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털북숭이
“이봐. 이게 노예용 목걸이라고?”
용변을 보기 위해서 수풀로 향하던 재카이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그리고 약간은 고압적으로 들리는 말투였다. 재카이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렇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경어였지만 그는 그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잠깐 쳐다본 것만으로도 그녀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를 보고도 돈을 주고 산다는 발상을 하는 미친 놈은 없겠지.’
빚을 지거나 죄를 지으면 노예가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반수나 진수도 노예가 될 수 있도록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진수 노예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진짜 힘을 가진 이들은 법의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법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반면, 그녀처럼 아름다운 반수들 가운데는 노예들도 적지 않았다. 힘있는 자들이 소유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노예를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부다처는 물론 다부일처, 다부다처도 존대했다. 우수한 자손을 만들기 위해서 근친교배를 강제하는 경우까지 존재했다.
혼돈의 힘에 의해 태어나는 기형아, 곧 돌연변이들은 힘을 이기지 못해서 얼마 못가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힘을 받아들이고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미녀라면 거래 대상이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만약 그녀가 그런 여자였다면 되든 안되든 가진 돈을 다 털어서 교섭이라도 해봤을 것이요, 그게 잘 안되었다면 몬스터 사냥을 이용해서 백호의 등이라도 찔러 볼 생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보호본능이나 소유욕따위는 눈꼽만치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갑고 예리한 그래서 아름답고 두려운 눈동자를 보면 경외가 느껴졌다.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느껴주게 하는 그녀를 보면서, 감히 돈을 주고 얻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젊다못해 어려보이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존대말이 나온다는 것은 재카이의 연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 그렇다면 말이지, 정실을 상징하는 목걸이는 어떤 형태를 지녔지? 간단하게 설명해 봐. 아, 그리고 호위무사라든가, 오른팔, 아니다. ‘누군가의 검’ 혹은 ‘누군가의 방패’같은 상징이 되는 목걸이 같은게 있나?”
재카이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정실을 겸한 호위무사를 말하는 겁니까? 공사 모든 면에서 주군을 지키는?”
재카이의 반문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주 작은 긍정의 태도였지만, 재카이는 그녀가 원하는 정확한 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심 띠의 색은 목걸이의 주인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크기는 신분을 상징하지요. 디자인은 어느정도 자유로운 편입니다. 목 전체를 감싸는게 보통 무인(귀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목걸이에는 뱃지를 박아 넣습니다. 그 뱃지가 그 사람을 상징하게 됩니다. 보통 일부일처제의 경우엔 붉은 색을 하고, 정실의 경우엔 보라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호위무사, 혹은 뛰어난 검사 등은 그를 상징하는 뱃지를 구해서 다시면 됩니다. 다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대회에서 우승해서 얻는 뱃지를 특별히 처주는 편입니다.”
그녀는 그의 답변에 만족한 듯 몸을 돌려서 걸음을 옮겼다. 재카이는 살짝 쓴 웃음을 지었다. 칼밥을 오래 먹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백호는 알기 쉬운 강함을 가졌지만, 붉은 여우는 알면 알수록 끝을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대회 우승자와 정식 결투를 벌이고 승리해서 죽일 경우, 상대의 뱃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살육극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챔피언의 뱃지 못지않게 챔피언 슬레이어의 뱃지도 강함에 죽고 사는 이 대륙에서는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오려던 똥이 들어가버렸네.”
그는 그렇게 투덜대고는 수풀에 소변을 보면서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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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역시 욕구불만인가.’
희연은 원기를 보면서 내심 미소를 지었다. 몬스터 사냥에 참가한다고 했을때, 원기는 일선에서 검을 휘두르면서 인간형 몬스터들(주로 오크)과 대결하는 것을 떠올렸다. 물론 그것은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벌어진 첫 몬스터 사냥은 전혀 달랐다. 독묻은 미끼를 이곳 저곳에 뿌리는 동안, 미끼를 뿌리는 이들을 덥치려고 드는 몬스터를 막기 위한 호위 역이 전부였다. 그들은 몬스터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는 식물을 주위에 두르고, 요란한 금속 악기, 꽹가리와 비슷한 것을 두들기면서 돌아다녔다.
몬스터들은 전반적으로 큰 소리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몬스터 사냥은 전쟁이 아니라, 사냥이었다.
