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장수한의 각성
‘똥물 드립이라니.’
조제성은 장수한의 똥물드립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하지만 프레이야의 답변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똥물을 마시라고 해도 마실만큼 신뢰한다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똥물 드립은 괘씸하지만, 그래도 그 덕택에 프레이야가 자신을 얼만큼 신뢰하는지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신경이 굵은 건지 둔한건지.’
조제성은 새삼스럽게 장수한을 보았다. 원기는 프레이야가 되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 비슷한 것까지 갖게 되었었다.
여신의 씨앗이 원기가 된 것인지, 원기가 여신이 된 것인지 스스로도 믿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원기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프레이야 여신이 되기를 피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조제성이나 장수한처럼 원기의 정체를 아는 사람도 프레이야 여신을 접하게 되면 도저히 본체가 원기라고는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프레이야가 원기의 모습을 빌린 것이지, 원기가 프레이야가 될 수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조제성이나 장수한도 프레이야 여신의 모습 앞에서는 경외심을 가진 신자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원기에게는 정체성 위기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느낀 것은 조제성이었고, 조제성과 장수한은 무리를 해서라도 프레이야 여신을 원기로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그게 쉽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여신의 신자다운 태도를 취해야 했는데, 마음 속으로 너무 어려워하다보니 한번 존대를 하면, 평대로 돌아오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장수한은 남들 앞에서도 여신에 대해 결례에 가까운 태도나 무리한 드립을 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원기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여신님아. 나한테는 뽀뽀 안해주나?”
“뽀뽀 받고싶어요? 저랑 반대로 되면 뽀뽀가 아니라 키스를 해줄께요. 아주 찐한 걸로. 호랑이의 육식동물 같은 키스를 맛보게 해드리지요.”
이런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하는 것이, 원기에게는 프레이야 여신이 되는 부담감을 줄여주고 있었다.
문제는 여신의 추종자로서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평대를 하기로 했고, 하도록 권했으며 그게 좋은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신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듯이 보이면 짜증과 화가 났다.
조제성 역시 최대한 스스럼없이 프레이야 여신을 원기로써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도저히 프레이야 여신을 대하면서 원기를 떠올리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는 놈이야.’
장수한은 조제성과 달리 사람들과 붙임성있게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미가 부족한 조제성으로서는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물론 그런 것을 그다지 부럽게 여기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조제성의 앞에는 수십차례 죽음을 맛보고 널브러진 서유리가 있었다.
“역시 생각대로야. 안생기는군.”
죽음의 데미지가 정신적으로 축적된 탓에 일어설 기운도 없이 쓰러져 있던 서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들에게 두려움, 혐오감, 불안감을 주는 이능을 얻으면서 서유리의 인간 기피증도 많이 좋아진데다가 여신의 계약자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많이 덜게 된 덕분에 조제성과 장수한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에 대해선 큰 거부감은 없었다.
“어째서 안생기는 거지요? 엑스칼리버 이능이 생기는 방법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낸 것 아니었나요?”
“조건에 차이가 있지. 게임 속에서는 자신이 되살아날거라는 알고 있거든. 아무래도 진짜 죽는 것과는 절박함이 다르지.”
“아, 그건 그렇겠군요.”
서유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열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마냥 참는 성격이라기보다는 모아두고 폭발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이능의 성향 문제도 있지. 서유리양은 정신계에 특화된 능력자야. 엑스칼리버가 각성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염동계와 염파계 능력이 혼합된 형태인 엑스칼리버와는 상성이 좋질 않아.”
“그럼 대체 왜 서유리양으로 테스트한겁니까?”
“혹시 몰라서지. 하지만 역시나였어. 안생기네. 안생길 놈은 죽어도 안생긴다니까. 서유리양. 이제 되었으니까 올라와요.”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관전실에서 그녀를 불러들이자, 그녀의 분노는 터지기 직전에 이르렀다.
아무리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고 해도, 칼날이 몸에 박히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칼날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칼날이 날아오는 순간의 공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죽지 않을거라고 알고 있지만, 다가올 아픔과 죽음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생기지 않을거라고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구경거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분노와 증오가 극에 달했다.
‘네놈들에게 내가 맛본 죽음 이상의 공포를 알려주고 싶군.’
