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232화 (232/497)

232화 탄생 비화

“멀린은 무얼 하고 있나?”

“휴식으로 독서를 하고 계십니다. 책 제목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로군요.”

“어린애들 보는 소설 아닌가? 그 제비가 왕자의 황금동상을 돕는다는.”

“맘에 드는 듯 틈나는 대로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뭔가 감춰진 의미가 없는지 비밀리에 조사는 하고 있습니다만, 특별한 성과는 없습니다.”

아폴로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답을 얻기는 힘들었다. 생각보다 멀린의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지만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린애 몸이 되었다고, 어린이용 책을 읽는 것은 아닐테고…문화 수준의 차이를 고려해야 하는건가?’

아폴로가 멀린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는 사이에도 멀린은 행복한 왕자를 읽으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갈대를 사랑하던 제비가 갈대에 질려서 남쪽 나라로 떠나다가 왕자의 부탁을 들으며 겨울을 나러 갈 수 있는 기회를 잃는 이야기였다.

처음 제비는 왕자를 비웃지만, 그 간절한 마음에 못이겨서 그를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왕자의 그 순수함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죽음이 뻔히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 머무른다.

멀린은 제비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다.

그는 우더 펜드래곤의 마법사이자 참모였다. 그에게 있어서 우더는 그저 고용주에 지나지 않았다.

돈을 받으니까 일해주는 그런 관계였다.

왕의 미래 따위는 별 관심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냥 들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왕이 남의 부인을 겁탈하러 가면, 안개 마법을 쳐주고 몰래 숨어들어갈 길을 알려주는 일도 별 부담없이 받아들였다.

우더는 그에게 인심좋은 고용주였지만, 동시에 경멸스러운 쓰레기였다. 물론 멀린도 도덕적이지는 않았다. 강제로 여인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여자들과 즐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더왕이 죽고, 여자들과 노는 환락적인 삶에도 질려버린 여자들 중 가장 지적이고 현숙한 존재인 엘프 비비안 니뮤에와 은거하면서 살았다.

요르문간드를 섬기던 신관들의 자손인 멀린은 악마의 자식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프레이야에게 버림받아 지구에 남겨진 엘프들을 오드가 거둬들이기 시작했고, 오드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오드와 손을 잡았다.

어차피 요르문간드에게 충성할 이유도 없고, 떠난 신과 남은 신 중 누굴 섬길 것인가는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그 후, 그는 아더왕과 만났다. 순진한 군인이면서 이상에 사로잡힌 오드가 딱 좋아할 만한 등신이었다.

멀린은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귀엽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멍청함과 바보스러움에 멀린은 함락당했다.

그리고 그는 제비와도 같이 왕자를 먼저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그의 수명은 늘일만큼 늘였기 때문에 한계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자를 두고 떠날 수 없던 제비처럼 그도 아더를 떠날 수 없었다.

결국 비비안에게 자신의 영혼을 봉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비비안은 아더의 곁에 남아서, 멀린 대신 도움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비비안에게 아더왕은 사랑하는 남편이자 스승을 빼앗아간 애증 섞인 존재였지만, 멀린의 부탁대로 아더를 도왔다.

‘비비안에게 내 영혼을 맡긴 건 실수였을까.’

육신이 없이, 영혼이 소환되면 짧은 시간 현세에 머물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다. 비비안은 자신이 사랑한 이가 아더를 위해 마지막 순간을 바치고 영원한 세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까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어가는 아더왕의 영혼을 아발론에 함께 넣어주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었던 셈이었다. 그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었다.

비비안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조금 미안할 뿐이었다. 멀린의 존재 그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더왕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재미있는 책을 보고 계시는 군요. 괜찮으시다면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아폴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띄고 미소녀의 모습을 한 멀린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현자회에게 속고 있었다는 건가? 랜슬롯은 이미 상품으로 윗대가리들에게 넘어갔고?”

아폴로는 멀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현자회 뒤에는 흡혈귀들을 비롯해서 고대 악신의 찌꺼기들이 남아있다는 뜻이군.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들 눈으로 본다면, 멀린 님은 배신자인 셈이지요. 조만간 멀린님의 지식을 빼내기 위해서 고문이라도 할 겁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아더왕은 아시아쪽 섬나라에선 고가에 팔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됩니다.”

아폴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멀린을 교묘하게 회유하기 시작했다. 현자회는 악신의 후예들이고, 템플 기사단은 변질되어 악신을 끌어들였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일망 타진하지 않으면 이 풍요로운 세상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이 새끼, 모드레드 같은 놈이로군.’

