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디레의 음모
김태훈은 의자에 최대한 허리를 숙이면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의 눈은 인체가 발하는 빛에 한해서, 벽을 투과하고 보는 것이 가능했다. 마치 X레이나 열상 장치와도 같았다.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일일이 구별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차분하게 집중해서 주위를 살폈다.
‘웃기는군. 아직도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수면제나 술, 혹은 둘을 함께 마시고 이륙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키고 소란스러운 상태에서도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긴장과 경계의 태세를 갖춘 사람들이 눈에 잡혔다.
‘전부 7명, 아니 9명인가.’
광명1호, 아니 루시라고 이름을 댄 나이트 엔젤의 말대로 의자에 앉아서 전체를 침착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부 9명이에요. 한 명은 가장 뒷쪽 좌석 G열에 앉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명은 승무원실에 있어요. 아마 협조자인 것 같군요.”
“퍼스트 클래스 쪽은?”
“그쪽은 아직 진입하지 않았어요.”
정식 경호원들이 동반된 퍼스트 클래스를 노리기 보다는 인질을 잡기 쉬운 이코노미석을 먼저 노린 것으로 보였다.
루시는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발소리를 통해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백에서 조금 큰 화장품 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그 화장품 케이스에서 작은 세라믹 칼날들을 뽑아냈다. 그리고는 마찬가지로 백에 들어있던 필기구들을 분리해서 칼날과 결합시키자 작은 다트와도 비슷하고 표창과도 닮은 무기가 만들어졌다.
‘연막탄이나 소음탄이 있으면 좋을텐데...’
그녀는 소화기를 떠올렸다. 객실과 승무원실에는 소화기가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소화기를 폭발시킨다고 해도 넓은 범위를 가려줄 연막이 쉽게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흩어지길 기다려야 하나?’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빠른 시간 내에 해치우려면 모두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지금이 좋았지만, 넓은 좌석을 생각하면 눈치채기 전에 모두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권총을 난사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기장실을 비롯해서 각 위치에 흩어진 다음을 노리기에도 위험부담은 컸다. 무전 장비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인건 폭탄은 없는 것 같다는 건데.’
루시는 그녀의 후각에 폭탄과 비슷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폭탄 제조나 장착을 했다면, 폭약 냄새든 기름 냄새든 나야 정상일텐데 그들에게선 총기 관리용 오일 냄새 말고는 나지 않았다.
‘그냥 기다릴까?’
그녀는 한숨을 쉬고, 현 상황을 레이니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파티 채팅을 신청했다.
[흠. 그런 일이. 루시. 지금 당신의 직업이 뭐지?]
[침입자-인트루더입니다.]
나이트 엔젤들은 기본적으로 전사 계통의 직업을 사용했다. 그것은 파워드 슈트로 위장한 갑옷을 입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파워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사계통은 갑옷 무장을 했을 때 추가되는 어빌리티들이 많았다. 기사 계통 최고 클래스인 로열 가드의 경우에는 갑옷의 피부화라는 패시브 스킬이 있는데, 이는 아무리 두꺼운 갑옷을 입어도 전신의 감각이 알몸 상태처럼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투구를 써도 청각이 완벽하게 발휘된다는 점에서 가장 선호되는 직업이었다.
다만, 비무장 상태에서는 무식한 힘말고는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다.
그리고 장거리 저격용의 궁수 클래스도 나이트 엔젤에서 제법 쓰이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궁술에 능한 엘프들이라, 스나이퍼보다는 이동 능력과 추적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레인저가 사용되었다.
물론 나이트 엔젤이 아닐 때 사용하는 부캐도 키우고 있었다. 그 경우에는 민첩성을 증가시켜주는 도적계 캐릭이 선호되었다.
암살자 직업은 실제로는 살상 능력을 증가시켜주는 효과가 있어서, 희연과 같은 검사들이 주로 사용했다.
근접전투에 특기가 없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게 침입자-인트루더였다. 액티브 스킬보다는 패시브 스킬 때문에 주로 선호되는 것으로, 패시브 스킬은 ‘어그로 감소’였다.
어그로 감소는, 게임 상의 어그로 시스템에만 적용이 되는게 아니라, 현실에서는 주목을 받기 어렵게 만든다는 형태로 작용했다.
엘프들의 탁월한 미모, 그리고 나이트 엔젤들과 닮았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왠만해서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조용히 움직이면, 루시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화려하게 움직이거나,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패시브 효과는 사라진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일단 상황 파악이 우선이니까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까지는 현상황을 유지하도록. 아, 그리고 벽타기 스킬로 천정을 기어다니는건 정찰하는데 도움이 될거야.]
