, 지불하지 않아도 상관 없어. 그렇게 되면 너희를 해치운 사례를 남부와 북부 패밀리에 청구하면 될 뿐이니까 말이지. 사실 그쪽이 더 짭짤하고 말이야.”
레이니는 파워드 나이트의 두꺼운 장갑 속에서 경멸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동족들을 뜯어먹는 범죄자라는 것은 엘프들에게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멸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조제성은 발키리들을 치안이 어지러운 곳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그래서 범죄자들의 범죄 기록을 이능과 발키리들을 통해서 완벽하게 조사해 두었다.
특히 경찰들 가운데에서도 범죄자들에게 뇌물을 받는 이들이나 범죄 가담자들을 확실히 조사해 두고 있었다.
레이니가 보스 앞까지 난입하면서 죽여버린 이들은 그 조사 결과에서 악질적으로 판명난 이들 뿐이었다. 거의 모든 이들을 난폭하고 무차별하게 공격하면서 길을 연 것처럼 보이지만, 발키리의 안내로 죽여야 된다고 판단된 이들만 골라 죽였다. 모두 죽여봐야 또 다른 놈들이 들어서기 때문에 이런 저런 계산 하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래도, 자넨 운이 좋았어. 말이 통할 것 같았으니까. 자넬 죽이고 다른 놈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네.”
레이니의 음성은 파워드 나이트의 스피커를 통해서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니의 혐오감은 듣는 이들에게 확실히 전해지고 있었다.
수틀리면 죽여버릴 수도 있다가 아니라, 왠만하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수십명의 조직원들이 건물 파편이나 유탄에 죽거나 부상을 입은 상태로 널려 있었다. 숨어있다가 유탄에 맞아죽은 이들 가운데에는 보스의 골치덩어리 동생도 있었다. 사실 레이니가 노리고 죽인 악질 범죄자 리스트 넘버 원이었지만, 우연히 죽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두라고.”
뇌물을 먹여서 끌어들였다지만, 경찰들까지 거침없이 처리하고 나타난 스스로를 파워드 나이트라고 소개한 검은 갑옷의 거한에게 굴복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갱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설사 있다고 해도, 그들은 보스의 코앞에 나타나기 전에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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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괜찮은 겁니까? 저러면 저놈들이 자신들 손실을 매우려고 더 난리를 치지 않을까요?”
장수한이 파워드 나이트에게서 보내지는 영상을 보면서 조제성에게 물었다. 파워드 나이트의 징수는 장수한으로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이트 엔젤을 해치웠으니 그 댓가를 받겠다는 명목으로 다짜고짜 갱들에게 쳐들어가서 돈까지 거둬오는 것은 감동적이라고까지 할만 했다.
“상관없어. 일시적으로 치안은 나빠지겠지만, 갱들에 대한 시민의 반감이 커지겠지. 그때 나이트 엔젤이 나타나면 갱들을 처치하기는 더 쉬워질거야. 갱들에 대한 증오심이 없이는 퇴치가 불가능해.”
정부가 신뢰를 잃으면, 사람들은 범죄를 통해서라도 자신들이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범죄보다 정부를 증오하게 된다면 치안은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멕시코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이트 엔젤과 파워드 나이트를 잘 활용하면, 질서있는 문명 세계를 되찾는데 도움이 될거야.”
제성은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의 관심은 미드가르드에 투자할 재원을 마련하는 것 뿐이었다. 언젠가 미드가르드의 신들을 청소하고 프레이야 여신의 영도아래 이상향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이상향에서 유혜서와 천년만년 사는게 그의 꿈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돈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고작 백년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천년도 부족할게 뻔한데.’
조제성은 장수한을 슬쩍 쳐다보았다. 머리는 좋지만, 그다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사용은 하지 않았다. 명백히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뭐, 한 오백년 정도는 친구로 지낼 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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