위험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예측하지 못한 사고로 인한 피해자가 한 둘 나오는 정도여야 하는 것이다. 왠만한 사태에도 사망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정도의 치밀함과 준비가 없다면 사냥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가시달린 왕쥐들에 대한 사냥은 그렇게 독묻은 먹이들을 곳곳에 뿌리는 것만으로 끝냈다. 먹이를 먹었는지, 얼마나 죽었는지 같은 것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사냥은 뿔달린 멧돼지 사냥이었다. 육식을 즐기는 거대한 멧돼지, 그 머리에는 아메리카 들소와 비슷한 뿔이 달려 있었다. 몰이꾼들이 숲속에서 몰아대고, 흥분해서 달려온 멧돼지들을 미리 파 둔 구덩이에 빠트린 다음 창으로 찔러 죽이는게 전부였다.
원기가 맡은 역할은 뛰어 올라오는 멧돼지 괴물이 있을 때, 방패로 막아서 제지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구덩이가 충분히 깊고 바닥이 질퍽해서 뛰어올라오는 멧돼지 괴물 따위는 없었다. 강한 무사들은 기본적으로 보험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아무일도 없는게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덕택에 마차삯을 아끼고, 추가로 돈도 받지만 돈이 아쉬워서 택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원기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희연은 최근 원기를 보면서, 가슴속에서 묘한 충동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그녀의 평정심을 깨뜨리고 말았다.
“저, 원기 오빠. 좀 만져봐도 되요?”
“응? 어딜?”
희연과 굴베이그는 원기의 털을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곰인형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아이는 거의 없다.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털북숭이를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원기도 그걸 싫어하지는 않았다. 희연이나 굴베이그의 손길이 털위를 쓰다듬는 것은 뭐랄까 안정감을 주었다. 맨살을 쓰다듬는 것 같은 야한 느낌이 아니라, 머리카락위를 쓰다듬는 듯한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특히 턱부분을 쓰다듬어주면 목이 녹는 듯이 나른해지면서, 묘한 숨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조금 민감할 배쪽 털부터 꼬리털까지, 왠만한 부위를 전부 빗겨주고 쓰다듬던 그녀가 더 만져볼 곳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혓바닥이요.”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개들은 사람을 잘 핥는 편이지만, 고양이들은 좀처럼 핥지 않는다. 그리고 감촉은 개들과는 전혀 달랐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있었다.
그녀가 궁금하게 여기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원기는 씨익 웃으면서 혓바닥을 내밀었다. 희연은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으로 원기의 혓바닥을 살짝 쓸어내렸다.
“음, 핥아봐 줄까?”
원기는 자신이 말을 꺼내고도 왠지 이상하게 들려서 얼굴을 붉혔지만 털 덕택에 표가 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희연 역시 별다른 의식을 하지 않았다.
“부탁해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수건으로 재빨리 손을 닦고는 내밀었다. 호랑이의 큼직한 혓바닥이 그녀의 손을 핥자 까끌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탄성을 질렀다.
“저도요. 저도 해줘요.”
굴베이그 역시 호기심이 가는 듯, 손을 내밀었다. 기대서 폭 파묻혀서 잘 수 있을 정도로 덩치큰 고양이과 동물이라는 것은 여자들에겐 로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침대겸 애완동물 취급받는 것이지만, 기뻐하는 희연과 굴베이그를 보면서 원기 역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굴베이그의 요청에 그녀의 뺨을 핥아 주었다. 물론 희연에게도 서비스를 해주었고, 둘은 기뻐하며 원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거 첫키스라고 해야 하나? 입술이 닿지 않았으니 키스는 아닌가?’
서비스를 해주다 보니 원기의 혓바닥이 몇차례 굴베이그와 희연의 얼굴 위를 덮다시피 오갔다. 사심없이 즐거워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원기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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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마차 안에 괜찮은 물건이 있단 말이지?”
“예. 최상급품이었습니다. 남자 손을 탔다고 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을 만한 최상급품이었습니다. 왠만한 반수들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그런 분위기를 가졌습니다.”
“정말 돈이 되는 건 맞는 건가?”
“저희 천한 것들에겐 감히 넘보지 못할 존재감을 가졌습니다만, 진짜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에겐 도시 한두 개 쯤은 문제가 안 될 그런 물건입니다. 보기만 하면 한 눈에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줄무니 하이에나의 모습을 한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옆의 동료를 보았다. 동료역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두목은 애꾸눈의 거대한 붉은 색 하이에나였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는 금색 외뿔이 자리잡고 있었다.
“흰색 호랑이라, 난 태어날때부터 큰고양이들이 정말 싫었지. 마침 잘되었다고 해야 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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