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아발론
템플 기사단도 예측하고 있듯이 현자회에서 노리는 것은 아더왕을 비롯한 고대 영웅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진짜 목표는 최강의 드루이드로 알려진 멀린의 영혼이었다. 아더왕을 비롯한 고대 영웅들을 현세에 되살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더왕의 왕조는 20년도 못가서 망해서 사라졌다. 아더왕이 되살아난다고 해서 왕으로 받아들여줄 이들은 없었다.
영국의 왕조는 숱하게 바뀌어왔고, 아더왕의 존재는 신화나 전설의 영역에서만 받아들여졌다. 실제 아더왕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증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총이 전장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프레이야의 에인페리아들이 강력함을 보여주듯이 현자회의 사이보그라면 충분히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현자회에 필요한 것은 멀린의 지식이었다.
템플 기사단이 악신의 유물이라고 부르는 아티팩트들은 세계수로 만들어져 있어서, 생명력을 끌어 올리는 효과가 기본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현자회는 그것만으로도 재미를 볼 수 있었다.
장기 이식의 부작용을 줄이거나, 키메라를 만들 때, 사이보그를 제작할 때도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외의 능력을 끌어내기엔 고대 비술이 필요했다. 조제성에게 한방 먹어서 완전 실패로 끝났지만, 아스가르드의 신족들에게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이 그들을 고무시켰다.
아티팩트의 숨겨진 힘들 가운데에는 신과의 교신도 들어있을 거라고 그들은 믿었다. 마법진의 실패로 여신으로부터 메시지가 더 이상 오지 않고 있지만, 이쪽에서 연락해볼 수단이 없었다.
“멀린은 아더왕을 도운 지략가로 알려져 있어요. 마법사이자 전략가인 셈이지요. 그가 우리를 돕게 만드려면 우리를 아군으로 인식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요. 그게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게 문제지요.”
미모의 여성 아테네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의 외견은 극히 젊어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노년에 가까운 과학자였다.
“그건 그렇고, 준비된 육체가 왜 다 저모양이지?”
네이슨, 지금은 아폴로가 된 사내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아더왕을 비롯해 원탁의 기사들을 되살리는데 쓰기로 된 준비된 육체가 죄다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들어온 스폰서들의 요청이에요. 동아시아의 돈많은 변태들의 요청이지요. 필요한 정보를 얻은 후에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조건으로 수조원을 지원 받았어요.”
“미친 거 아냐? 알멩이는 고대의 근육질 전사들인데 그걸 소녀의 몸에다가 넣겠다고?”
“얼마전까지 성기사였던 고지식한 소년에게는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가 있답니다.”
“미친 할망구. 저건 제정신인 놈들이 할 짓이 아니야.”
“부자들이 ‘진짜’를 좋아하는 이유를 아세요?”
“좋으니까 아닌가?”
“아니요. 진짜는 단 하나 뿐이거든요. 오직 자신만이 가질 수 있다, 남은 가질 수 없다는 그 쪼잔한 집착을 위해서 돈을 낭비하는 족속이에요. 예술품이라는 것들에 붙는 프리미엄도 결국 그런거지요.”
“진짜라고? 빌어먹을 놈들.”
영혼조차 상품 취급하는 것에 아폴로는 짜증을 냈다.
“익숙해져야 할거에요. 이 세상은 돈으로 움직이는 거니까. 그걸 각오하고 이쪽으로 넘어온 것 아니었나요?”
아폴로는 신경질 적으로 혀를 차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는 조금 전에 템플 기사단의 멤버들을 죽이고 돌아왔다. 지나친 규율에 얽매여서 변하려고 들지 않는 템플 기사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현자회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현자회 안에서 그는 인간의 욕망들이 얼마나 추한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았다. 물론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모조리 죽여버리고, 내 마음대로 세상을 바꾸어주지.’
그런 아폴로를 보면서 아테네는 피식 웃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들 그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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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오랜만에 좀 자유로운 기분이 드는 걸. 이게 시원섭섭하다는 걸까?’
