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자리잡기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원기는 트러블에 휘말렸다. 귀족을 비웃은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귀족이 아니었다. 평민들이었다. 원기는 귀족 청년에게 보이지 않게 피식 웃었지만, 그 모습을 주위에 있던 평민 중 하나가 본 것이었다.
그리고 원기는 그 때문에 평민들과 시비가 붙었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귀족은 평민들의 주인이었다.
귀족의 지배는 육체의 지배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미치고 있었다. 귀족들 덕분에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평민들은 믿고 있었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세금을 거둬도 그걸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귀족에게 딸을 바치는 상황이 와도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노예 근성이라고 불리우는 피지배자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기는 당장이라도 학살극을 벌일 준비가 된 엘프 경호들을 눈짓 손짓으로 진정시키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상대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단순한 말다툼으로서는 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프레이야 여신이라는게 쓸데없는 바람을 집어 넣어서, 제정신 아닌 놈들이 늘어났어. 역시 펜릴 님 같은 강력한 신 밑에 있어야 했는데.”
한 사내가 내뱉듯이 말하자, 순간 공기가 경직되었다. 원기는 그 순간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헛기침을 하면서 이리저리 사라졌다.
그리고 원기는 잠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원기가 잡아놓은 숙소로 신근호가 찾아왔다. 엘프에게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리자 금새 달려온 것이었다. 신성력을 소모하는 포탈을 이용한 탓에 수도에 있던 신근호가 달려오는데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포탈을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지만 ‘계약자’인 그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보 담당자로 자리를 굳힌 신근호는 특유의 후각으로 인맥을 만들어서 뛰어난 정보망을 구축해 둔 상태였다.
바크스 령을 비롯한 펜릴 인근 지역의 반란 움직임 역시 신근호가 이미 조사해 놓은 정보였다. 원기가 있던 지역을 통치하는 바크스 영주는 이미 오래 전부터 펜릴 제국과 내통해왔다.
영민들에게 펜릴 제국으로 넘어가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밑밥을 뿌려 놓은 것이 원기의 귀에 들어온 것이었다.
펜릴 제국에서 인간은 노동력이자 ‘개밥’이었다. 쓸모없어진 인간들은 늑대인간들의 식량으로 사용되곤 했다. 펜릴을 포획한 덕분에 펜릴 제국을 장차 통치해야 할 원기에게는 골치덩어리이기도 했다.
귀족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이 펜릴 제국에 속하길 원한다는게 원기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 형편 좋을데로 생각하는 법이지요.”
신근호가 약삭빨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감하며 살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 눈앞의 욕망에만 따르는 경우들이 많았다.
자신들만은 괜찮을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과 귀족들의 선전이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펜릴과 목숨걸고 싸워서 영지를 지켜낸 것은 귀족이요, 별다른 도움이 못되어 온 것은 평화주의자인 반족 여신인 굴베이그였다.
그렇게 평민들에게 교육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평민들에겐 그것이 정의였다. 그렇기에 프레이야로 인해 뒤바뀐 세상에 대해서 그들은 결코 감사하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중앙정부의 원조 식량과 무기, 자금 지원등만 받아먹고 펜릴 제국으로 갈아탈 속셈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원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펜릴 제국으로 바크스령이 갈아타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펜릴 제국도 원기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놀 자매들은 펜릴 제국의 늑대인간 부족들에 쳐들어가서 부족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임 서버가 중지되어 지금은 지구에서 연예계 활동을 하고 있지만, 강력한 늑대 몬스터와 결합한 캐릭터를 이용해서 늑대 부족들의 우두머리 수컷들을 다 제거하고 장악한 상태였다.
펜릴 제국의 경우, 대부분의 국민은 인간들이고 소수의 늑대인간들이 지배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늑대 부족들은 귀족의 가문들이고, 우두머리들은 가주라고 할 수 있었다.
제국을 관장하는 펜릴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무리없이 부족들의 우두머리를 교체할 수 있었다. 놀 서열 3위부터 14위까지가 펜릴 제국의 12 제후 자리를 차지했다.
새로운 펜릴이 된 놀원이 뒤에서 밀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놀투가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던 참에, 게임 서버의 다운으로 인해서 황권 교체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게임서버가 회복될 때까지는 12제후조차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버 다운은 꽤 악재라고 할 수 있었다.
“뭘 고민하십니까. 펜릴 제국으로 넘어가게 하십시오. 그리고 개밥으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개밥이 되는게 영광인 놈들인걸요. 개밥되는 것이 영광으로 생각하는 놈들을 괜히 말렸다간 되려 물립니다.”
신근호는 달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법적인 폭력집단에 몸을 담아온 그는 인간들의 교활한 어리석음에 익숙해 있었다. 코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미래를 팔아버리는 예는 너무나 흔해 빠져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프레이야님은 이쪽 세계에는 더 이상 현신 안하신답니까? 그분 목소리를 듣는 것만해도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던데.”
신근호는 아직 원기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최초의 계약자이며, 강력한 실권을 가지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신근호 역시 프레이야 제국의 실세 중 실세라고 불리우는 계약자의 일원이지만, 여신과 언제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상위 계약자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아쉬운 것은 이쪽 세계에 죽치고 있다보니 소위 ‘바니걸 통신’이라는 것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개밥으로 줘버린다라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원기는 실망감과 함께 드는 유혹에 피식 웃었다. 그건 원기에겐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바크스 영주는 펜릴 제국과 짜고 치는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 전투를 통해서 펜릴 제국측은 사냥을 만끽하고 먹이감까지 확보해서 돌아갔다. 그리고 바크스 일가는 순종적이지 않은 인간들을 처분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해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영주가 영웅적으로 싸워서 비록 인명 피해는 있었지만, 펜릴 제국에게서 영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왔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주는 절대자이며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평화와 행복을 떠드는 프레이야 따위는 장식도 되지 못했다.
