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각성
현자회는 멀린에게 극히 제한된 자유와 정보만을 전해 주었다. 영상물과 서적등을 제공했지만, 인터넷은 제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도 사극 위주로만 제공했다. 현대사나 현대 사회에 대한 영상물은 제공하지 않았다. 그리고 24시간 완벽하게 감시해 나갔다. 멀린에 대한 경계만큼은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멀린은 만만치않은 능구렁이였다.
그는 이미 보이지 않는 눈으로 모든 곳을 감시하는 신적 존재들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래서 아더와 단 둘이 되었을 때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현자회에 대해서 협조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태도만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더에게 장단만 맞추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멀린도 꽤 순진하게 보여지는데 성공했다.
‘놈들이 탐내는 것 중 하나는 게이볼그였지.’
현자회는 그런 멀린의 모습을 보면서 안심했다. 음모나 테크놀로지에 무지한 어리석고 순진한 원시인이라고 판단했다.
“제가 알고 있는 비술들을 현대에 맞는 표현으로 전해드리기 위해서는 좀 더 현대에 대해서 알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로선 알기 쉽게 설명드렸는데, 여러분들이 쉽게 못알아들으시는군요.”
멀린은 그렇게 교묘하게 장난을 쳤다. 고대의 비술을 일부러 있는 그대로만 설명했기 때문에, 현자회가 성과를 얻기는 어려웠다. 결국 멀린이 현대를 배워서 ‘통역’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물론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멀린이 흔쾌히 마창 게이볼그라는 유명한 아티팩트를 현자회에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멀린은 현자회가 자신들에게 얻을 것을 얻게 된다면, 자신들을 ‘성적 도구’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유럽에서는 고대부터 동성애자들이 많았고, 특히 섬나라였던 영국은 그런 면에서 첨단을 달리던 원조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자회에게 그런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할 필요는 있었다. 그리고 멀린에게 있어서, 좋은 떡밥이 있었으니 그것이 랜슬롯이었다.
현자회가 랜슬롯에게 원하는 것은 아티팩트 뿐이었다. 뛰어난 무사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멀린에게는 비술이, 아더에게는 이능이 있었다. 엑스칼리버는 가장 뛰어난 이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공방일체의 최강 기술로, 왕이 마음놓고 전선에서 싸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안하게 되었군. 랜슬롯. 이게 다 자네가 섬기는 왕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주게.’
멀린은 랜슬롯의 소유로 아더왕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던 마창 게이볼그의 주인 설정을 리셋했다. 그리고 현자회에게 제공했다. 마창 게이볼그는 사실 놀라운 무기였다. 투창으로 사용하면 수십개의 창으로 나뉘어서 창의 비를 적에게 내리고는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왔다.
창으로 찌르면 적의 내부에서 수십가닥으로 갈라져서 튀어 나오는 치명적인 무기였다.
하지만, 멀린이 보기엔 이 세계의 총기가 훨씬 효과적이고 강력했다. 창의 비를 날리느니, 기관총알을 퍼붇는게 나았다. 게다가 창으로 찔러서 적을 죽인다는 건 더 바보짓 같아 보였다.
“새로운 주인을 인식시키는 것은 간단하지만, 누군가에게 얽매이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선 새로운 방식의 비술이 필요합니다.”
현자회는 지금까지 아티팩트들을 모아왔지만, 주인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멀린의 지식에 감탄하며, 정보의 통제를 더 풀었다. 덕분에 멀린은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게 되었고, 곧 그는 아더왕이 소녀로 나오는 애니메이션과 게임, 만화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자라는 걸 감추고 싸우던 아더왕의 영혼이 소환되어 블레이드라는 검사로 소환사와 함께 싸우는 만화영화였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인 오사카 마린이라는 여자 소환사의 모습도 나왔다.
“푸하하하. 이거 봤나?”
“좀 묘한 기분이군요.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는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불쾌하군요. 폐하를 저런 식으로 그리다니.”
“음, 게임쪽에서는 루트에 따라서 아더는 내 꼭두각시가 되는군. 뭐, 사실을 반영한건가.”
“영감. 등에 칼맞고 싶은 건 아니겠지.”
