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돌발사태
‘수상한 여자로군.’
CIA요원으로 특채된 한국계 미국인 스티븐은 의심스러운 눈길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라기보다는 이중국적을 가진 한국인이다가 한국 국적을 포기한 케이스였다.
한국 군대에 가느니, 수준높은 물에서 놀겠다고 든 부유층의 엘리트이기도 했다.
당연히 공을 세우고 싶은 의욕이 넘쳤다. 바바리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수상한 여자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재빨리 앞에 나섰다.
“잠깐 우리좀 보시지요.”
“무슨 일이시지요?”
“공공 안전을 위한 확인입니다. 이런 장소에서 그런 복장을 하고 있으면 곤란하지요.”
“어쩔 수 없어요. 이게 일인걸요.”
바바리 코트의 여성이 코트 자락을 벌리자, 거기에는 미끈한 수영복을 입은 몸매가 드러났다. 수영복 엉덩이에는 하얀 토끼꼬리 같은 것이 보였다. 여성은 바바리 코트를 여미고는 모자를 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토끼 귀 모양의 머리 장식이 보였다.
“막간에 들어가는 마술쇼의 토끼랍니다. 지금 적당한 포지션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관객들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야 하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속삭이듯 말했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보이는 눈동자는 매우 매력적으로 보여서, 스티븐은 긴장이 살짝 풀렸다.
‘마술쇼인가. 그럼 어쩔 수 없지.’
경호원이 붙어있는 것도, 모습을 꽁꽁 싸매고 감춘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바니걸의 복장을 한 그녀를 그냥 보냈다.
----------------------------------------
‘역시 조제성 사장이군. 준비성이 발군이야.’
프레이야는 자신의 바니걸 의상을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의 하이힐이라 위화감은 있었지만, 균형감각이 좋아진 덕분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어보라고 하면 곤란했을지 몰랐지만, 바바리 코트에서 튀어나온 수영복 모습에 당황한 탓인지 바니걸 의상만 확인하고는 재빨리 물러났다.
조제성이 노린대로 였다.
사실 프레이야가 콘서트 무대에 선다고 해도 보여줄 장기가 없었다. 박원기가 인기 모델이자 탤런트라고 하지만, 내용물은 언제나 발키리였다. 무대에 올라가서 보여줄 만한 것이 없었다.
춤이라고 해봐야, 몇 년 전에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말춤 흉내 정도 말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프레이야 캐릭터로 말춤을 추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여신이 말춤을 추면서 등장하면, 이능 각성자들은 아마 울고 싶어질 것이었다. 찬균을 통해서 여신 캐릭터가 이능 각성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 모습도 좀 곤란한데.’
프레이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조제성의 계획은 원기의 심경 변화까지 예측하지는 못했다. 만약 그런 부분까지 예측했다면 조제성이야말로 신의 경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었다.
조제성은 어디까지나 ‘유머 감각 넘치는 서양잡귀 아이시발’의 컨셉트에 맞춰서 준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찬균의 반응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프레이야는 ‘서양잡귀 아이시발’의 컨셉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런 면에서 바니걸 의상은 난처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자신에게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원기의 기분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바바리 코트 속에서 등장하는 바니걸 의상의 임팩트는 확실히 컸다. 관객석을 돌아다니다보면 가끔씩 수상하게 여기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바니걸 의상에 피식 웃거나 당황해서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무대 위에서 자신이 보여줄 만한게 없는 상황에서 마술쇼 도우미는 꽤 편리한 것이기도 했다.
관객석에서 바니걸 차림으로 등장해서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고, 차원 거울이 든 상자안으로 들어가서 게임 세계로 워프하는 것으로 퇴장하면 끝이었다.
차원 거울은 프레이야가 사라지면 평범한 거울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조사해 봐도 얻을 것은 없을 터였다.
조제성은 마술쇼 자체도 교묘하게 집어 넣었다.
콘서트 최종 작업에 정신이 없을 때, 유명 프로덕션 사장 이름으로 사회자에게 마술쇼가 추가된다는 메모를 보냈다. 그리고 사회자 이름으로 사장 측에, 진행이 매끄럽게 될 수 있도록 마술쇼를 추가한다는 메모를 보냈다.
나중에 여신의 정체를 알고 마술쇼를 누가 집어넣었는지, 마술사가 누구인지 찾으려고 해도 추적이 불가능하게끔 처리했다.
‘이번까지만 좀 체신머리 없어도 참아달라고 해야겠지.’
프레이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능 각성자들을 관찰해 나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조금 예외적인 인물이 들어왔다.
삼십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보통 이능이 각성하는 나이는 십대 중반에서 이십대 초반이었다. 열 다섯 이전의 경우에는 원하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아서 각성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십대 중반 이후에는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현실적인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얻고자 하지,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고 싶어할 정도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을 때에는 그저 체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십대 중반 이후에 각성하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다.
각성자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인 신근호도 각성 당시에는 이십대 초반이었다.