레이니는 인트루더가 가진 능력을 떠올리고 조언했다. 부캐로 작전에 임한 경험이 적은 이들은 현실 세계에서의 능력 사용법을 잘 몰랐다.
게임 내 스킬과 현실에서 적용되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루시는 그녀의 조언을 듣고, 머리를 말아 묶어올린다음, 벽타기 스킬을 시전해서 천정에 올라갔다.
그다지 높지 않은 비행기의 천정이라서 눈에 안띄는게 이상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범인들의 무기를 확인했다. 뒷 좌석에서 감시하는 사람은 무기가 없이 무전기만 들고 있었고, 협조자로 보이는 승무원은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묶여 있었다.
무기 반입과 정보제공 이외에는 따로 역할이 없는 듯 했다.
‘권총이 7정에 서브 머신건이 2정인가. 무전기는 전부 네 대.’
그때, 루시의 눈에 범인 중 하나가 승객 명단을 대조하면서 좌석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천정을 기어서 자리에 돌아왔다.
‘우, 엽기로군. 왠지 공포영화에서 볼 듯한 모습이야.’
김태훈은 천정을 기어오는 루시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미인이라도 천정을 거꾸로 기어오는 모습은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뻔히 보일 상황임에도 눈치 못채는 범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그녀의 이능 중 하나라고 판단했다.
범인은 좌석에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만 하고는 그냥 지나갔다. 그녀의 주목받지 않는다는 패시브 스킬이 제대로 작용한 때문이었다.
‘좋은걸 득템했군.’
게임폐인 프레이에게 훈련(버스?)받은 그녀는 게임에서 사용되는 용어에 꽤 익숙한 편이었다.
그녀가 챙긴 것은 무전기였다. 도적계 액티브 스킬, 소매치기였다. 이 스킬의 특징 중 하나는, 상대가 도둑맞았다는 것을 눈치 못챌 뿐 아니라 물건을 찾아서 없으면 자신이 어딘가 두고온 것으로 착각한다는 특성이 있었다.
잠시 후, 범인들 사이에 실갱이가 벌어지고, 한 명이 욕을 먹으며 한대 얻어 맞는 모습이 보였다.
‘별로 미안하진 않지만, 왠지 미안하군.’
루시는 무전기를 이용하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 정도는 쉽게 훔쳐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무전기를 훔친 것은 서로 연락이 조금은 더 힘들어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무전기를 밟아서 으깬 다음, 범인들이 다니는 길쪽에 떨궈 놓았다. 무전기의 파편을 본 범인들은, 분실한 멍청이를 한번 더 욕하고 넘어갔다.
“다행이군요. 놈들의 긴장도가 좀 떨어졌어요.”
김태훈이 불안감을 가진 김민정을 다독이면서, 루시에게 말했다.
“어느 정도면 피로감이 몰려올까?”
“이정도 하이텐션이라면 8시간이면 꽤 지칠겁니다. 승객들은 그 전에 탈진하겠지만.”
[인천에서 미국까지 가는 비행 시간은 14시간 가량이야. 10시간 정도 지난 후에 움직이는게 좋겠어. 비행 방향은 모니터링 하고 있으니까 그 이후에 움직여.]
레이니의 지시가 떨어졌다.
[보호 대상의 안전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아가씨 운에 맡겨. 최우선 보호 대상은 김태훈과 김민정, 두 사람으로 한정한다. 나머지는 그냥 숫자로 간주해. 되도록 많은 숫자를 남기는데 전력하도록.]
[알겠습니다.]
“난 그럼 좀 잘께.”
루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등받이에 어깨를 대고는 눈을 감더니, 잠시 후 새근새근거리며 잠들었다.
‘대체 무슨 신경이길래.’
김태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몬스터나 맹수들이 나무 아래서 지키고 있을 때에도 가지 위에서 휴식을 취할 줄 알았다.
그들의 귀는 잠든 동안에도, 주변 상황의 변화에 반응할 수 있게 해줬다.
“아무래도 체력 승부인 것 같아. 우리도 좀 자두는게 좋겠어.”
김태훈은 김민정을 안고 잠을 청했다. 잠 드는 것은 확실히 무리였지만, 그래도 옆에서 편히 자고있는 루시의 존재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스파이더맨보다는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이었지만, 이능을 가진 것이 분명한데다가 스스로 전투요원을 자처하는 ‘불사신’이었다.
무방비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
원기에게 이런 사소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조제성에게는 보고가 갔지만, 레이니에게 일임했고 장수한에게도 보고는 가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다른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기야. 오늘이 며칠인지 아냐?]
“6월 며칠이지? 왜 그걸 저한테 물어요?”
장수한의 질문에 원기는 반문했다. 달력과 무관한 생활을 하다보니, 날자를 기억하기 힘들었다.
“8일인가?”
