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미국발령
이틀전.
“결혼이라니, 조금 당혹스럽군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희연은 조제성의 말에 당혹스럽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다지 당혹스러운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없고, 당사자의 동의를 얻지 않았다는 상황이 조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스캔들이 터지지 않아도 미리 좀 진행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현실 세계에서 원기님의 인기가 꽤 높거든. 이상한 여자가 꼬이기라도 하면 골치아파져. 그것만은 막고 싶군.]
“흠, 이상하군요. 여자들로 인의 장막을 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이지. 다만, 어디까지나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여성들로 인의 장막을 쳐야겠지. 희연양은 강한 충성심을 갖고 있고, 연하양은 사심이 없지. 그리고 리디아님은 신앙에 가깝지. 음, 솔찍하게 말하면 자네는 틀에 박혀서 꽉 막혔고, 연하양은 생각이 없고, 리디아님은 광신자야.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놀들은 그냥 짐승이지. 아주 바람직한 존재들이야.]
조제성의 평가에 한희연은 피식 웃었다. 틀에 박히고 꽉막혔다는 자신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기에 나쁘건 좋건,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현실의 여자들에 대한 편견이라도 있는거 아닌가요? 혜서 사모님이 섭섭해 하시겠어요.”
[현대인에 대한 평가라고 해두고 싶군. 현대인들은 다양한 지식과 다양한 가치관이 난립하는 곳에서 성장했지. 그래서 취향도 가지각색이고, 욕심도 많아. 옛날 사람들은 쌀밥에 고깃국이면 더 바랄게 없다고 느꼈지만, 현대인들은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태적 욕망을 가지는 이들도 많아. 그런 이들에게 원기님이 휘둘리는 것은 원치 않아.]
“휘둘려요?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원기오빠의 의지나 용기는 저같은 건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건해요.”
[그 의지나, 용기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야. 원기님은 자신에게 호의를 갖는 존재에게 지나치게 약하지. 친절하고 상냥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론 좀 곤란해.]
희연은 그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위험속에 뛰어들고 고통을 마다않는 원기의 그 심성은 가장 큰 장점이면서 위험요소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원기오빠가 저와 결혼하게 되는 걸 그냥 받아들일까요? 그런 부분까지는 자신이 없군요. 적어도 절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흠. 왜 그렇게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맞네. 굴베이그님도 확실하다고 말씀하셨군. 자네한테 거부당할 것이 두려워서 다른 여성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하셨어. 단지, 자네가 자네보다 강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고백을 미루고 있다고 하시더군.]
“예? 말도 안되요. 제가 저보다 강한...”
희연은 반문하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해가 분명하지만, 원기가 과연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청출어람을 바라는 스승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검술에 있어서 희연의 마음은 그랬다. 다른 누구도 자신보다 강한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용납할 생각도 없지만, 제자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기대하는 그런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사부’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조제성 사장님께 맡길께요.”
희연은 굳이 오해를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절차와 형식에 얽매인 성격인만큼, 정한수 한그릇이라도 떠놓고 혼례를 올리지 않는한은 애정행각을 벌일 마음이 없었다.
현실에서 육체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도, 그건 희연에게 있어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었다.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오해로 인한 긴장 관계는 딱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원기가 그만큼 더 필사적으로 강해지고자 노력한다면 그걸로 좋았다. 굳이 상대에 맞춰서 신조를 꺾고 애정행각을 벌이지 않아도 좋으니 그것도 괜찮았다.
‘결혼도 하기 전에 파렴치한 짓을 벌일 수는 없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귀가 붉어지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모순적인 감정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제성의 주군 유부남 만들기 작전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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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이트 엔젤의 활동에 대해서 공감하나?”
“예.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지부장에게서 온 돌연한 질문에 김민정과 김태훈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들은 나이트 엔젤의 협조자로서 활동해 오면서, 나이트 엔젤의 존재 의의나 목적에 대해서 꽤 깊은 신뢰를 갖게 된 상태였다.
일단 나이트 엔젤 뒤에는 자신들에게 이 초능력을 준 여신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설령 불법적이고, 비밀스런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 너희들은 오늘자로 나이트 엔젤 협조자 자리에서 탈퇴처리된다.”
“예?”
“너희는 민간 군사 기업인 네메시스로 이전하게 된다. 그곳은 말하자면 뿌리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지. 너희는 그 회사에서 드러난대로 일을 하면 된다. 지금처럼 숨어서 활동할 필요는 없다. 연봉은 억대이고, 위험 수당도 제법 잘 나올거다. 물론 100%안전하다고는 못하겠지만, 너희들에게 위험한 임무가 가진 않을거다.”
“당혹스럽군요.”
“간단히 말하면, 너희들을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승진한 것이라고 봐도 될거야. 네메시스의 직원은 모두 나이트 엔젤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너희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주어진 직무를 행하면 되는 거다.”
김민정의 능력은 여전히 3등급으로 분류되는 동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능력의 활용가치는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훈련받은 동물들과 호흡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세퍼드 2마리와 매 1마리, 부엉이 1마리가 그녀의 파트너였다.
동물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녀는 수화를 통해서 지시를 내리거나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특히 세퍼드들은 지시를 받으면, 구체적인 사항을 그녀에게 확인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영리하고 충성스러웠다.
