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바니걸
원기가 빠져선 안되는 일 중 하나가 충성심의 관리였다.
프레이야 교단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에게서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 매끄럽게 운영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프레이야 여신의 시찰이 필요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정기적인 시찰을 다녔다.
이 시찰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리디아와 함께 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장수한이 이름 붙이길, 어장관리 콤보라고 붙인 꽤 강력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조제성과 장수한은 주요 간부의 능력과 임무, 성향들을 분석해서 분석표를 겸한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리스트를 리디아에게 넘겼다. 리디아는 그들 중 중요도가 높고 여신과 만난지 오래된 인물을 골라서 선정했다.
사실 리디아는 조제성과 장수한의 리스트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리디아가 고른다기보다는 조제성과 장수한이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필요했다.
리디아는 인간들이 프레이야 여신님을 알현하는 것이 싫었다. 그들이 프레이야 여신님을 믿는 것조차도 싫었다.
조제성은 누구보다 유능하니 참아주는 것이었고, 장수한은 남같지 않으니 봐줄 수 있지만 다른 인간들이 프레이야 여신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싫었다.
리디아의 인간 혐오증은 아주 뿌리깊은 것이었다. 거미나 뱀, 바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좋아해야 한다고 말해봐야 그리 도움이 안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리디아의 이능은 그 혐오증의 반동이었기 때문에, 혐오감이 강한만큼 더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리디아가 오래 접하면서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배가교환의 효과는 약해지는 편이었다.
엘프의 형상으로 엘프 종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준 희연과 연하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배가 교환은 물론이고 인간 방패의 효과도 그리 높지 않았다.
인간을 혐오하는 리디아에게 리스트의 관리를 맡긴 만큼, 리디아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프레이야 여신과의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리디아는 만날 상대에게 프레이야 여신을 알현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 자신임을 미리 밝혔다.
이 과정을 통해서, 상대는 리디아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뭔가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발생하고, 프레이야 여신을 알현함으로서 신앙심과 충성심을 다시금 되새기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괴로움을 잘 아는 원기는 모든 이들에게 혹시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게 된다면 아는 것을 모두 밝히라고 말했다.
조제성은 그런 원기의 결정에 찬성했다. 어차피 고문을 당하면 끝까지 버티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포로 입을 닫아 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문의 고통을 며칠이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프레이야 여신의 배려에 감사하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을 지킬 것을 내심 결의하게 되었다.
무리한 강요보다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주인이 더 강력한 결속력을 갖게 마련이었다.
그런 만큼 기회가 되는데로 프레이야로서 각 산업체, 말하자면 지부를 순회할 필요성은 있었다.
“누님과 만나는건 이제 괜찮으십니까?”
리디아가 묻자, 프레이야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젠 괜찮은 것 같아. 누나에게 난 유일한 가족이니까. 누나에게 난 프레이야가 아닌 원기야. 유일하게 날 프레이야가 아닌 원기로 봐 줄 사람이지.”
프레이야는 리디아의 안색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아니, 내가 프레이야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야. 난 원기였다가 프레이야가 된, 아니다. 프레이야도 된 거지. 하지만 그걸 가끔은 나도 잊어버릴 지경이야.”
[원기가 프레이야가 되었다. ]는 간단하고 지극히 명료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야를 직접 접한 사람은 그것을 믿지 못하게 되어버리곤 했다.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프레이야가 본래 평범한 한명의 소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연중에 프레이야가 원기라는 소년의 모습을 빌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행운을 통해서 여신의 위치를 얻었다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원기 조차도 그것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승희만은 달랐다.
그저 가족이어서는 아니었다.
원기가 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녀는 모든 혈연을 잃고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원기를 프레이야로서 보지 않았으며, 프레이야 여신에 대한 신앙심도 없었다.
철저한 부정, 그리고 절박한 신뢰. 그것이 승희의 입장이었다.