조제성의 경우에는 원기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인물이기도 했고, 이능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유혜서를 원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삼십대 후반의 남성이 이능을 각성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그리고 갖고 있는 능력도 독특했다.
손을 대서 고통을 진정시키는 능력이었다. 원기와 같은 계통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페인 마스터리의 경우, 진통효과도 있지만 고통을 주는 효과도 있다는 점에서 더 강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엄마손 약손이라고 이름을 붙여둘까.’
원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남성의 능력에 이름을 달았다. 어차피 프레이야 말고는 볼 수 없는 것이긴 했지만, 나름 재미는 있었다.
그리고 마술쇼가 시작되었다. 마술쇼의 마술사 역할은 크리스 맥케이가 맡았다. SAS출신에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짬짬이 마술쇼를 볼 기회가 많았다.
동양권보다는 서양권에서 마술 공연이 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영국인이면서 마술 공연에 익숙한 그는 마술 공연을 흉내내는데 최적의 인물이기도 했다.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니걸 복장을 한 가짜 프레이야였다. 초기에 프레이야의 대역으로 세웠던 캐릭으로, 외모는 프레이야와 똑같지만 여신의 카리스마라고 할지 신성이 없어서 신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반쪽짜리 가짜였다.
하지만 이런 마술쇼에서는 쓸모가 있었다. 사람들은 상자안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미녀를 보며 감탄했고, 크리스가 전기톱으로 상자를 난도질하는 모습에 전율했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프레이야는 바바리 코트를 비롯해 몸을 싸매고 있던 변장 도구를 벗었다.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프레이야를 수상하게 여기고 경계했지만, 마술쇼의 진행에 맞춰서 코트를 벗자 의심을 풀고 무대에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상자 잔해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 크리스가 관객석에 있는 프레이야를 가리키자, 조명이 프레이야를 눈부시게 비춰보였다. 그리고 프레이야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 다음 무대를 향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멋진 마술쇼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하지만 이능 각성자들은 도저히 사라진 미녀와 새로 나타난 여신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여신님이다!’
‘여신님이야! 정말로 나타나셨어!’
그들은 마음속으로 감탄과 환호하면서도 몸은 완전히 굳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바니걸의 복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복장을 하던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크리스의 제스춰에 맞춰서 프레이야는 자신의 몸을 발키리들에게 들게 했다. 그것으로 공중 부양이랄까 공중 비행을 가볍게 연출한 다음, 계획대로 퇴장하려고 했다.
‘퇴장하기 전에 인사 정도는 해두는게 좋겠지.’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군요. 그대들의 봉인된 이능은 모두 풀렸습니다. 나쁜 일에는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일에 쓰는 것으로도 충분히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기도는 제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대들이 절 여신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면, 그대들의 바람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전능하지도 불멸의 존재도 아니라는 점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를 소중히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대들의 영혼을 붙잡아 두는 것은 가능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 신관이나 제 계약자에게 전해주십시오. 그들은 제게 당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전한 초능력이 여러분과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프레이야는 메시지를 전달한 다음, 상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때 돌발 사태가 터졌다.
프레이야가 눈여겨봤던 삼십대 각성자가 아이를 안고 무대위에 뛰어올라왔다.
“여신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콘서트 장의 조명과 소음 때문에 미처 눈치 못챘지만, 그는 담요에 자신의 아들을 감싸안고 있었다. 오로지 여신의 도움만을 믿고.
아이는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양손은 완전히 불에 타서 손가락은 흔적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프레이야는 삼십대 남자가 이능을 각성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그의 능력을 각성시킨 것이었다.
프레이야는 지금 상황에서 현명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이 자리를 모면한다음, 엘프 신관을 보내서 아이를 고쳐주면 되었다.
하지만 프레이야 안의 원기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를 본 순간, 그는 불타는 차안에서 자신을 감싸안던 어머니의 손길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사고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문이었다.
그리고 원기는 그 사실을 때로 원망했다. 차라리 그때 죽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고의 순간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그래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기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아이의 아버지를 보는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아픈 기억만은 아니었다. 뜨거운 불꽃 속의 따뜻한 기억이었다.
프레이야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가서 아이를 끌어 안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안듯이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빛에 휩싸여서 온 몸의 화상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이능 각성자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바니걸 의상을 한 아름다운 여성 도우미에게 여신님을 외치며 뛰어올라간 미친 놈(?)을 보던 관객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게 된 탓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쇼라고 생각했지만, 일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니걸 의상의 여성 도우미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빛을 볼 수 있었다.
멀쩡해진 아이를 아버지에게 돌려주자,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프레이야는 정신을 차리고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십만이 넘어가는 관객석에서 갑자기 스테이터스 창들이 샘솟듯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딱히 이능을 각성한 것은 아닌 물음표들이 자리잡은 스테이터스 창들이 관객석 여기저기서 샘솟듯 마구 솟아오르자, 원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살짝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안쓰려던 말을 무의식중에 토해냈다.
“아이 시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