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성장의 벽
펜릴은 진화했다.
고통을 즐기는게 아니라,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피하는 것을 익힘으로써 더 무서워졌다.
재밌는 것은 원기와 희연을 죽이려고 들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원거리에서 저격하는 연하는 죽이려고 들 기회도 없었다. 반면 놀 제로를 비롯한 수인제국의 전사들은 너무나 거리낌없이 죽여버렸다.
“놀이로군요.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희연은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닦으며 말했다. 희연이 검으로 펜릴의 상처를 입혀서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면, 원기가 공격했다.
원기가 고통을 안기면, 동작이 둔해졌고 그때마다 희연이 치명상을 입히려고 했지만, 펜릴의 덩치와 단단한 가죽 때문에 불가능했다.
다만 원기에게 고통받는 것을 신호로, 펜릴은 게임의 끝을 선언하듯 웃으면서 떠나갔다.
“적어도 사흘은 벌었군.”
원기는 한숨을 쉬었다. 전투의 긴장이 풀리면서 여기 저기가 아파왔지만, 포션을 마시니 곧 가라앉았다.
원기와 희연, 연하가 펜릴의 놀이 상대로 어울리는 사이에 몬스터들을 길들이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장수한의 주도 하에 굴베이그와 이미우 팀이 이뤄낸 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몬스터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실질적으로 신들이 깔아놓은 지뢰라고 할 수 있었다. 특정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영역 내에 들어오는 적들을 공격하고 자체적으로 증식하는 그런 도구였다.
따라서 몬스터들이 지나치게 감소하면, 거인족들이 경계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점을 고려해서, 장수한은 길들인 몬스터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보냈다.
그로 인해서 몬스터들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 지뢰가 아니라, 아군을 식별하고 필요할땐 싸워주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장수한은 다양한 몬스터들을 조사해서 몬스터 도감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각 몬스터들의 능력치를 조사해서, 레벨을 매겼다.
실제로 존재하는 레벨은 아니지만, 몬스터들의 위험도를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레벨 99가 만렙이라고 하지만, 레벨이 갖다고 모두 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몬스터들의 위험도만이 아니라, 아군의 강함도 나눴다.
일반인들이 블러드 라인에서 레벨 99가 된다면, 레벨 99의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초보 만렙, 혹은 허접 만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대로 레벨 99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그들을 레귤러라고 불렀다.
그리고 레귤러보다 명백히 강한 이들, 그들을 엘리트라고 불렀다.
숲 외의 지역에서 평균적인 엘프들의 전투 능력이 엘리트급이었다.
그리고 엘리트 위가 챔피언급이었다. 대부분의 에인페리아들이 이 등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위를 장수한은 레전드 급으로 명명했다. 숲에서의 엘프나 원기, 원거리전에서의 연하가 이 등급이었다.
그리고 그 위, 최강이라고 여겨지는 등급을 마스터 급으로 불렀다.
문제는 펜릴이었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동렙의 유저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수한은 같은 등급제를 적용시켰다.
문제는 혼돈의 대륙 중심부에는 상당히 강력한 몬스터들이 많았다. 체격도 크고 강력한 몬스터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서 장수한은 보스급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적어도 동급 유저 다섯명 이상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최종보스급, 끝판왕은 동급의 10명 이상이 상대할 수 있다는 형태로 평가했다.
장수한이 내린 펜릴의 평가는 레벨 99 마스터급 보스였다. 희연과 동급 다섯 명 이상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제가 마스터급인가요.”
“그래. 난 네 전투력이면 완성된 거라고 봐.”
장수한은 칭찬할 셈으로 말했지만, 희연은 낙담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희연 역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강해질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에서 나오는 영웅처럼 무한정 강해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뜻대로 쉽게 되지는 않았다.
장수한의 분류는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 대충 자신들의 강함과 동료들의 강함, 아군의 전력을 파악하기 쉬웠고, 못보던 몬스터가 나타나도 싸울지 피할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굴베이그와 함께 움직이는 놀들 역시 그걸 토대로 몬스터들과 싸워 나갔다.
‘포정의 도라도 익혔으면 좋겠어.’
희연은 옛날 만화책에 나온 직사의 마안은 아닐지라도 소를 해체할 때 칼이 뼈와 힘줄을 빗겨나간다는 포정해우의 고사에 나오는 포정과 같은 기술을 원했다.
