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젊음이라는 독
‘아이고, 이 순진한 새끼. 하나도 안변했구만.’
멀린은 아더를 보면서 내심 혀를 찼다. 금발 소녀로 변한 아더는 여전히 밝고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발론에 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기네비어와 정략 결혼한다는건 멍청한 짓이야. 그 년도 그렇고 그 애비도 그렇고 절대 자기가 쥔 걸 내려놓을 리 없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납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진한 놈아. 그게 그리 간단할 것 같냐? 왕이 원탁을 내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널 왕으로 인정 못한다는 거야. 넌 기사중 하나랑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뜻이야. 그놈이 준다는 기사들 100명이 같은 원탁에 앉아서, 네 놈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아댈 거다.”
“제 휘하에 들어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르게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전 믿습니다. 왕으로 인정 못받으면 어떻습니까?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한 법입니다. 저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평등을 믿습니다.”
“넌 운 좋게 고생을 덜해봐서 그래. 사람들은 그리 쉽게 안바뀌는 법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멀린 어르신께서도 많이 바뀌셨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네 놈 같은 순진하고 무식한 기사 나부랭이한테 감화라도 될 것 같아? 웃기는 소리야.”
멀린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슬쩍 돌렸다. 아더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멀린에게 있어서 세상 모든 인간들은 멍청한 돼지새끼들이나 다름 없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태어난 땅에 대해 미련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로마 제국처럼 번영시켜서 문화를 꽃피우는 땅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서 온 풋내나는 기사 아르트르와 손을 잡았다. 마침 이름도 비슷한 우더왕이 몰락한 터라, 그 이름을 빌렸다. 멍청한 놈들은 아무리 폭군의 핏줄이라 할지라도, 왕족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면 환장하는 법이었다.
순진한 아더, 신뢰받는 아더는 멀린에게 있어서 꼭두각시로 쓰기에 이상적인 존재였다. 사람들은 머리좋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일반 백성들이라면 자신들의 왕이 우월한 존재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백성들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귀족과 관료들은 지나치게 똑똑한 왕을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알기 쉬운, 그리고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왕이 필요했다.
멀린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흑막으로 존재하길 원했다. 그는 그림자가 되어 빛인 아더를 조종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는 아더의 빛에 매료되어 버렸다.
“멍청한 놈. 어찌되도 난 모른다.”
그 후, 멀린은 자신의 육체가 노쇄하여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드의 힘을 빌릴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많은 몬스터들과 싸우며 젊고 유능한 기사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노화된 늙은 마법사이자, 구시대의 잔재인 자신까지 도움을 받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남은 한달의 생명을 아더왕을 위해서 쓰기로. 그는 제자인 비비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동결시켰다. 그리고 아더왕이 위험에 빠질 때, 그 봉인을 풀고 나와서 도울 수 있도록 비비안에게 명했다.
그리고 멀린의 예상대로, 기네비어는 모드레드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더는 모드레드를 쓰러뜨리고 치명상을 입었다.
“다행이야. 늦지 않았어. 걱정하지 말게. 자넨 죽지 않을거야.”
멀린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생명력을 넘기면, 아더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늘에 감사했다. 하지만 아더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제가 어리석었던 걸까요? 기네비어와 손을 잡은게 실수였던 걸까요?”
“아닐세. 자넨 잘못된게 없네. 자네를 믿고 진심으로 따르게 된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자네의 길은 옳았네.”
“하나도 변한게 없으시군요.”
“자네는 좀 늙었군 그래. 얼굴만 늙었어. 여전히 물러 터진걸 보면. 자네는 더 살아야 해.”
“전 실패했습니다. 제가 이루고자 한 평화는 거짓된 것이었고, 저 때문에 많은 기사들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비록 실패한 시도일지라도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의 피로 만들어진 미래가 어찌 될 것인지 보고 싶다는 거로군요.”
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아발론이었다. 언젠가 왕이 되돌아 오기를 기원하며, 왕이 잠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멀린은 아발론에 함께 잠들었다.
언젠가 아더가 눈뜨는 날, 그가 보는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기를 바라며.
“내가 틀렸던 건가.”
멀린은 동양계 미소녀의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예상한 미래는 아더를 실망시킬 추악한 세상이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만들어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보면서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다만 어떤 세상에서든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듯 했다.
‘우리를 이용할 생각으로 가득하군.’
아더와 동년배의 소녀가 된 멀린은 현자회의 속셈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에게 트윈테일에 빨간 셔츠, 미니스커트를 강요한다든지, 아더의 요상한 갑옷이나 무기, 그리고 갑옷임에도 불구하고 허벅지가 완전히 드러난 랜슬롯의 갑옷 등을 보면 놈들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더의 인간적 매력을 생각할 때, 여성으로 만들어서 애인 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멀린도…
“영감.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거지?”
랜슬롯이 삐딱한 눈길로 쳐다봤다. 멀린은 푸른 머리칼의 미소녀를 불쾌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같은 무식한 것들이 생각할 수 없는 고차원 적인 문제다. 애송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그런 소리는 하지 맙시다. 영감이 아발론에서 잠든 사이에 나도 꽤 나이를 먹었으니. 영감의 음흉한 눈빛을 지금은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랜슬롯의 말에 멀린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왠지 지금의 외견에 어울려 보였다.
그리고, 멀린은 자신이 유치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 술에만 취하는 줄 알았는데, 젊음에도 취하는 건가.”
뛰어난 지능과 지혜, 경험을 갖춘 멀린은 자신이 왜 유치해졌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육체 탓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저런 경험을 쌓는 것이 지혜의 원천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나이가 들면서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었다. 젊을수록, 아니 어릴수록 에너지가 넘치는 법이었다. 에너지가 넘치다보니 의욕이 앞서서 실수도 잦은 법이다.
