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혼돈
“거인 전사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토르님의 전사들을 이런 벽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소문으로는 거인 에인페리아들이 망가졌다고들 하던데? 별거 아니라고들 하더군.”
양팔이 거대한 고릴라의 손으로 된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대하는 인간 상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거 아니라니요. 토르님의 에인페리아들은 최강입니다. 그건 단언할 수 있어요.”
“최강의 에인페리아들이 일방적으로 깨졌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최강의 에인페리아들’과 ‘최강의 에인페리아’는 의미가 다르니까요. 거인 전사들은 질과 양에서 집단으로서는 최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이야의 에인페리아들은 그에 비하면 형편없지요. 검의 여왕이 특별할 뿐입니다. 그 대단한 검의 여왕조차 밀레니아님의 돌파를 막지 못했다고 하지요. 전쟁은 돌파력입니다. 개개인의 기량만으로 평가하는 건 곤란하지요. 그리고 거인 전사들 개개인이 기량은 수인족들이 넘볼 수 없을 겁니다.”
상인의 눈빛이 번뜩였다. 토르의 어용 상인은 수인족으로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에 고릴라의 팔을 가진 사내는 한발짝 물러섰다.
“그렇군. 토르의 거인전사들이 별거 아닐 리는 없지. 하지만 망가졌다는 소리에는 대답을 안하는건가?”
“상대가 나빴다고 밖에는 말 할 수 없지요. 현신한 신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것 뿐입니다.”
프레이야의 고통을 안겨주는 검의 공격은 토르의 에인페리아들에게 죽음과는 비교도 안되는 두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용맹한 토르의 에인페리아들은 부활 후에 하나같이 더 강해졌다. 끔찍한 고통을 알게됨으로써 왠만한 어려움은 가볍게 이겨나갈 수 있는 정신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프레이야의 영역쪽은 쳐다보려고도 들지 않는 후유증이 남았다. 그로 인해서 프레이야에게 죽었던 에인페리아들 중 밀레니아를 제외한 거인 전사들이 몬스터 랜드에 배치된 것이었다.
절대로 프레이야와 얽힐 일이 없는 곳에서 정신적 후유증을 치료함과 동시에 강인한 정신력을 갈고 닦으라는 의미였다.
사실 전투에서 죽은 대부분의 에인페리아들은 검의 여왕에게 죽었기 때문에 프레이야에게 당한 수는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피바람이 불겠군.”
“그건 그렇겠지요.”
내륙에 존재하는 혼돈의 신성력은 외부의 신성력을 거부한다. 몬스터가 되었건, 에인페리아가 되었건 신성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존속하기 힘든 존재였다.
신성력에 의지하는 비중이 적은 자들만이 내륙과 해안을 오갈 수 있었다. 그 경계에 있는 자들이 고릴라의 팔을 가진 자와 같은 이른바 하프 비스트였다. 하프 비스트들은 라이칸슬롭처럼 인간과 짐승의 모습을 오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신체의 일부가 돌연변이 화해서 동물화된 인간들이었다. 변화된 신체 부위가 반드시 도움이 되라는 법도 없었다.
혼돈의 영향으로 인간이 몬스터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몬스터 랜드에 버려진 늑대 펜릴의 거체와 비룡 니드호그의 거체가 영향을 줘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짐승화 되거나, 파충류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는 혼돈의 신성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몬스터 랜드 주변 전체를 휘감고 있던 혼돈의 힘이 줄어들면서, 해안은 아스 신족과 거인족이 다시 들어설 수 있는 영역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아스신족인 토르의 항구 도시와 거인족인 헬의 항구 도시가 대륙 북쪽에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고, 동시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부탁하신 물품들의 리스트입니다. 창고에 적재해뒀으니 확인하시고 가져 가시면 됩니다.”
사내는 수인에게 종이를 넘겼다. 고릴라의 큼직하고 조금은 둔해보이는 손가락이 생각보다 부드럽게 종이를 받아서 펼쳐 보았다.
몬스터를 잡아서 아스 신족이나 거인족에게 넘기고 얻는 것은 주로 무기와 상류층의 기호품이었다.
식량은 늘 부족했지만, 몬스터를 이용해 식량을 사들이기보다는 다른 부족을 쳐 죽이고 식량을 얻는 쪽을 선택했다. 강인한 육체와 야성화된 성격 때문에, 제대로 된 금속 무기를 만드는 기술조차 발달하지 못해서, 북반구에서 생산되는 고급스러운 무기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아, 그일인가. 모두들 동요하고 있더군.”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라고 하던가요.”
“구세계의 종말이라고 하는 자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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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썬더 드래곤으로 몬스터를 바꾼게 정답이었나.”
연하는 하늘을 활강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피닉스 대신 썬더 드래곤으로 몬스터를 바꾼 상태였다. 피닉스와 드래곤의 차이는 바로 날개의 차이에 있었다.