빠르기도 예리함도 강함도 더 이상은 바라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수련의 목적은 기술을 갈고 닦는 것도 있지만,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도 있었다.
게임 캐릭터를 사용하는 희연은 몸을 만들 필요도, 몸을 유지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원래 육체는 아무리 단련해봐야 레벨 20을 넘길 수 없었다. 그녀의 현재 육체는 장수한의 분류에 따르면 레벨 15 마스터였다.
육체적으로 축복을 받고 태어난 이들은 레벨 25에 가까운 능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육체의 활용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레벨25레귤러 정도가 고작인 경우가 많았다.
키가 크고 체중이 나가는 만큼, 몸을 완벽하게 써내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정도 차이라면 레벨 15마스터에 달하는 현재의 상태로도 능히 당해낼 수 있었다.
마스터라는 것 자체가 희연을 보고 장수한이 만들어 낸 등급이었다.
‘정말 더 강해지는 방법은 없는 걸까?’
희연은 한숨을 쉬었다. 검에 일생을 걸기로 마음먹은 그녀로서는 이 성장의 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에게 장수한이 권한 것은 총이었다.
어차피 클레이모어 같은 대검도 한손으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큰 검은 휘두르기 불편하기 때문에 지금도 카타나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한손으로 쓰고, 한쪽 손에는 서브머신건을 드는게 어떠냐는 것이 수한의 제의였다.
하지만 그녀는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한손으로 검을 휘두르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녀는 양손을 써서 휘두르는 것에 집중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술의 완성도가 전혀 달랐다.
다만 서브머신건 두자루를 양손에 들고 벌이는 전투법을 배울 필요성은 느꼈다. 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닌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봐야겠네.’
그녀는 검을 휘두르는 일 대신에,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등을 보는 것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게임 캐릭터의 엄청난 신체 능력을 살리려면 상상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숲속에서 움직이는 엘프들의 움직임은 희연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면서 실제로 구현 가능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벨 99 레전드 급의 엘프들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챔피언급의 엘프들이라면 능히 숲에서도 상대해 볼 수 있었다.
연하나 원기로서는 불가능한 재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초능력 배틀 위주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다지 건질 것이 많지는 않았다. 허무맹랑하다고 느낄 정도로 강력한 캐릭이 사용하는 기술은 본다고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금 보다 보면, 의외로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닭들이 더 보고 배울만한게 많은 듯도 싶고. 붉은 장닭한테 다시 한 번 도전해 볼까?’
“같이 영화라도 보러 가지 않을래? 모처럼 쉬는 날인데.”
원기가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희연에게 말을 걸었다. 제성이 장만한 아지트는 대단히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희연이 지금 영화를 보는 스크린도 왠만한 영화관보다 선명하고 큰 편이었다. 그리고 좌석도 훨씬 넓고 편안했다. 그런 만큼 영화보러 나간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희연은 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데이트라고 할까,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며 놀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할까. 좀 귀찮은데.’
희연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원기가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아했다. 아니 누구보다도 좋아한다가 맞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연애는 삶의 비중에서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이 붐비는 장소에서 군것질도 하고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아한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시간이 더 좋았다.
펜릴한테 고전하면서 두들겨 맞고 상처입는 그 시간들이 더 충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외골수적으로 빠져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같이 나가요. 오랜만에 데이트나 하지요. 부부끼리.”
원기는 그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원기의 등 뒤에서 연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쪽이 선약이야. 부부끼리는 무효. 리디아 언니도 가기로 했어.”
희연은 원기가 둘이서 간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 마음도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네.’
그녀는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을 꺼렸다. 책임지고 함께 놀아주고 시간을 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만약 그녀가 개나 고양이를 기르게 된다면, 여러마리를 함께 기르는 쪽을 택할 것이었다. 서로 함께 놀면서 지내도록.
조제성의 하렘 계획을 들으면서 그녀가 간단히 받아들인 것도 그런 그녀의 가치관이 작용한 것이었다.
원기를 좋아하지만, 그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전부 할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생각한 적정 분량은 1/24 정도였다. 사실 하루 한시간 할애하는 것도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명백한 무술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혼자면 쓸쓸할 테니 셋트로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안에도 독점욕과 질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도 날 잘 모르는구나. 이런게 정신적인 성장인건가.’
희연은 한숨을 내쉬고는 일상생활에 좀 더 관심을 가지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정체된 무술 실력의 향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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