원기는 오랜만에 희연이 곁에 없으니 꽤 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발론 탐색은 어디까지나 템플 기사단의 일이었다.
프레이야측에 요청한 것은 어디까지나 수색조의 호위였다. 수색조는 현재 백수십 팀으로 나뉘어져 각지에서 활동 중이었고 원기와 희연, 연하, 레이니 등 강력한 전력이 되는 이들은 나뉠 수 밖에 없었다.
원기는 24시간 늘 곁에 붙어 다니던 희연이 없으니,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간 듯한 공허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이 기회에 성인 잡지라도 좀 사볼까?’
결벽증에 가까운 희연이 늘 옆에 있었기 때문에, 원기는 왠지 늘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희연이 원기에게 뭔가를 강요하거나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매사에 규칙적이고 자기 단련에 힘쓰는 그녀 곁에 있으면 태만하기 힘들었다.
야한 곳에 눈을 돌리기는커녕 야한 생각 자체도 하기 힘들었다. 그런 면에서 숨을 돌릴 찬스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부담스러운 감은 있었다.
‘저 놈들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로군.’
원기는 한숨을 쉬면서 다크 엘프들을 돌아 보았다. 그에게 배치된 다크 엘프들은 도합 네 명이었다. 스페이드 에이스, 킹, 퀸, 잭이었는데 퀸 역시 남성이었다.
사명감에 불타는 전사들인 다크 엘프들은 마음 편히 어울릴 사교성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크 엘프들의 눈빛이 거슬렸다.
그들에게 있어 원기는 경애하는 프레이야의 가장 총애하는 에인페리아였다. 게다가 다크 엘프들의 영웅인 그렌과 미라엣을 압도하는 프레이야의 쌍벽 중 하나였다.
희연의 무시무시한 전투 능력에 가려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의 방어 기술은 상대해 본 다크 엘프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고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육체를 방패로 동료를 지키며,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방패로 다크 엘프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눈빛은 부담스럽지만, 그만큼 지시는 잘 따라주니.’
원기는 조용하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두는 다크 엘프들의 성향을 감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피곤한 것은 다크 엘프들만이 아니었다. 템플 기사단의 템플러들도 만만치 않았다. 강한 신앙과 사명감으로 똘똘뭉친 그들은 예의바르게 굴긴 했지만, 강렬한 벽이 느껴지고 있었다.
원기와 다크 엘프들의 임무는 기동 타격대였다. 템플러들이 영국 곳곳을 수색하고 있고, 그런 그들을 현자회의 전투 엘리트인 전신(戰神)들이 공격하고 있었다.
템플러들의 경우 장비도 좋고, 이능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12대신의 코드명을 가진 이들과 만나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확산 바주카포입니다. 쓸 때는 아군에게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기에게 지급된 것은 산탄 바주카였다. 큼지막한 포방패가 달린 놈으로 급조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원기의 캐릭 짬 타이거가 가진 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포방패로 강화된 산탄 바주카로도 신급 사이보그라 불리는 이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육중한 갑옷을 두른 만큼, 시간을 버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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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드셨습니까?”
아테네는 라틴어를 사용해서 물었다. 아더왕이 살아있을 당시의 고대 영어는 정확한 발음이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재현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자회는 현대 아스가르드어는 물론이고 고대 아스가르드어도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다.
“몇 년 만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약 1500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테네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의 몸을 한 아더왕에게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성 노리개로 고가에 스폰서에게 넘기기로 예정되어진 몸이지만, 멀린을 설득할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어째서 이런 나약한 몸인거지? 그것도 여성의 몸이라니.”
“어쩔 수 없습니다. 1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고대 비술을 상당부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소녀의 몸을 이용하는 편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대 비술을 잃었다고? 오드 대천사님은 어찌된거냐? “
“오드 대천사님은 인간에게 천사의 사명을 넘기고 주님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아테네의 말에 아더는 잠시 침묵한 다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긴 그럴거라고 생각했지.”
아더는 오드를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악신의 하나로 필멸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다음 영혼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장소로 가는 것을 열망했다.
악신들의 잔재를 정리하면 진정한 불멸자의 곁으로 갈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500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더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내 왕국은 건재한가?”
