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전장의 지배자
도적무리가 나타난 순간, 역마차 집단의 대응은 극히 신속했다. 수레와 마차를 이용해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궁수들이 안쪽에서 자리잡은 다음 활을 겨눴다.
그리고 일부 전사들이 방패를 들고, 수레와 수레 사이를 메우는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하이에나단이다!”
도적들을 지켜본 한 궁수가 외치자,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하이에나계 진수들로 이루어진 악명높은 도적단이었다.
그리고 그 보스인 그루드는 하이에나형 신수였다. 금색 외뿔을 지닌 붉은 색의 몸체는 여행객들에게 있어선 공포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원기와 희연에게 쏠렸다. 그들이 노릴만한 고가의 상품으로 그녀보다 그럴 듯 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기에게는 진수의 강함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진수와 반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지만, 신수와 진수 사이에는 그리 큰 전력 차이가 존재한다고는 볼 수 없었다.
반수들이나 진수들이나 신수들이나 짐승 부분이 갖고 있는 힘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반수의 경우 인간적인 약한 부분 때문에 가진 힘을 다 살릴 수 없을 뿐이었다.
진수와 신수의 차이는 신수가 혼돈이 부여한 이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혼돈은 의지가 없는 신들의 잔재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혼돈의 대륙에 사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 이능을 부여하는 특성이 있었다.
“저 두목은 번개를 쓰는 그루드라는 놈이요. 저놈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저들은 물러갈거요.”
역마차를 이끄는 미노타우르스를 연상시키는 진수가 말했다. 가장 무거운 짐수레를 끄는 역할을 맡아서 원기 일행과는 그다지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뇌전을 다루는 이능을 가진 신수인 그루드지만, 하이에나의 신수와 호랑이의 진수라면 승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었다.
원기는 드디어 갈고 닦은 기량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검 하나를 쥐고 자세를 갖추고 앞으로 나섰다.
‘과연 진수들이로군.’
늑대인간들과도 비슷해 보였지만, 좀 더 못생긴 그들은 큼직한 나무 방패를 앞세우고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래서 궁수들도 좀처럼 활을 쏘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는 순간, 방패를 던지고 수레를 뛰어 넘어서 난입해서 공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희연은 그런 원기의 모습을 보면서 살짝 혀를 찼다. 그녀는 하이에나단의 무리를 살펴 봤다. 진수 약 스무 마리.
상당히 강력한 전력이라고 볼 수 있을테지만, 희연 혼자서 감당 못할 숫자는 아니었다.
그녀가 보기에 사제의 지원을 받는 용전사들만이 에인페리아 수준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수준의 적은 뿔 달린 하이에나 한마리 뿐이었다.
이쪽에도 진수가 한마리 있었고 반수가 사십마리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 노예들이 삼십 명 가량 있었다.
‘잘 된건가. 이 기회에 한번 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려나.’
물론 희연은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위태로운 것은 원기였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막 껍질을 깨고 성장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었다.
‘뭐 질 일은 없을테니까.’
죽어도 부활하는 게임 캐릭터라지만, 죽음으로 인한 페널티가 없지는 않았다. 우선 죽는 순간 경험치 손실이 있다. 한번 죽는다고 바로 레벨이 하나가 떨어지진 않지만, 경험치를 다시 채울 방도가 없는 혼돈의 대륙이라는 점에서는 아까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 하루 동안 능력치가 절반 가까이 다운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죽으면 경험치 페널티는 대거 증가한다.
하지만 대게 중요한 전투가 하루에 벌어지기 때문에, 하루동안 몇 번, 혹은 몇십번을 죽는 경우가 생겼고, 그 경우엔 레벨이 수십번 다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장비의 손실이었다. 게임상 아이템은 이쪽 세계에선 못쓴다. 결국 갑옷과 무기 등을 떨구는 것이 꽤 치명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희연이 전장을 제압할 수 있다면 장비를 되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할까?”
“한번 뛰어들어 봐요. 마음껏. 대신 실망하진 말아요.”
