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내 아를 낳아도
“프레이야님을 뵙습니다.”
펜릴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강자존의 논리는 지극히 야만적이지만, 그 논리를 뿌리부터 실천하는 펜릴의 태도는 오히려 고결해 보이는 면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외통수에 빠진 이상, 완벽하게 졌음을 인정할 줄 알았다.
“제가 굳이 뵙고자 한 것은 넘겨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제 씨앗입니다.”
신과 발키리를 나누는 요소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씨앗, 신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프레이가 오딘의 발키리가 되었던 것도, 신성력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씨앗이 없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의 신성을 나눠받아 종속신이 된 프레이는 굴베이그와 달리 독립된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레이야에게 종속되었다는 시점에서 발키리나 종속신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었다. 특히 게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프레이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펜릴 역시 신성을 넘기고, 발키리가 되어 종속되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승패에 최선을 다하고 패배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펜릴의 태도에서는 비굴함이 아니라, 긍지가 느껴졌다.
물론 프레이야 진영에서도 펜릴의 신성을 조만간 압수할 예정이었다. 펜릴이 자진해서 내놓으리라고는 쉽게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펜릴의 사고방식은 단순명료한 면이 있었다.
신성의 처리는 쉬운 것은 아니었다. 프레이야가 펜릴의 신성을 흡수해 버리면, 아스가르드에 있는 펜릴 제국의 세계수들은 모두 신성을 상실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을 프레이야가 직접 방문해서 세계수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 불가능했다. 프레이야는 혼돈의 대륙에 묶여 있어야 했다. 지금은 대륙을 건너는 무역선에 매여있는 상태였다.
거인족들은 물론이고, 오딘의 시야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당장은 쓸모가 없는건가. 모처럼 강력한 카드가 손에 들어왔는데.”
원기는 아쉬움을 느꼈다. 펜릴의 변고를 알게 되고, 그 힘을 프레이야가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거인족도 오딘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방법은 있습니다.”
프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임에 빠진 프레이는 게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가 자동적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간 지능과 신성력의 구조에 대한 이해까지 높아졌다. 컴퓨터를 통해서 인간의 정신 구조에 대한 연구가 더 깊이를 더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인간과 다르지만 극히 유사한 컴퓨터의 논리 구조를 이해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프레이는 신성력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극히 높힐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오딘이 컴퓨터와 게임, 인공지능 등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은 극히 위험할 수 있었다. 조제성과 원기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정보를 제어하는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 정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씨앗에는 세계수와 교통할 수 있는 핵심 키가 존재합니다. 이건 복제하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핵심 키와 별도로 개인을 인식하는 인증 키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증 키를 이용해서 전대 펜릴과 같은 펜릴이라고 인증되는 펜릴을 만들어 내는게 가능합니다.”
“내가 펜릴이 되는 건가?”
“아니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프레이야님이 펜릴의 핵심키를 갖게 되면 펜릴의 키는 프레이야님에게 흡수됩니다. 직접 세계수를 방문해서 개종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펜릴의 키가 아스가르드에 등장하는 순간, 세계수들은 구심점을 잃고 활동이 정지됩니다. 전에 제가 프레이야님께 제 신성, 곧 코어 키를 넘겨드렸던 때처럼 말이지요.”
“그렇군. 그럼 새로운 펜릴을 만들어내면 되는 건가? 굴베이그처럼?”
“예. 펜릴은 현재 차원의 벽에 의해서 세계수와 일시적으로 연결이 보류된 상태입니다. 새로운 펜릴을 만들어 낼 때 동일 한 존재로 인증시키면 됩니다.”
“그게 가능한 건가?”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는 프레이야님이 계승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대가 확실히 사라지는 계승의 경우, 바로 후대가 모든 세계수와의 링크를 잇게 되지요. 그런 겁니다. 원래는 펜릴이 후대의 펜릴에게 아무 간섭 없이 계승하며 사라질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만, 이 경우엔 프레이야님을 통해서 창조되는 펜릴의 후대에게 적용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군. 그럼 굴베이그처럼 만들어지면서도 세계수의 계승을 내가 이어받을 때처럼 자동으로 이식되게 된다는 건가?”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펜릴이 가진 영역과 백성, 신관과 세계수, 신성력까지 완벽하게 프레이야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소리였다. 이건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굴베이그가 독립적 위치를 차지했으면서도, 프레이야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새롭게 창조되는 펜릴 역시 프레이야에게 묶이게 될 터였다.
“그렇군. 그럼 새로운 펜릴이 탄생하게 되는 건가?”
펜릴을 닮은 어린 신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살짝 골치가 아파왔다.
“역시 남신으로 만들어야 되겠지?”
“전 절대 반대입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프레이와 펜릴이 이구동성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프레이는 둘째치고 펜릴의 반대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본 펜릴은 꽤 마음내키는대로 사는 옛날형 호걸이었다.