“차라리, 이게 더 낫군요. 저와는 이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영웅왕 아더라니, 이상을 쫓다가 자멸한 실패자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아더의 말에 멀린과 랜슬롯은 입을 다물었다. 모드레트와 짜고 아더를 배신한 기네비어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현자회는 주로 사극과 같은 영상물을 위주로 제공했기 때문에, 랜슬롯과 기네비어의 불륜 로맨스 이야기는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랜슬롯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내가 부주의 했어. 클라렌트 따위는 부숴버려야 했는데.’
멀린은 후회했다. 아더가 소유한 무기 ‘평화의 검’ 클라렌트가 아더의 목숨을 빼앗았다. 아티팩트인 클라렌트의 능력은 주변 일대의 이능을 전부 정지시키는 것이었다.
아더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맡겨두었지만, 그것이 아더의 엑스칼리버를 무효화시켰고, 결국 모드레드에 의해 아더는 목숨을 잃었다. 만약 엑스칼리버를 무력화시킬 수단이 없었다면, 모반은 쉽게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평화의 이름을 가진 양날의 검이 주인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 위험성을 멀린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이능을 가진 적에게서 아더왕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맡겨둔 것이었다.
어떻게 그 검이 모드레드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는 멀린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기네비어 그 망할 년이 껴있는건 틀림없겠지.’
“이왕 이렇게 된거, 절 블레이드라고 불러 주세요. 적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더와 전 전혀 다른 인물이니 말이지요.”
반란으로 자신이 일궈온 모든 것들을 상실하고, 자신을 끝까지 밑고 따라온 충실한 신하이자 동료들을 대부분 잃었다.
그가 세운 왕국은 그와 함께 망해버렸고, 그가 막으려던 색슨족은 마침내 영국을 점령해서 앵글로 색슨 왕조를 건설했으며, 후에는 노르만인들의 침략으로 노르만 왕조가 건설되었다.
색슨족을 학살해 온 그의 싸움은 그런 면에서 보면 허무한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 신화에서 아더왕은 신화화되고 영웅이 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헛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언젠가 왕으로서 되돌아 올 것이라는 신화는 아더의 실소를 자아냈다.
그가 아발론에 들어가는 것을 택한 것은, 그저 미래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온 이상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달한 세상은 인간이 인간의 힘만으로 건설한 마법과도 같은 세상, 자유와 평등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 믿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더에게 있어서 큰 치유이기는 했지만, 아더왕의 명성은 그에게 있어서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왕으로 돌아갈 생각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전설의 영웅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는 폐하의 영원한 신하입니다. 말씀을 거두십시오.”
“잘 부탁해. 블레이드. 나도 오사카 마린이라고 할까?”
멀린은 24시간 완벽하게 감시당할 뿐만 아니라, 영상 기록을 통해서 되돌려 보는 것까지 인간의 마법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멀린에게 있어서 과학이나 마법이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 어느쪽이든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했다.
‘사는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도, 인간은 인간이야.’
성욕은 지배욕과 연결된 경우가 많았다. 단순한 번식 행위가 아니라, 소유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으로서 인간들은 받아들였다.
힘있는 자들일수록, 권력을 가진 이들일수록 그것을 실감하기 위해서 성욕을 불태우는 경우가 많았다.
멀린은 마창 게이볼그가 현자회에 들어간 만큼, 랜슬롯이 조만간 따로 불려갈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측은 안타깝지만 벗어나는 일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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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집단과 손을 끊고, 우리와 손을 잡으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신을 불러오는데 실패했습니다만, 우리는 이미 여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조제성은 불치병에 시달리는 사업가, 스티브 맵스에게 제의했다. 현자회의 강력한 돈 줄 가운데 하나였다. 교활한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사업적 재능이 극히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돈과 기술, 영향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특히 기술과 영향력은 아직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스티브 맵스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고쳐줄 수 있다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야심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육체로 영생을 살 수 있게 해드리는 것도 간단합니다. 물론 그걸 위해서는 좀 더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겠지요. 여신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신도가 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만, 인생 아니 영혼을 맡기기엔 아무래도 불안하시겠지요. 여신님을 위한 스폰서만 되어 준다면, 당신의 병을 당장이라도 고쳐줄 수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여기 여사제까지 모시고 왔지요.”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리디아를 소개했다. 치료를 받는 순간, 완전히 낚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대는 꿈에도 모를 터였다.
