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신세계행
“젠장. 이 미친놈들은 대체 뭐야?”
죽음을 영광으로 아는 아스가르드의 인간들도 이렇게 고통도 죽음도 모르고 달려드는 일은 없었다.
펜릴은 욕망과 즐거움으로 가득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간들의 무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인간들은 결코 자신의 일검에 죽지 않았다.
“와오. 즉사 방지템 죽인다.”
그들은 펜릴의 검에 두조각이 나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검에 맞는 순간 빛을 발하며 살아남아서는 펜릴에게 칼을 꽂았다. 그리고 다시한번 내리친 공격에 죽어 나갔다.
죽음 자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펜릴의 공격에 당했다면 시신이 토막 정도가 아니라 박살이 나야 할터인데, 멀쩡한 시신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아니 시신처럼 보이는 시신다운 시신이지만, 목이 날아갔어야 하는데 목이 몸통에 붙어있는체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펜릴의 즐거움은 강한 적을 해치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자들이 두려워 떠는 시선을 보는 것도 조금은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약자들이 자신을 비웃으며, 얕잡아보고 달려들고 있었다. 자신을 잡을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정말 비참한 것은 실제로도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놀듯이 다가와서 칼질을 해대는 저런 무리에게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릴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것은 그의 양손에 쥐어진 검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내겐 검이 있다. 그리고 벨 적이 있어.”
희연의 검술에는 상대한 자들을 매료시키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이능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고, 그녀의 재능과 검술이 이끌어 낸 것일 수도 있었다.
희연을 상대로 검을 드는 우를 다시 범할 생각은 없지만, 검이 있고 상대가 있다는 것은 행운일 수도 있었다.
헬은 패닉에 빠져서, 부하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서 꼭꼭 숨어 있었다. 부하 몬스터들도 상당히 강력한 터라, 인간 유저들도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눈은 펜릴에게 쏠려있었다.
대체 어떤 템을 드랍해줄 것인가.
진 펜릴이 잡혔을 때, 가장 기여도가 큰 유저에게 수천만원짜리 스포츠카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별도로 막타를 친 유저에게는 드랍템이 주어지는데, 이 드랍템은 블러드 라인 회사가 사들이기로 되어 있었다.
소문은 스포츠카보다 더 가치가 있는 드랍템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걸치고 있는 장비가 떨어진다는 소리도 있었다. 실제로 펜릴이 걸치고 있는 장비에는 세계수의 수액으로 만들어진 성석이 박혀있기 때문에 블러드 라인에서도 장비할 수 있는 장비템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시크릿 몬스터가 드랍하는 드랍템은 유저간의 거래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번 이벤트에서 밸런스를 파괴하는 버그템이 드랍된다는 소문이 유저들 사이에서 퍼져 있었다.
결국 펜릴도 끝없이 반복되어 몰려오는 인간들의 행렬에 지치고 말았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회복 능력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떠드는 정체불명의 언어(한국어)는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안되겠다. 물러나야겠다.”
펜릴이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헬이 이끄는 괴물 군단 사이로 물러나려고 할 때, 갑자기 귀에 익숙한 아스가르드어가 들려왔다.
“여, 펜릴씨.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갑군.”
“누구지?”
미칠듯이 달려드는 인간들 틈에서, 확실히 다른 놈들과 다른 포스를 풍기는 사내가 있었다. 귀를 보니 엘프의 귀를 하고 있었지만, 이곳의 엘프들은 인간들과 하는 짓이나 능력 모든 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블러드 라인의 터줏대감인 프레이님이시다. 앞으로 프레이 횽아라고 불러라.”
“프레이? 그 약해빠진 아스 신족의 개? 죽어 없어진거 아니었나? 미드가르드의 인간이 되어 버린 건가?”
“기분 나쁘긴 하지만 부정할 수 없군. 하지만 한가지는 알려주지. 난 블러드 라인 최강의 ‘남자’다.”
펜릴의 말과 달리 프레이의 말은 번역되서 주위 유저들에게도 들렸다. 그들은 나름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자 중에선 최강이긴 하지.”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프레이는 자신의 말이 유저들에게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네 놈을 잡아서, 이 세상에 대해서 알아보면 되겠군.”