나이가 들면서 만사에 의욕이 없어지고, 쉽게 피곤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한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며,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면서 살아가려고 든다. 그리고 그것이 지혜롭게 보이는 것이었다.
멀린은 소녀의 육체에 흘러넘치는 에너지가 술보다 더 강력하게 자신을 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너지가 넘쳐서 좀이 쑤시는 것을 느꼈다. 유치해지고, 얄팍해졌다. 그리고 충동적이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아더를 지키려면, 냉정을 찾아야 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자. 이건 뭐 발정난 개새끼도 아니고 도무지 진정이 안되는군.’
멀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TV를 켰다. 그리고 역사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마법은 거인족들의 기적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라웠다.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을만큼 넘치는 에너지는 무언가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랜슬롯과 아더 역시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을 통해서 이 세상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만약 나이든 육체였다면, 이런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일 만한 에너지가 없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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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기사단의 장비 일부를 빌리면서, 원기 일행은 급격한 전투력의 상승을 얻을 수 있었다.
원기의 경우 부스터를 이용한 대쉬로 적을 덥쳐서 이능을 이용해 제압하는 수법에 그쳤지만, 희연의 경우에는 가스 추진기를 이용해서 엄청난 고속의 칼부림을 구현했다.
물론 가스 제트의 경우 추진재의 용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작 1분 남짓이긴 하지만,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적을 베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연하는 날개와 추진기를 이용해서 빌딩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서 이동할 수 있었다. 비행 시간은 약 3분에 이동거리는 약 15키로미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빌딩사이의 바람을 읽고 교묘하게 비행해서 원거리에서 날아와 적절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저격총을 발사하는 연하의 전법은 신급 사이보그들도 대처하기 쉽지 않았다.
원기에게 당한 하데스를 제외하고도 희연에게 셋, 연하게 둘이나 신급 사이보그가 당하자, 현자회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벌어진 아더왕과의 대결.
희연은 아더왕을 검술로 완벽하게 압도했다. 하지만 아더왕의 엑스칼리버는 단순한 무기 강화가 아니라, 전신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연하의 저격도 원기의 고통을 주는 이능도 통용되지 않았다.
희연이 가진 무기사랑의 공격력은 아더왕의 엑스칼리버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칼날이 부러져나간 부분과 격돌할 때는 검과 검이 부딛쳐도 버틸 수 있었지만, 반토막 남은 부분과 격돌하면 희연의 검은 무기사랑의 빛과 함께 잘려나갔다.
원기는 아더왕에게 달라붙기를 시전하다가 세 번 죽었고, 연하는 랜슬롯이 던진 창, 게이볼그에 맞아서 두 번 사망했다. 희연은 가스가 떨어지는데로 후퇴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희연이 죽음을 회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죽음을 당하면, 상대가 만만하게 볼 수 있었다.
희연의 공격이 비록 아더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여러 차례 검에 격중당한 탓에 아더의 자신감은 대폭 감소된 상태였다. 자신이 더 강력하고 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힘과 속도에서 상대보다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몸에 스치지도 못한다는 것은 꽤 큰 압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원기와 연하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지만, 희연은 달랐다.
“너무 의기소침할 것 없어. 아더, 자네와 그녀는 재능이 달라.”
“그럴까요.”
“그래. 상대는 천재고, 자네는 범재니까. 적어도 검술로는 그녀를 이길 수 없을거야. 꿈도 꾸지 마.”
위로 겸 격려라고 생각했던 아더의 미소가 살짝 굳어버렸다. 그런 미묘한 표정을 보면서 멀린은 피식 웃었다.
“자네에게 재능이 있다면, 검술보다는 사람을 움직이는 재능이라고 생각해. 자네가 상대할 적은 그녀가 아니야.”
‘현자회지.’
멀린은 뒷 말을 삼켰다. 실제로 아더에게 도움을 받은 현자회의 말단 조직원들은 아더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멀린은 현자회의 연구에 협조하는 척 하면서 현자회의 내부 인간관계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이 거인족의 소환에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프레이야와 거인족은 위험도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프레이야가 감기라면 거인족은 흑사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터였다.
‘복수에 눈이 먼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군.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멀린은 현자회를 움직이는 스폰서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고대가 되었건 현대가 되었건 재물이 없이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조직이 되었건 한 마음으로 뭉치지 못하는 법이었다.
멀린은 그 틈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현자회의 스폰서들을 노리는 것은 멀린 뿐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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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흐름만 꿰면, 인간 사회의 미래를 꿰뚫어 보는 것은 일도 아니지.”
조제성은 그렇게 자신있게 말했다. 정치가에게 어떤 돈줄이 붙었는지를 알면, 그가 내놓을 정책을 점칠 수 있었다. 방송국에 어떤 광고주가 붙었는지를 알면, 나올 기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돈으로 움직인다.
조제성은 박승희와 함께 유럽에 와서 현자회의 돈줄을 추적해 나갔다. 템플 기사단에서 얻은 정보들 중에는 막대한 양의 계좌 정보가 있었다.
세무보고서라든지, 재무 지표 등 수많은 숫자의 나열에서 박승희는 이질적인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조제성은 의심스러운 돈의 흐름들을 확인하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온갖 조직범죄의 돈세탁과 고위층의 탈세 등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제성의 사업 확장에 쓰여질 것이었다. 그리고 현자회의 돈줄과 템플 기사단의 돈줄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돈 줄이 목숨줄인 법이지.”
조제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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