아더의 질문에 아테네는 정중하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자유 민주주의의 세상이 와서 귀천은 사라지고, 윈저가가 영국을 대표하는 왕실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거 기쁜 일이로군.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상이 현실화 된 것인가? 그리스도교가 단순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을 경계했건만, 역시 진리가 승리한 것이로군.”
아더왕은 더 이상 왕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해 듣고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테네는 내심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생각치 못한 반응 때문이었다. 완전한 평등과 자유를 부르짓던 그리스도교의 이상은 고대사회에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동양에서 유학이 지배 이데올로기화 하면서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암흑기를 불러왔듯이 그리스도교도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화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완전한 평등을 이야기하는 신앙의 중심은 현세에서 어느정도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오드님의 후계자를 만나보고 싶군. 내 새로운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네.”
“그 부분입니다. 현대에 와서 후계자가 변절했습니다.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악신들과 손을 잡고 악신들 중 하나인 프레이야를 이 세상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드의 후계자와 싸우기 위해서 아발론에 잠든 영령들을 불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허어. 그런가. 랜슬롯은 어찌 되었나.”
“랜슬롯 말입니까? 곧 의식을 통해서 아발론에서 저희가 준비한 육신으로 옮길 것입니다.”
“녀석도 이런 몸이 되는 건가? 그거 걸작이로군.”
아테네는 아더의 랜슬롯에 대한 두꺼운 신뢰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흔히 알려진 랜슬롯과 기네비어의 불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이가 없군. 모드레드가 내 아들이라고? ”
아더는 기네비어의 이야기가 나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기네비어는 그가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맺은 정략혼의 상대자였다. 그리고 악신의 유물, 생명의 잔을 빼앗기 위해서 기사들과 출진한 사이에, 모드레드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가장 총애하는 기사 랜슬롯으로 하여금 기네비어를 호위라는 명목으로 감시하게 두었는데, 불륜의 소문을 퍼뜨리는 책략을 사용한 탓에 랜슬롯의 명예를 위해 감시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레오데그란스 왕이 우리를 이용하려고 들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색슨족을 물리치자마자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
“그럼 모드레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놈이 내 아들일 리가 있나. 오크니의 롯왕의 아들이지. 동맹을 맺으면서 원탁의 기사로 받아들였지만 처음부터 우리를 배신하려고 노렸던거야.”
아더는 혀를 찼다. 원탁의 기사들이라는게 후세에 와서 대단히 미화되었지만, 실제로는 150명이나 되는 의회였다. 150명의 귀족이 모여서 잇권을 두고 토론을 벌여야했다.
색슨족과의 전쟁에선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 후에는 각 세력의 입김이 들어가서 아주 피곤한 존재로 변해 버렸다.
레오데그란스 왕과 기네비어는 자신들의 뜻대로 조종되지 않는 아더왕과 그 일파를 쫓아내기 위해서 오크니의 롯왕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 모드레드와 기네비어가 야합해서 아더를 쳤다.
결과는 아더의 승리였고, 기네비어는 차마 처형할 수 없어서 수도원에 가두는 것으로 끝냈다.
“그건 그렇고 프레이야를 끌어들였다니…”
아더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오드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해 본다면, 오드가 끌어들일만한 유일한 악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군. 하지만 이 육체로는 도저히 싸울 수가 없을 것 같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육체는 충분히 강력합니다.”
아테네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현자회가 만들어낸 생체 공학의 정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외부 리모콘을 이용해서 사이보그 기관의 출력을 조종할 수 있게 해놨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최대 출력에서는 신급 사이보그와 동급의 힘이 나오지만 출력을 최대한 줄이면 몸을 가눌 수조차 없게 되어 있었다.
얼마안가 랜슬롯도 깨어났다.
“악신 프레이야의 에인페리아들과 싸울 기회가 곧 올겁니다. 두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테네는 미소를 지었다. 현자회는 현재 프레이야의 원군이 어디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연하의 강력한 저격이나 희연의 검격은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꼽은 가장 안전한 상대는 바로 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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