[7일이야. 그리고 이틀 전인 6월 5일이 네 결혼 기념일이야. 기억해 둬.]
“예? 결혼 기념일?”
[그래. 희연과 네 결혼식이 있던 날이야. 신혼여행은 따로 안갔지만.]
“무슨 소리에요? 그게?”
[네가 제성 형님에게 일임하지 않았어? 스캔들 문제 처리해 달라고. 하긴, 결혼식이라니, 나라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을텐데. 연하하고의 스캔들 의혹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고 말이야.]
원기는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말에 희연을 흘낏 쳐다 보았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였다.
“전 별로, 신경쓰지 않아요. 지금의 제가 진짜 자신이니까.”
희연의 담담한 반응에, 원기는 안도감과 약간의 흥분, 그리고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조금은 더 의미를 둬도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었다.
[이건 결혼식 사진이랑 동영상 파일들이다.]
원기가 기분을 정리할 틈도 없이, 연타 공격이 날아왔다. 원기는 자신의 결혼식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희연의 모습과, 자신처럼 보이지만 꽤 낮선 느낌의 남자가 있었다. 확실히 멋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자신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사진에 등장한 하객들의 면면을 보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연하와 누나, 그리고 희연의 아버지 정도가 아는 사람이었다.
“조제성 사장님도 형도 없네요? 게다가 이사람들 다 누구지요?”
[아, 결혼식 사진도 정보 누설이 된다고, 참석이 금지되었어. 어차피 진짜 결혼식도 아니라고. 그리고 누구긴 누구겠어. 다 신랑친구, 신부친구들이지.]
원기는 할 말이 없었다. 하객들은 대부분 TV나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유명 앵커도 있고 탤런트, 가수, 개그맨도 있었다. 한 번 만나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런 사람들이 친구랍시고 결혼식 사진에 찍혀 있었다.
물론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영상은 더 가관이었다. 직접 볼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인기 유명 탤런트와 어깨 동무를 하고 웃으며 친하게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연기하는 건가요?”
[아니, 실제로 꽤 친해. 그러니까, 나중에 절친 목록들과 신상 명세도 따로 정리해서 넘겨줄께.]
“음, 난 이 사람 싫은데. 거리를 둬 달라고 전해주세요. 아, 세모 표시를 한 사람들하곤 거리를 두고, 엑스 표시한 사람들과는 절교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희연은 역시 담담하게 말하면서 파티에 공유되는 사진에 동그라미, 세모, 엑스를 표시하고 있었다. 좋고 싫은게 확실한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그녀의 너무나 담담한 반응에 원기는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수한형, 형이 생각한 대책은 뭐였어요?”
[그거? 커밍 아웃이지. 게이라고 선언하는거야. 그럼 희연이도 연하도 인기가 다시 올라갈 걸. 요새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든 데다가 게이 배우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엄청 좋아. 서양의 유명 배우나 탤런트들에도 게이들이 다수 있지. 오히려 게이라고 선언하면 월드 스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만들어 질 수도 있어.]
원기는 말도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이 양반이 누굴 홍콩행 시키려고 작정했나.’
원기는 조제성에게 맡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안도했다. 현실 세계로 차마 얼굴을 들고 돌아가지 못할 뻔 했다.
“그건 그렇고, 결혼 기념일이라는것도 애매해지는거 아닌가요? 나중에 진짜 결혼식을 올린다든지 하면...”
“내년 같은 날 결혼식을 올리면 똑같아져요.”
원기는 깜짝 놀라서 희연을 돌아보았지만, 희연은 사진을 검토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원기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생각했는데, 희연의 꼬리가 춤추듯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
디레는 놀들을 원기와 희연에게서 떼어내기로 마음 먹었다. 원기와 희연의 전력이 지나치게 커진 것이 문제였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용제국에 의한 대륙 통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원기 일행이 수인제국의 변화를 바란다면, 디레는 멸망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내가 상정한 전력은 두사람 뿐이었으니까.’
그는 리디아와 연하가 어떤 식으로 두 사람과 연락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용족의 정보를 이용한 것처럼, 역 정보를 이용하면 기습도 간단했다.
그는 원기와 희연에게 북부 주둔군 요새의 지휘관 암살 명령을 내렸다.
그것만으로 간단히 둘을 놀들과 분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에게 명령을 내려서, 놀들이 있는 거점에 대한 말살 명령을 내렸다.
“어떻게 이런 소상한 정보를 얻으신 겁니까?”
전력의 숫자, 특히 진수의 숫자가 이렇게 확실하게 표기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신경쓸 필요없다. 그리고 적들을 공격할 때, 야간에 공격하라. 그들은 야간에는 진수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고작 반수의 힘이 고작이지.”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