“누나가 없었다면, 난 아마도…”
프레이야는 말을 잠시 끌었다.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손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끝도 없는 고통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마음 따위는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저 혼자될 누나가 안타까워 하루, 하루 버텨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리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야가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어쩌면 유일한 이유가 그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친구를 데려오다니 정말 다행이야. 밥이나 사달라고 해야겠네.”
원기 역시 승희가 지나치게 사생활이 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금전적으로 풍족해진 지금에도 사생활이 없는 것은 걱정이었다. 돈을 노리고 비위를 맞춰주는 이들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옆에 두는 편이 낫다는게 원기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승희의 성격상 그럴 일은 없었기 때문에 가끔 찾아서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스가르드의 일이나 해외에서의 일이 많은 만큼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친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원기가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어차피 제성 금융에는 새롭게 간부가 된 이들도 있었고, 엘프 경비들의 사기 진작도 필요했다. 레이니를 제외한 엘프들은 원기의 정체를 모르는 만큼, 승희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조제성에게 필요한 중요인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여신의 모습으로 승희를 방문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당분간 또 못보게 될 듯 싶으니.’
혼돈의 대륙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모르는 척 넘어가기에는 사태가 지나치게 장기화 되고 있었다.
이쯤이면 프레이야 제국에서도 움직여 줘야 오딘의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게 수뇌부의 판단이었다. 현자회와 아폴로가 잠잠해진 지금이 아스가르드에 전력을 기울일 시점이라고 보았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옷차림은 이거면 괜찮겠지. 평범한 오피스 레이디처럼 보이지 않을까?”
리디아는 프레이야의 발언에 잠시 망설였다. 머리색을 검게 하고, 눈동자도 짙은 갈색으로 조종한 탓에 동양여성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절대 평범한 미모는 아니었다.
프레이야로 지내면서 후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특유의 카리스마 오러를 어느 정도는 드러나지 않게 만들 수 있지만, 역시 존재감이 달랐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표현하면 프레이야의 현신을 꺼릴 수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사실, 그런 부분도 원기에게는 부담이었다. 원기도 프레이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자들은 프레이야 여신으로 곁에 있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원기 자신이 거부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원기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들었다.
프레이야로 나타나길 바라는 이들의 기대에 응해주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거부당하는 듯한 기분 속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었다.
리디아는 물론이고, 희연과 연하조차 원기보다는 프레이야로 나타나는 것을 반기는 듯해서, 그것이 원기에겐 마음의 앙금이 되어 있었다.
짬타이거든 프레이야든 누군가가 자신을 봐주길 바랐지만, 이제는 원기 자신을 반겨주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치스러운 욕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원기는 그것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프레이야로 나타나는 것을 유일하게 싫어하는 이가 박승희였다. 아마 오늘도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일 터였다. 그녀만이 원기로 나타날 때 가장 기뻐하고 반겨줬다.
그래서 원기는 프레이야로 그녀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장수한의 저속한 농담도 좋지만, 프레이야로 나타난 자신을 책망하는 승희의 반응이 원기의 내심 깊은 곳에 있는 갈증을 채워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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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나는 박승희와 함께 과제를 정리해 나갔다. 노트북을 이용해 자료를 검색하고, 편집하고 정리해 나가는 것이라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주변의 반응이 신경쓰였다.
깨끗한 회의실에 장비는 대단히 고급스러웠다. 게다가 비서실에서 다과를 챙겨다 주었다.
손혜나는 사치를 좋아하는 쪽은 아니지만, 좋은 물건을 알아보는 안목은 있었다. 준비된 다과는 평범해 보였지만, 상당한 고급품들이었다.
‘대체 정체가 뭘까? 정말 재벌 2세?’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긴장으로 안색이 변한 비서 실장이 동생분이 왔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알렸다. 그리고 그 뒤에 들어온 손님을 본 순간, 박승희는 눈쌀을 찌푸렸고 손혜나는 무의식중에 외쳤다.
“바, 바니걸! 아니! 바니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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