원기는 희연의 사인이 떨어지자, 도움닫기를 하고 마차위로 한 걸음에 뛰어오른 다음 마차 위에서 방패를 든 하이에나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방패는 그저 두꺼운 나무로 만든 문짝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화살을 막는 용도일 뿐이라, 원기는 쉽게 상대를 넘어뜨리고는 다른 상대를 향해서 검을 쓸 수 있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베기, 그의 검은 예리한 궤적을 그리면서 직선보다 더 빠르고 가까운 곡선을 그렸다.
마치 공간을 자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검은 상대의 두껍고 무겁기만한 방패를 가르고, 상대의 몸통까지 갈라버렸다.
‘성공이다!’
원기는 내심 환성을 지르면서 다음 상대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앗!’
원기는 내심 당혹성을 질렀다. 조금 전 상대가 흘린 피를 밟고 살짝 미끄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검은 상대의 방패에 박히면서 부러져 버렸다. 베기가 실패한 것이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순간, 상대의 도끼가 그의 어깨에 박혔다.
‘예상대로야.’
희연은 그런 원기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원기의 베기 성공율은 완벽하게 평평한 연무장에서 90% 남짓이었다. 100%완벽한 컨디션에서 90%의 성공율을 보인다면 전장에선 써먹기 힘들었다.
상대를 확실하게 처치하기 위해선, 자신도 칼날 앞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는 법이다. 약간의 미스로 충분히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고수는 절대로 초보의 창칼에 죽지않는 무협소설과는 달랐다.
누가 휘두르는 검이든 맞으면 죽는다.
그녀는 80%의 역량으로도 100% 베기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베기를 쓸 수 있는지 없는지 미리 계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기를 쓰기 힘들 때는 휘두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녀는 능숙한 투수와도 같았다.
베기가 승부구인 강속구라면 휘두르기라는 변화구를 이용해서 적의 속도감을 빼앗고 정확한 컨트롤로 상대방이 결코 대응할 수 없는 코스에 승부구를 던져서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반면 원기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베기의 위력에 취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냉정을 잃고 있었다.
한번 실패를 맛볼 필요가 있다는게 희연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지금까지처럼 자신의 육체가 갖는 스펙을 최대한 뽑아내는 전투를 벌였다면, 아마도 지금처럼 낭패를 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원기가 가진 육체는 정말로 뛰어난 육체였기 때문이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에 호랑이를 섞어서 나온 사기급의 순발력과 근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방어만큼은 이미 달인의 경지인건가.’
희연은 상대가 도끼를 휘두른 순간, 원기의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어깨로 받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깨에 맞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깨로 받아냄으로써 최소한의 피해로 끝을 낸 것이었다.
‘뛰어들어가야 하나?’
희연은 마차 위에 서서 냉정히 전황을 살폈다. 원기는 연신 두들겨 맞는 듯이 보였지만, 적의 공격을 대부분 흘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간간히 발톱을 써서, 역습을 하고 견제해 내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 더 지켜 볼까.’
노예의 목걸이를 한 아름답지만 나약해 보이는 반수였지만, 누구도 그녀를 제지하거나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녀는 서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장을 지배하는 전장의 지배자였다.
그루드는 그녀와 눈빛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했다. 자연스럽게 짧은 꼬리가 사타구니 사이로 말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쪼렙학살에 당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지만, 야성의 감 역시 가볍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퇴각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부하들은 원기를 보면서 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동료를 죽인데다가,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니, 살의가 용솟음치는 것이었다.
그는 희연이 잠시 지켜볼 듯 하자, 자신이 재빨리 숨통을 끊기로 마음 먹고 앞으로 나섰다.
“와라! 뇌전!”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의 온 몸에서 전기가 번쩍거리며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빠르게 움직여서 원기의 양 팔을 잡고 전기를 흘려 보냈다.
“크윽!”
원기는 고통스러운 듯 짧은 신음성을 냈다. 그루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심장이 멎을 만큼 강력한 전기 충격인 만큼, 쇼크로 죽어버리거나 적어도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원기는 고통에 엄청나게 익숙했다. 전기 충격이 놀랍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 한거야?”
원기는 그렇게 말 하고는 자신의 양팔을 쥔 그루드의 양팔을 맞쥐었다. 투박한 털 투성이 손가락 끝에서 발톱이 나와서 그의 팔뚝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온 몸의 신경에서 몰려오는 고통의 파도, 아니 고통의 쓰나미에 비명을 질렀다.
“깨갱!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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