피닉스의 날개에 비해서 썬더 드래곤의 날개가 월등히 컸다.
물론 날개가 크다고는 해도, 비행 능력은 피닉스가 월등했다. 하지만 두 몬스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몬스터와 융합된 상태가 아니고서는 날개짓을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쿨타임동안 피닉스는 비행할 수 없었다. 드레스업 상태(몬스터를 입는 것을 흔히 이렇게 불렀다)에서는 작은 날개 덕분에 활강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드래곤은 달랐다. 비행 능력은 빈약했지만, 날개는 엄청나게 크고 멋졌다. 그리고 쿨타임중에도 날개를 펄럭이진 못하지만, 모양을 미세하게 조종하는 것이 가능했다.
드레스업 모드에서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유저의 의사를 반영한 탓이었다.
그리고 바람을 읽는 그녀는 그 날개를 이용해서 활강하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비행 능력이지만, 드래곤의 날개가 크다고 해도 글라이더보다는 좀 작은 편이라서, 한계에 가까운 상태에서 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비행을 위해서는 절벽이나 높은 나무에서 뛰어 내리면서 바람을 타지 않으면 안되었다. 융합 상태라도 그리 쉽게 날아오르지는 못했다.
정찰용과 이동용으로 쓸모는 있지만, 수송용으로는 쓸 수 없었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주변을 비행하면서, 정찰을 했다.
그 덕분에 주변 약 50키로에 달하는 범위를 정찰하는데 성공했다. 하늘을 날으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몬스터와 융합해서 스킬 체인 라이트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체인 라이트닝은 한번에 최대 다섯마리까지 마비시키는 능력이 있어서, 비행 몬스터들을 따돌리는데 유용한 편이었다.
‘문제는 비행 시간이로군.’
그녀는 활강에 상승기류를 이용했기 때문에 야간에는 비행이 불가능했다.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한낮에 이곳 저곳에서 아지랭이와 함께 발생하는 강한 상승기류가 아니면 고도를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좋은 오전에 해안에서 내륙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오후에 해안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돌아오는 것이 그녀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녀가 본 것들 가운데 일부는 정지화상으로 만들어져서 제성과 수한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정교한 맵을 작성 중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연하의 모습이 다수의 존재들에게 목격당하는 것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구부러진 뿔이 달린 머리에, 박쥐의 날개, 뱀의 꼬리가 달린 소녀가 하늘을 날며 번개를 뿌리는 모습은 혼돈의 대륙, 몬스터 랜드에 사는 이들에게 적지않은 파문을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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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고르셔도 하필이면 이런 드라마를 고르셨습니까.”
장수한은 드라마 대본을 들쳐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가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거기에 원기와 희연, 연하가 출연하기 때문이었다.
연기의 폭은 넓지만, 아직 깊이가 깊다고 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었다. 발키리의 미세 근육 조종으로 멋진 표정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황금 조합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살인미소라고 불리우는 미소 하나만으로도 원기가 엄청난 인기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다른 표정들은 그렇게 완벽한 깊이를 지닌 것은 없었다.
뛰어난 연기력이지만 왠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깊이가 더해진다는 평가도 따르고 있었다.
“아직 연기에 깊이도 부족하지만, 이런 드라마가 더 좋아. 질좋은 드라마는 배우가 묻히지.”
“정말 그이유 뿐입니까?”
“무슨 소린가.”
갑자기 예리해진 장수한의 눈초리에 조제성은 살짝 눈길을 피했다.
“형수님 취향이 반영된 거 아닙니까? 형수님이 이런 드라마를 즐기시는 것 같았는데.”
“그렇지? 혜서가 좋아할 것 같지? 그럼 좋겠는데 말이야.”
유혜서의 취향이라는 말에 조제성이 눈을 반짝였다. 장수한은 그 순간 아무말도 통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유혜서의 취미는 딸과 함께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미드가르드에 머무는 기간이 오래되다보니 TV를 끼고 사는게 습관이 된 것이었다. 지구로 돌아와서 쇼핑하기, 세스룸니르의 넓은 정원 가꾸기, 그리고 지구에서 가져온 데이터로 TV를 보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딸 조은혜는 아무리 좋은 영화나 드라마라도 미남이 안나오면 거들떠도 안보는 극히 일반적인 젊은 여성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혜서도 막장이라고 불리우는 종류의, 내용보다는 잘생긴 배우들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둔 드라마에 빠져든 것이었다.
“이걸 보면 원기 녀석이 어떻게 생각할런지...”
“괜찮아. 여신님이 친구로 삼은 녀석들을 생각해 봐. 드라마에 관심도 없으시니 괜찮아.”
‘자기가 출연하게 된다고 하면 좀 다를 것 같은데. 베드신은 얼마 없으니 상관 없으려나.’
장수한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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