“왜지?”
“전 딸이 좋습니다. 프레이야님, 제 딸을 낳아주십시오.”
“이게 무슨 소리야? 너 아직 매가 부족하냐? 횽아가 정신차리게 해줘?”
“신화라는게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새로운 여신이 탄생하는 겁니다. 이름은 적당히 펜리아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펜릴이 프레이야님께 반해서 반 신족으로 들어간 후, 펜릴과 프레이야님 사이에 새로운 여신이 탄생해서 펜릴의 뒤를 이었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펜릴은 프레이의 협박 따위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 놓았다. 펜릴의 씨앗을 넘겨 받아서 프레이야가 자신의 종속신 겸 자식으로 창조하니 말은 그럴 듯 했다.
“웃기지 마. 프레이야님에게 먼저 씨앗을 뿌린 건 나야. 내 씨앗이 이미 프레이야님 안에 있어! 프레이야님 제 아이를 먼저 낳아주세요.”
“다 망해버린 다크엘프 따위! 우리 늑대족을 위한 제 아이를 먼저 낳으셔야 합니다. 제 백성들이 다른 놈들에게 넘어가기 전에 말이지요!”
프레이의 말에 원기는 살짝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펜릴이 말한 여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원기의 머리에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짐승족의 여신이 되기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펜리아인지, 펜리나인지 잘 모르겠지만 더 어울릴 만한 존재가 있어. 놀원이야.”
원기의 말에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주제에 자기 윗자매들을 눌러 휘어잡은 수인족의 여자애라면 야만적이고 전투적인 펜릴의 좌를 잇기에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미 에인페리아였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 프레이야에게 총애를 받는 에인페리아나 종속신이나 사실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신이 되었다고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실제로 프레이야 휘하에서 가장 힘있는 존재는 에인페리아도 아닌 조제성이었다. 희연이나 연하, 수한 역시 발키리가 붙어 있을 뿐, 인간 그대로였다.
보통은 후계자로 만들어진 발키리에게 신의 좌를 물려주지만 에인페리아에게 넘기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에인페리아를 부속신으로 승격시키는 경우는 흔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럼 그 놀원이라는 아이가 저와 프레이야님의 사랑의 결실이 되는 거로군요.”
펜릴은 프레이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양보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원기는 새로운 펜릴이 늑대가 아니라 호랑이나 하이에나의 화신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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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입니다. 거인족들의 공세가 심합니다. 전력을 다해 막고 있지만 거인족들의 몬스터들이 끝을 모르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장수한이 조제성에게 달려와서 황급히 보고했다. 그의 보고에 조제성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거 큰일이로군. 미드가르드도 이젠 끝인가. 미드가르드의 과학 기술은 거인족의 몬스터들에겐 이길 수 없는 건가?”
“헬을 따르는 현자회라는 배신자들이 문제입니다. 놈들과 거인족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으면 거인족은 미드가르드는 물론이고 아스가르드까지 제패하게 될 겁니다.”
“오딘에게 우리가 투항하면 어찌될까?”
“소용없습니다. 현자회와 거인족이 손을 잡는다면 몇 년 못가서 아스가르드까지 끝이 날겁니다. 지금 현자회가 거인족과 손을 잡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이 조금 더 난입한다면 끝입니다.”
장수한은 울먹이듯 말했다.
[갔다. 그래도 표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조명이 바뀌자 오딘의 눈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제성이 장수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잘 될까요?]
[게이트가 열렸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전력을 투입하게 되겠지. 로키는 게이트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테고 말이야. 오딘 녀석이 게이트를 빼앗은 김에 펜릴처럼 확 뛰어들어주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지.]
[그럼 오딘도 펜릴처럼 부려먹을 수 있게 될까요?]
[그건 아니지. 오딘이나 로키, 헬 같은 것들은 결코 방심할 수 없어. 펜릴 같은 알기 쉬운 녀석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지. 오딘이라면 최대한 빨리 제거하거나 안되면 봉인이라도 해야 할거야. 그리고 내 생각대로라면 오딘은 절대로 뛰어들지 않아. 프레이의 전례도 있고 하니.]
조제성은 이로서 거인족과 아스 신족의 싸움이 격화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어부지리를 노리면서 몸을 사리는게 좋았다.
[난 당분간 지구 쪽의 사업을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프레이야 제국 쪽은 네가 점검좀 해 둬.]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고 블러드 라인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통과해서 지구로 돌아왔다.
“사장님. 로이드씨가 찾고 계십니다.”
“연결해 주게.”
[템플 기사단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현자회가 중요한 신물을 탈취했다고 합니다. 성배라고 합니다.]
“성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그 성배인건가?”
[그리스도교의 성배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더왕 이야기에 나오는 성배는 맞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스도가 썼던 잔이 아니라, 켈트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잔이며 거인족의 아티팩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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