“정말 고쳐주는 건가? 대가는 어떻게 되지?”
“마음 내키는데로 도와주시면 됩니다. 협조해 주고 싶으면 협조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병이 낫는 것만으로는 만족 못하실테니까요.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면 여신님의 은총을 바라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건 그냥 맛보기 서비스라고 생각하십시요. 20년쯤 고민하시고 결정하셔도 됩니다. 물론 그 동안은 저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는게 여러모로 유익하겠지요?”
조제성은 교묘한 화법을 이용해서, 거저 주는 것이 거저 주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거저 주는 것을 거저 받게끔’ 만들었다.
리디아에게 거저 목숨을 얻으면, 꽤 자발적으로 일해주게 될 터였다.
조제성은 현자회의 스폰서들 가운데 쓸모있는 자들을 선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나치게 부정축재한 자들은 탈세를 비롯한 범죄들의 증거를 언론이나 사법기관에 넘겨서 곤경에 빠뜨렸고, 돈 줄이 되어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이들은 리디아를 동반해서 구어 삶았다.
현자회에서 눈치채지 못하게끔, 구어삶은 이들은 현자회에 지금까지 지원하던 금액들을 지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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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현자회의 연금술사로 불리우는 과학자들과 함께 작업을 해나가면서 그들의 성향을 파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순수하게 생명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들과 악신의 힘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분리해 낼 수 있었다.
세상을 증오하고, 세상을 뒤집어 엎기 위해서 악신을 소환하고자 하는 이들도 꽤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빠르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요르문간드의 사제에서 오드의 사제가 되었기에 정령을 사용하는 반신족의 술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묘하게 자신이 있는 시설을 역으로 감시할 수 있었다.
‘어떤 비술을 알려주면 사이가 벌어질까.’
멀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예산도 시간도 인력도 한정되어 있었다. 생명의 신비, 이능 각성, 아티팩트 개방, 악신 소환 등 관심사들이 달랐다. 그리고 멀린은 제공할 비술을 통해서 연구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어떤 연구가 시작되든 불만을 갖는 그룹은 튀어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는 교묘하게 떡밥을 던졌다. 각 분야별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비술이 있음을 알려주고는, 마지막에 악신을 소환하는 게이트와 관련된 비술의 존재를 밝혔다.
현자회의 강경파들은 다른 파벌의 의견들을 묵살하고 악신 소환쪽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의 연구에서 새로운 희망을 본 다른 파벌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은 것은 아닌 사람들이 사실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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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는 엑스칼리버의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원거리 전투를 하는 연하나 뛰어난 테크닉과 스피드로 당해내는 희연과 달리, 원기는 엑스칼리버의 공격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캐릭터에게 당했다는게 더 열받는군.’
블레이드의 정체가 아발론에서 나온 아더왕일 거라는 예측은 가능했다. 장수한과 찬균, 호철은 신이나서 전투 영상을 수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 임한 원기는 그리 편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는 떨어진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 블러드 라인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프레이와 펜릴을 만났다. 그리고 프레이는 그런 원기의 사정을 듣고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하군요. 원기님은 그 누구보다 이능을 자유롭게 강력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페인 마스터리 말고는 다른 이능을 각성하지 못한건 이상하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이능의 원천은 바로 프레이야님이시니…”
“하지만 너희도 이능을 갖고 있진 않은 것 같은데?”
“그야, 아쉬울 게 없으니….전 여기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군요. 실력으로 승부하는 세상이 좋습니다. 지면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그것도 포함해서 즐거우니.”
“하지만 난 달라. 강해지고 싶은 건 진심이야.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어.”
“그런가요? 프레이야님이 적을 물리치고 싶어한다고는 생각지 못했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펜릴과 프레이는 원기의 마음을 부정했다. 그리고 그 순간, 원기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군을 구하기 위해서 적을 죽이려고 들었을 뿐, 사실은 누구도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자신은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길 원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문제였다. 그는 남에게 고통을 주는 걸 원한 것이 아니라, 남이 고통을 알아주길 원했던 것이었다.
앞으로도 적을 죽이겠지만, 그것은 그가 적을 죽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군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의 안에서 이능이 깨어나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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