서유리는 이를 갈며, 조제성과 장수한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정신계 이능이 각성했다. 상대에게 죽음의 공포, 아니 죽음 이상의 공포를 안겨주는 발신계 이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조제성이 노리던 것이었다.
“축하하네. 정말 멋지게 능력을 각성했군. 죽음의 공포를 남에게 안겨줄 수 있는 능력자가 되다니 축하하네.”
심장이 멈출 듯한 느낌과 두려움에 몸도 꼼짝하기 힘들었지만, 조제성은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이능이 조제성과 장수한 두 사람에게 동시에 작동한 덕분인지 몸이 굳기는 했지만 말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쪼렙 학살과는 좀 달랐지만, 위력은 거리나 상황에 따라서 어느정도는 달라지는 듯 했다.
“예?”
서유리는 순간 당황해서 능력을 거뒀다. 그녀를 장난감 취급하던 조제성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더할나위 없이 진지한 모습이었다. 서유리는 머리가 식자, 자신이 큰 실례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수한은 몰라도 조제성은 여신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여전히 강하게 품고 있기 때문에, 여신에게 그만큼 더 매료되어 있었다.
여신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여신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계약자들에게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왔다. 순간적으로 분노에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리가 없었다.
“아까 말한 대로일세.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으니 절박함이 부족하지. 그래서 자네처럼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각성하기 어려워. 반면 자네의 능력으로 죽음 이상의 공포에 사로잡히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 되지. 그 마음이 이능 각성의 방아쇠가 될거야.”
서유리는 조제성의 설명을 듣고 조금씩 납득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력을 각성하도록 일부러 조롱에 가까운 도발을 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노는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러고보니 자네의 이능은 여신님의 이능과 짝을 이루는군. 여신님의 이능 중 하나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 알고 있나? 자네의 이능은 ‘죽음 이상의 공포’이니 하나의 쌍이나 다름없군.”
전에 조제성에게서 여신의 이능이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을 떠올렸다. 여신에 대한 사소한 정보라도 새겨듣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제성의 의도이기도 했다. 이능 각성을 위해서는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상대에게 두려움, 혐오감, 불안감을 주는 외모로 자신을 보이게 만드는 서유리의 능력을 좀 더 사용하기 편하게 각성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여신의 이능이라며 알려준 것이었다.
아픔을 모르기에 잔인해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 여신이 어리석은 인간에게 아픔을 알려주기 위해서 갖게된 이능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기에 서유리는 ‘자신이 겪은 두려움을 상대에게도 알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여신과 비슷한, 짝이 되는 능력이라는 조제성의 말에 그녀는 기분이 꽤 좋아졌다.
“그리고 자네에게 기분나쁘게 구는 이들에게서 굳이 숨지 않고, 뜨거운 맛을 보여줄 수 있게 된걸세.”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 혐오를 갖춘 그녀에게 조제성의 말은 아주 멋지게 들렸다. 덕분에 조제성에 대해 나쁜 기분은 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분노의 잔재는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조제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친구는 여신님과 가장 가까운 계약자 중 하나일세. 그래서 이능을 각성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 자네가 모처럼 얻은 능력을 테스트할 필요가 있을 듯 하네. 그러니 자네가 한번 능력을 발휘해 보게.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형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가 엑스칼리버 따윌 각성해서 어디다 쓴다고요.”
“아, 그리고 이 친구가 여신님께 ‘똥물을 먹인다’는 농담을 했었다는 사실 알고 있나?”
계약자를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도 될지 망설이던 서유리의 눈빛이 변했다. 인간 이외의 모든 종족에게 호감을 사는 장수한의 이능은 인간인 서유리에게 통하지 않았다.
“형님은 좋아하셨지 않습니까? 여신이 형님을 이렇게 신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요.”
“음. 괜찮아. 난 츤데레니까.”
“츤데레는 그런 식으로 쓰는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런 동영상도 있지. 감히 여신님의 둔부를 ‘찰지구나’라고 하면서 때리는 장면이지. 자네는 용서가 되나? 여신님이 용서해도 자네는 용서하면 안되겠지?”
서유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장수한은 엑스칼리버 이능을 획득했다. 물론 그가 엑스칼리버의 이능을 사용할 일은 결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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