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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183화 (183/497)

183화 전쟁의 정의

수인제국과 용족들의 균형은, 용족들에게 구심점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수인제국의 수인들이나 인간들은 결혼을 통해서 부족간의 친분을 다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용족의 경우에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부족간의 친분은 어디까지나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유전적으로 서로 섞여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섞일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서로를 적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용족들은 완전한 배틀로얄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마지막 하나만이 살아남는 전장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배틀로얄이라고 해도 살아남기 위해 적과 손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용족이 사회를 유지하는 유일한 법칙이라고 봐도 좋았다.

도움이 안되는 부족은 죽여버리고, 도움이 되는 부족은 언젠가 죽여버린다.

당장 도움이 되면 손을 잡지만, 어디까지나 적과의 동침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부분이고 용족 사회가 오랜시간 유지되면서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서 교류가 이뤄지다보니, 조금은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본능을 능가하는 가장 강력한 정신적인 힘인 종교가 성립되면서 용족 사회는 조금씩 체제를 단단히 해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용신인 연하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돌변했다.

서로 긴장감을 버리진 않지만, 대외적으로는 협력의 태세를 갖출 수 있었고, 더불어 수인제국과의 전면전쟁까지 벌어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등장한 기마부대.

용족에 대한 수인족의 우위 중 하나가 빠른 이동속도와 각개격파 능력이었다. 용족은 혼돈의 힘을 수인족처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없었다.

사제를 중심으로 뭉쳐서 사용할 수 있었고, 장시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비늘을 가지고 있어서, 내구력은 뛰어났지만 무거운 편이었다.

넓은 전장에서 기동력을 살려서 괴롭히는 방식이 수인제국의 전투 방식중 하나였다.

하지만 기마 부대가 등장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수인족들이 빠르다고 하지만, 말보다 빠른 수인족들은 극소수였다. 2족보행을 하는 진수들은 말보다는 느릴 수 밖에 없었다.

용기사대의 습격에 수인제국의 정예들은 지리멸렬하게 쫓기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용신의 화살이었다.

국경을 지키던 요새에서 지휘관들을 참살한 것이 연하의 화살이었다.

용족들의 전법은 아주 간단했다. 활과 화살통을 장비한 긴 기둥을 수직으로 세웠다. 성벽보다 높은 기둥을 요새 주위로 세워 놓았다.

그러면, 연하는 날아서 그 기둥 위로 이동한 뒤에 그곳에 있는 활과 화살을 이용해서 무방비한 적을 단숨에 죽이는 것이었다.

야간에는 소리도 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성벽 위의 경비병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엘프의 밤눈을 이용한 야간 저격과 그에 병행한 용족의 기습 공격으로 강력한 요새들이 허무하게 함락당했다.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는 거 아니에요? 이러다가 수인제국 그냥 망해버리면 어쩌죠? 그렇게 되면 안되는거 아닌가?]

사기가 오른 용족 부대들 속에서 연하가 걱정스러운 듯이 원기에게 파티 대화를 통해 말을 걸었다.

자신들이 승리의 여신으로 믿고 있는 용신이 자신들의 승리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히도 용족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잘하고 있어. 지금보다 더 빨리 진격 속도를 올렸으면 좋겠어.]

속전속결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빠르게 전진한다는 것은, 그만큼 점령을 공고히 하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했다.

승리와 전공에 취한 용족의 군대는 적지나 다름없는 점령지에 대한 수비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큰 빈 틈이었다.

혼돈의 대륙에서 인간은 중요한 식료원, 식량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수인제국과 용족은 인간의 취급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과 인간의 결합에서도 반수, 혹은 진수가 출생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자녀가 반수만 되어도 그 부모는 하층민 신분에서는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수인과 인간은 혈통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처우 자체가 느슨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어차피 척박한 땅이라 먹고 살게 없었다. 먹고 살게 부족하니, 나이들고 노동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희생될 수 밖에 없었다.

척박한 땅에서 고생스럽게 살다보니, 다른 이들을 위해서 죽어가는게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은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렇게까지 살아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수인제국은 유지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인간답게 평화롭게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끔찍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용족은 달랐다. 전투종과 번식종이 분리된 그들은 번식종이 낳은 자식만이 동족이 될 수 있었다. 자신들과 다른 피를 가진 이들은 용족이라고해도 잠재적인 적이었다.

하물며 인간이 훗날 용족을 낳는다고 해봐야, 그들은 자신들의 동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용족을 낳는 인간이 있다면, 그 자식과 부모들은 바로 죽임을 당했다.