펜릴은 눈을 번쩍이면서, 프레이를 향해서 덮쳐왔다. 그리고 그런 펜릴을 보면서 프레이는 피식 웃었다. 펜릴은 몬스터 중에서도 최강급이고, 프레이가 강하다지만 혼자서 상대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레이는 펜릴의 현재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펜릴은 자신이 게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이 게임 속은 현실 세계와 다른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프레이에게 있어서 펜릴은 AI보다 더 헛점 투성이였다.
예를 들어 횡베기를 할 때, 현실 세계에서는 손목에 힘을 주거나 자세를 틀어서 중간에 궤도를 바꿀 수가 있다.
하지만 블러드 라인에서는 그런 것으로는 불가능했다. 스킬을 사용하거나 공격을 캔슬하는 수법을 사용해야만 궤도를 중간에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펜릴은 두가지 모두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기술만 선호했다. 빠르고 강하니 그 헛점을 모르는 유저들은 죽어 나갔지만 프레이는 아니었다.
“손 맛 좋구나. 고작 그거 밖에 못하나?”
프레이는 펜릴의 공격을 종이 한장 차이로 비껴나가면서 화려한 스킬로 펜릴을 유린했다. 그리고 흥에 겨워서 외쳤다.
“크하하. 거놈 참 찰지구나.”
펜릴은 프레이가 효과가 요란하고 화려한 기술을 사용하면서, 자신을 유린하자 정신을 차렸다.
“뭔가 잘못됐다.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안된단다.”
프레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곁에 있던 호철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호철이 앞으로 나서면서 도망치려는 펜릴의 그림자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그림자 묶기!”
“웃, 힘이 빠진다…”
펜릴은 그 후로도 한참을 프레이에게 유린당했다. 각종 스킬을 이용해서 발을 묶고, 공격을 봉쇄당한 탓에 반격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틀렸다. 여긴 놈의 홈그라운드야. 육체를 버려야겠군.’
펜릴은 혀를 찼다. 희연에게 당한 패배와는 달리 프레이에게 당한 패배는 굴욕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육체를 버리고 영체로 되돌아간다면 차원의 벽을 넘어서 자신의 세계수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 펜릴에게 있어선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을 속인 로키에게 한 방 먹이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서 프레이에게 당한 굴욕을 갚아주겠다고 결심하며 펜릴은 육체를 벗었다.
[블러드 라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펜릴님]
다음 순간 펜릴은 자신이 엘프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횽아가 말했지. 들어올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라고.”
눈높이가 같아진 프레이가 펜릴을 쳐다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스가르드에선 감히 넘볼 수 없었던 펜릴이었지만 지금은 만렙과 1렙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조제성에게 받은 펜릴을 교육해서 길들이라는 요청이 없었더라도 이런 재미있는 걸 지나칠 수는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횽아가 잘 해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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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는 게이트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락조차 불통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몬스터에게 들어가자 마자 즉시 되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려서 들여보냈지만 역시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는 신성력을 최대한 부여한 아티팩트를 급조했다. 차원을 넘어서 음성을 전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현자회와 헬이 통신이 가능했던 만큼 신성력을 대량으로 사용한다면 가능할 터였다.
통신용 투구를 장착시킨 몬스터를 다시 한 번 들여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헬과 연결이 되었다.
[대체 어떻게 된거에요. 돌아갈 수가 없어요. 펜릴은 로키님에게 속았다고 노발대발 난리도 아니었어요.]
“나도 영문을 알 수가 없군. 대체 어떻게 된거지?”
[이쪽 세계엔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호전적이에요. 펜릴은 이미 당해버렸어요. 저도 몬스터들에게 의지해서 버티고 있는게 고작이에요. 돌아갈 길은 없어요. 혹시 펜릴이 돌아가지 않았나요?]
“아니, 녀석의 세계수에는 변함이 없다. 소멸한 것은 아니지만 돌아온 것도 아닌 것 같군.”
[모르겠어요. 이대로는 저도 끝장날 거에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돌아갈 수 없다면, 오직 전진할 뿐이지. 그 세계를 정복해라. 그리고 돌아올 방법을 생각하자. 내가 전력을 더 보내주지.”
그렇게 해서 로키와 헬은 블러디 라인이라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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