멀린은 아더와는 다른 매력을 아폴로에게서 발견했다. 아더의 카리스마가 신념과 희망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자의 카리스마는 지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독하고 잔인한 지배자, 웃긴 것은 어리석고 교활한 이들 모두에게 이런 어둠의 카리스마가 통한다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생각하기 싫어한다. 뛰어난 지배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한다. 강한 지배자일수록, 더 보호받는다는 안심감을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호받는다는 것은 환상일뿐, 어리석은 자들은 지배자의 도구로 보잘 것 없는 일에 죽어나갈 뿐이었다.

교활한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이런 카리스마를 지닌 이들에게 끌리는 법이었다.

젊은 시절의 멀린은 그랬다. 우더도 비슷한 타입이었다.

‘옛날이었다면, 이 놈과 손을 잡았을 지도 모르지.’

멀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미소녀의 모습 덕분일까, 그것은 아폴로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멀린은 일단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정보와 힘은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폴로는 현자회의 힘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할 뿐이지, 악신을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욕망을 위해 사는 놈이었다.

“좋아. 하지만 약속은 못하겠군.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도 좁고, 자네를 믿기도 쉽지 않아. 자네의 의도는 믿지만, 자네의 능력은 못믿겠군. 자네가 현자회를 장악하는게 가능하다면, 협력하지. 물론 자네가 우리에게 계획을 밝히고 협력을 요청한다면, 실현 가능 여부에 따라서 장악 자체에도 협력할 수는 있네.”

“그정도면 충분합니다. 제겐 다수의 엑스칼리버가 있으니까요.”

아폴로는 멀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현자회는 엑스칼리버의 양산에 성공했다. 만드는 방법은 잔인무도했다. 아이들은 희망과 욕망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이능을 각성하기 쉬웠다. 워낙 바라는게 많아서 다양한 방향으로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과도한 혈정을 주입한다. 그냥 피가 아닌, 인간이 죽어가면서 남긴 생명력이 함유된 혈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잘 부러지는 약해빠진 플라스틱 검을 준다. 그리고 아더왕이 엑스칼리버의 능력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 다음, 날아드는 칼날 속에 던져넣는 것이었다.

각성하면 살아남고, 실패하면 죽는다. 물론 각성해서 살아남은 아이도 곧 죽여버린다. 죽일 때, 그의 피에 생명력과 이능을 함께 녹여서 강력한 블러드 코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현자회가 가진 사이보그의 비밀이었다.

이능을 가진 블러드 코어를 사이보그의 육체에 장착하면, 피를 통해 생명력을 공급함으로써 블러드 코어에 깃든 이능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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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랜슬롯은 리디아에게 반문했다. 아직 몸은 부자연스러웠다. 출력을 강제로 제어한 탓도 있지만, 연료가 되는 피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탓도 있었다. 리디아는 그의 육체를 꼼꼼히 살펴 보았다.

사이보그 기관을 제거하고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충분히 일반적인 인간의 육체로 회복될 수 있었다.

“물론, 남자의 육체를 찾을 수는 있어요.”

리디아는 그렇게 답했다. 현 육체를 포기하고 새 육체를 제공하기엔 신성력이 아깝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게임 캐릭터를 통해서 남성 캐릭터를 키우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그건 당신과 아더 일행이 우리 여신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우리의 일원이 된다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육체가 평범한 인간의 육체가 되도록 만들어드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리디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랜슬롯은 그녀가 진실을 말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녀의 의도가 호의임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배가교환의 법칙 덕분에 리디아가 속한 조직에 대한 호감도 상승되어 있었다.

“폐하라면 기꺼이 프레이야님의 이상에 동참하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혹시 저만 남자의 몸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을까요?”

“예?”

리디아의 반문에 랜슬롯은 얼굴을 붉혔다.

“에, 저는 다른 사람들의 지금 모습이 나쁘지 않더군요. 망할 아버지, 아니 영감은 거시기를 달면 안됩니다. 폐하는 어떤 모습을 하셔도 매력적이시구요.”

랜슬롯의 풀 네임은 랜슬롯 듀 락으로 알려져있지만, 듀 락은 호수를 의미했다. 호수의 요정 비비안에게서 자라난 것만 알려져 있으며 부모가 누군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멀린은 비비안의 연인이었고, 비비안은 요정 곧 엘프를 의미했다. 하프엘프의 미남 기사이자 멀린의 아들이 랜슬롯의 정체였다.

“음, 그런데 아더님도 랜슬롯님이 남자인 것보다는 여자인 걸 좋아하지 않을까요?”

리디아의 반문에 랜슬롯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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