그런 면에서 인간들은 그저 가축일 뿐이었다.

소와 비슷하게, 살아서는 죽도록 노동을 하고,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 그밖의 부산물을 제공하는 노예만도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수인제국의 인간들은 용족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

역으로 수인제국이 용족의 땅을 점령했다면, 인간들은 적극적으로 수인제국을 돕거나, 적어도 중립을 지켰을 것이지만, 수인제국의 인간들이 용족에게 협조할 이유가 없었다.

용족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은 가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그들을 포획해서 가둬두기는 하되, 학살은 없었다. 결국 용족들은 점령지에 위험한 폭탄을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인제국 역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그저 무력하게 물러나고만 있지는 않았다.

황제를 중심으로 단결되기 시작했으며,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출세하지 못했을 인간들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육체적인 능력으로는 인간은 수인을 능가할 수 없지만, 수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가 있기에 뛰어난 지모를 지닌 이들이 지모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수인제국의 인간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수인제국을 위해서 싸우고자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틈에 용족의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은호와 불여우였다.

그들은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용족의 군대를 가볍게 학살해 버렸다. 수십명 단위의 기사단이라면, 수인제국으로서는 부담스러운 규모의 전투 부대였다. 하지만 은호의 포효와 불여우의 칼날 앞에서 그들은 학살당하는 양떼와 별반 다르지 못했다.

그들을 따르는 하이에나의 진수 부대 역시 진수다운 역량을 발휘해 학살에 동참했다.

은호, 불여우, 뇌전의 하이에나, 세마리 신수를 중심으로 수십마리의 진수가 후방을 휘젓기 시작하자 점령지에 억류된 인간들은 그들에게 희망을 걸게 되었다.

“불여우가 전장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불여우를 잡고 용신님의 검을 되찾을 기회가 아닐까 싶소이다.”

“전력을 기울여 놈을 포위하고 반드시 잡읍시다.”

“불여우가 용신님의 휘하에 들어온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용족들의 군사회의에서 고위 용족들이 의욕들을 불태웠다. 하지만 거기에 디레가 딴지를 걸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알겠습니다만, 지금 수인제국의 수도가 코앞입니다. 적들의 저항도 제법 거세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적에게 등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요.”

“그럼, 두고 보자는 말씀이요? 점령지를 지키는 부대들은 그 괴물들을 당해내기 힘드오.”

불여우만이라면, 기사단으로 어떻게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은호가 기사단을 무력화시키는 만큼, 당해내기 힘들었다.

“우선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고, 그 후에 처리할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디레는 내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현재 원기 일행이 날뛰고 있는 장소는 디레의 정적중 하나인 오니마의 부족이 다스리고 있는 땅이었다. 디레의 주장이 정론이긴 하지만, 오니마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 부족이라도 빼주시요. 우리 오니마 부족이 여신님께 검을 되찾아 바치겠소이다.”

상대는 디레의 의도대로 움직여 줬다. 디레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만류하다가, 책임은 오니마가 지게 될 것임을 확인하고는 슬쩍 빠졌다.

오니마 부족은 대부족 중 하나로 기병만 오백기에 달했다. 오백기의 기병, 곧 용기사들이라면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만 했다.

디레로서도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불여우가 잡히더라도, 최소한 백기 이상의 용기사들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용신의 검을 갖고 온다고 한 들, 용신의 총애가 오니마 부족에게 넘어갈 일은 없었다.

[적어도 500기의 용기사들과 지원 병력들이 향한다고 하네요. 디레는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많이 적을 줄여주길 바라고 있어요.]

연하는 그들의 회의 장면을 정리해서 전했다.

“용신의 검을 회수하겠다니, 좋은 생각이로군요.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그들을 격려해 주고 싶군요.”

“영광입니다. 내일 출발준비가 되는데로, 사열 준비를 하겠습니다. 용신님의 군대를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신이 출발하는 부대에 관심을 가지자, 많은 이들이 부러운 듯한 시선을 보였다. 그리고 디레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비웃음을 던졌다.

반면 연하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 수한선생님 말씀대로 저들은 식인귀들이야. 그리고 원기 오빠의 싸움은 식인귀들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싸움이야.’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배신하는 그런 것들은 인간으로서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정의’는 중요했다.

설사 그릇된 정의라 할지라도,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단어가 가진 힘이었다.

물론 ‘약육강식’’속는 놈이 바보’같은 그릇된 정의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괴물 이하로 타락하는 것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악이었다.

하지만 그릇된 정의조차 필요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괴물’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세상에 온갖 ‘정의’가 넘쳐나는 이유이며, 절망이자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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