김태훈의 능력은 2등급의 건강 확인이었지만, 의술에 대한 지식이 발전하면서 역시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
상대의 신체를 간단히 스캔해서 심리 상태나 건강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거짓말 탐지기 수준은 가볍게 넘어서, 상대가 고민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트 엔젤 가입 당시의 인연도 있어서, 꽤 가까운 사이가 되어 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동물 조련사인 이미우씨도 너희들과 합류하기로 되어있다. 네메시스에서 동물 훈련을 맡기로 되어 있지.”
지부장의 말에 김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호흡이 잘맞는 동물들이 아니면 능력 자체가 의미를 잃는 경우도 많았다.
야생동물들의 경우 지능이 낮고 관심사가 전혀 달라서 동화속의 둘리틀 선생처럼 쓸모있는 소리를 주워듣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물들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자인 이미우가 가까이 있으면 도움을 받기 쉬웠다.
“여권은 있겠지? 너희가 활동할 곳은 네메시스 미국지사다.”
“저, 영어 못하는데요. 태훈오빠는 영어 할 줄 알아?”
“원서는 읽을 줄 아는데, 히어링은 좀. 자막없으면 드라마도 못보는데.”
“상관없다. 팀원들 대부분이 한국어로 소통할테니까. 물론 자네들이 거절한다면 다른 팀을 보내게 되겠지만, 가능하면 자네들이 가 줬으면 좋겠군.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하면 귀국하는 것도 가능하네. 자네들이 받은 여신님의 축복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지부장의 말에 그들은 미국행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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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우리 자린가.”
“음, 이코노미석은 좀 그렇지 않나? 우리가 귀중하다고 하더니. 안그래? 오빠?”
김민정은 김태훈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고, 그의 시선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운 백금발의 소녀가 앉아있었다. 귀여운 외국인 미소녀였지만, 미국행 비행기에 외국인 소녀가 있는게 이상할 리는 없었다.
‘너무 예뻐서 한 눈에 반한건가?’
김민정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너..너..아니, 당신은...”
“어라, 알아 보시나 보네요. 역시 태훈씨로군요.”
태훈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 창백하게 질렸고, 소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했다.
“저, 실례합니다. 좀 지나갈께요.”
큰 짐을 든 승객이 뒤에서 지나가자, 김태훈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채 엉거주춤하게 소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다, 당신 광명 1호 아니셨나요?”
“음, 왠지 미사일 이름처럼 들리는데 말이지요.”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광명 1호라는 말에 민정은 깜짝 놀랐다. 광명시를 맡았던 코드네임 광명의 나이트 엔젤, 협력자들은 지금의 광명시에서 활약하는 나이트 엔젤을 광명 2호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테러 나이트의 활동은 한차례 뿐이었고, 그 때 죽은 것은 강북 2호였지만, 나이트 엔젤의 구조 작업은 위험한 일이 많았다.
공장에서의 화재에서 사람들을 구하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이 광명 1호였다. 무너진 기둥에 박살난 그녀의 시신을 김태훈과 김민정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김민정은 얼굴이 닮았다고는 생각했지만, 몸 상태를 스캔하는 것이 장기인 태훈은 그녀가 죽은 나이트 엔젤 광명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된거지요?”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한 팀이 되겠네요. 루시라고 불러줘요. 제가 팀의 전투를 담당하게 될거에요. 전처럼 말이지요.”
나이트 엔젤과 협력자 사이에는 큰 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통신은 나누지만, 그들과 사적인 친분을 가질 수는 없었다.
맨몸의 나이트 엔젤과 만나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민정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나이트 엔젤들은 한결같이 미모가 뛰어났지만, 그만큼 개성이 부족하다고 할지, 구별하기가 힘든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우리가 가진 능력도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거였지.’
여신을 믿는 것을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에게 힘을 준 여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실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죽은 그녀가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 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 반갑다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편하게 말해요. 하루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루시의 능숙한 한국어를 들으면서, 머리속을 정리하는 사이에 비행기가 이륙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전벨트를 풀라는 사인이 들어온 순간, 갑자기 여행객 가운데 몇 사람이 좌석에서 일어났다.
“꼼짝 마! 이제부터 이 비행기는 우리 관리 하에 들어간다!”
김태훈은 그 모습을 보면서, 영화를 보는 듯 싶다는 생각도 들고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동료가 되살아나서 옆에 앉아있고, 비행기 하이재킹에 만난다니, 딱 꿈에 나오기 좋은 시츄에이션이었다.
“하하. 말도 안돼.”
“음, 당첨이네요. 하필이면 하이재킹이라니.”
루시는 쓴 웃음을 지었다.
“당첨? 예상했던 겁니까?”
“하이재킹까지는 예상 못했어요. 그래서 좀 골치가 아프긴 하네요. 1등석에 있는 부잣집 아가씨가 보호 대상이에요. 문제는 이놈의 비행기가 폭발하면 보호 대상은 물론이고, 당신들까지 위험해지니.”
루시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두사람이었다. 보호대상이 사망하는 것은 단순한 작전 실패였다. 자신은 죽어도 별 문제없이 부활할 터였다.
하지만 김태훈과 김민정 두사람은 잃어선 안되는 중요한 전력이었다.
“우선, 당신 그 눈으로 승객들을 살펴봐요. 승객들 가운데 협력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루시의 말에 김태훈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자신만이 아니라 김민정의 안위도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우리도 죽었다 되살아날 수 있는 겁니까?”
“아직은 아녜요.”
김태훈은 루시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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