‘많은 인명을 희생’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바크스 영주 같은 이만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반 신족을 어리석다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신근호와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그런 분위기를 느끼면서 안타까움도 느꼈지만 실망감도 뼈저리게 느꼈다.
원기는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프레이야가 인간들의 신이 아닌 엘프들의 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엘프들은 고지식하고 재미없는 종족이었지만 동료를 소중히 할 줄 알고 평화를 사랑했다. 차별하는 마음도 없고 정의를 믿었다. 그리고 프레이야를 진정으로 믿고 따랐다.
그것을 느끼면서, 원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신근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능이 약간이지만 미약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모든 이능 각성자들이 받은 느낌이기도 했다.
상위 계약자들은 도리어 이능이 강화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계약자들은 이능이 미약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능 각성자들은 이능이 급격히 약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모를 상실감을 느낀 이들이 많았다. 만약 바니걸 통신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잠재각성자들은 완전히 각성 전으로 돌아갔을지 몰랐다.
그리고 동시에 엘프들은 격한 감격을 느꼈다. 그들은 프레이야 여신이 제 자리를 찾아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전보다 오히려 더 강한 연대가 가슴 속에서 느껴졌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과 의지가 엘프들에게 흘러들어왔지만, 엘프들은 그것을 기쁘게 여겼다.
프레이야는 인간들이 아닌 엘프들을 선택한 것이었다. 인간은 구해야 할 ‘남’이고 프레이야를 돕는 엘프들은 더 이상 ‘남’이 아닌 것이었다.
---------------------------------------------------
템플 기사단에서 의외로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과거와는 달리 엄격한 금욕적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게 된 탓이 컸다.
그리고 그들은 각국 정보부와 현자회, 그리고 아폴로에게 넘어갔다.
프레이야로 인한 대량의 이능자 발생, 오랜 기간 암약해온 템플 기사단의 실체, 그리고 사이보그등 오버 테크놀로지를 보유할 뿐 아니라 인체실험과 학살을 거침없이 자행한 현자회 등은 각국의 정보 기관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의 정보부만이 어렴풋이 현자회와 템플 기사단에 대해서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조차도 드러난 상황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의 경우엔 일부 국가들의 정보부에게 자신들의 실체를 밝혀 왔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힘인 프레이야와 손을 잡는 순간, 템플 기사단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템플 기사단의 초능력자들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던 이들은 현자회와 프레이야측 초능력자들의 능력을 보며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엑스칼리버 건너들이었다.
대인용 화기가 아닌 대물용 화기까지 튕겨내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무서운 것은 몸을 보호하는 염력의 막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비품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중세풍의 갑옷만 입어도 대물용 저격총이나 RPG까지 버텨내는 것이었다. 특히 현자회는 그런 엑스칼리버 건너들을 양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의 초능력자들역시 사이비 사기꾼들이 아니라, 상당히 강력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의 모 학교에서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은 그 능력이 강화된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들어갔다.
문제는 프레이야였다.
프레이야의 경우,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실제로 능력이 입증된 초능력자들은 현자회와 템플 기사단을 제외하면 모두 프레이야의 영향에 의해 각성한 것으로 확인 되었다.
“프레이야 여신이 현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확실한가?”
“그분의 메시지에는 그분의 진심이 담겨 나옵니다. 그분은 이 세계의 신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그분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저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의 청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스스로를 바니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때문일 겁니다. 그나마 예전엔 자신을 여신으로 부르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서양 잡귀에서 바니걸 여신이라, 진보는 진보로군.”
추종자들은 여신이 프레이야 여신으로서 이 세상에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신자들을 이끌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엉뚱하게 여신으로서 자신을 믿을 사람은 믿어도 좋다고 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매직쇼에 나왔던 바니걸’로 자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태도가 프레이야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여신의 신자들이 초능력을 각성하거나, 각성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종교의 형태를 갖추려고 하지도, 포교할 생각도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신의 신자들이 여신에 대해서 강력한 충성심과 호의를 갖게 된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이들에 대해 어떤 정신적 지배를 건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각국의 정보국들은 프레이야의 텔레파시 방송을 청취하게 된 이들을 통해서 프레이야 여신의 의도를 읽고 의사 교환이 가능한 채널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뛰어난 곳은 바로 한국의 초능력 연구소였다.
프레이야 여신 가라사대 ‘서양잡귀를 모시는 유일한 인간 무당’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능력자들이 약화된 것은 대체 무슨 이유때문이지? 현자회가 날뛰는 것과 관계가 있는건가?”
이능의 반감은 겉으로 보기에도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이능 각성자들의 상실감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상실감이 이능의 약화보다 더욱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였다.
여신이 대외적으로 열어놓은 유일한 채널이라고 할 수 있는 초능력 연구소로 문의가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여신님이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주신 것과는 반대로 여신님께서 우리와 멀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지구상의 인류는 그분과 함께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선언하시는 듯한 느낌입니다.”
“응답이 없으신가?”
“예. 제가 받은 느낌으로는 이쪽 세계에 안계신 느낌입니다.”
프레이야 여신이 현세에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하던 이들은 여신이 인간들을 멀리할 생각이라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불로장생의 길이 막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프레이야 휘하의 이능 각성자들, 주로 깃털들은 이능의 감소와 강한 상실감에 놀라서 신전을 찾았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엘프 신관을 보면서 왠지 기분이 더러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신관의 뒤바뀐 태도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패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