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배신
“좀 자중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크리그의 부관 스키피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순백의 털을 가진 은빛 늑대인간이었다.
“펜릴님은 프레이야 제국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악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계셨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만큼, 보급물품 확보에만 전력을 기하고 피해는 최소한으로 하도록 명했습니다.”
“흐흐, 난 펜릴님의 명대로 했을 뿐이다. 저것들은 내 전용 보급품일 뿐이다. 식량이자 에너지원이다.”
검은털로 뒤덮인 늑대인간 크리그가 광기로 번뜩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의 뒤에는 목을 줄로 매인채 끌려오는 인간들이 있었다. 마을을 불태우고 인간들을 붙잡아들인 것이었다.
“하아, 부하들에게는 손을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키피는 한숨을 쉬었다. 흡혈계 능력자의 특징중 하나였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쾌락주의, 마약 중독과 비슷하지만 몸에 나쁘지 않다는게 더 최악이었다.
부하들이 그나마 붙어있는 것은 늑대일족의 특성상 강한자를 추종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우두머리가 물어죽여도, 죽는 그 순간까지 꼬리를 치는 놈들도 제법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피부들이 좋군.’
스키피의 시선이 잡혀온 마을 사람들에게 머물렀다. 프레이야 제국이 먹을 것이 풍족하다고는 들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공포와 폭력에 초췌해진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펜릴 제국의 일반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영양상태가 좋았다.
문화와 유희의 영향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감소한 탓도 클 터였다.
‘새로운 프레이야 여신이 세상을 바꿀 생각이라고 하더니.’
겁쟁이 여신, 비겁자, 몽상가 등으로 불리웠지만, 프레이야 여신이 만들어 가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된 스키피였다. 에인페리아로 오래도록 살아오면서 생각이 깊어진 덕분이기도 했다.
황금알 거위 작전의 부가효과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크리그처럼 인간을 잡아먹는데 미쳐버린 일부의 짐승을 제외하고, 프레이야 제국 내에서 활동하는 강도단들은 어느새인가 프레이야 제국의 삶에 물들어가고 동경하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들려주는 지구의 음악에 반해서, 엘프들의 숨은 팬이 된 강도들도 있었다. 물론 엘프들을 납치해서 그들의 노래를 계속 듣겠다는 야심으로 가득찬 질나쁜 악성팬이되는 것이 그들의 한계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화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변화였다.
“적이 나타났습니다! 엘프입니다!”
스키피는 엘프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머리가 아파왔다. 엘프들의 추적 부대는 아주 끔찍했다. 자전거라는 기계를 타고 다니며 엄청난 속도로 쫓아다니며 강도단을 섬멸했다.
에인페리아들이라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었지만, 치고 빠지는 식으로 부하들을 죽이면서 말려 죽이는 전법을 구사하는 최악의 적이었다.
다만 자전거 부대는 고작 세부대 남짓이고, 황야는 넓었다. 게다가 그들이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여객열차의 숫자도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왠만한 강도단은 엘프들과 조우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리고 크리그 강도단은 그 왠만한 강도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크리그라는 미친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하지만 분별없는 미친 놈, 그래서 실질적인 리더는 하급자인 스키피가 하고 있었다.
“엘프 하나에 충인이 셋입니다. 둘은 하프 암컷입니다. 그 유명한 ‘뿔달린 바퀴벌레’로 보입니다.”
엘프의 단독 여행 자체가 꽤 눈에 띄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인간 세상에 나오는 엘프들은 충분한 전투 기술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야는 엘프들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과보호 여신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죽고 사는 문제가 대수롭지 않은 아스가르드에서 엘프만이 아니라 인간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미친 짓이요 조롱거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레이야 제국의 군대에는 프레이야 여신의 교시 중 하나가 분명하게 내려져 있었다.
‘승산없는 전투는 벌이지 마라.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헛되이 죽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프레이야 여신님은 네가 살아서 귀환하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신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군대가 성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장수한과 박호철의 의견을 따라서 몇가지를 더 추가했다.
‘생존율을 높이는 가장 좋은 수단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죽지 말고, 생존을 위해서 승리하라. 도망칠 때는 함께 도망쳐라. 동료를 버리는 것은 동료를 죽이는 것이다.’
싸우지 못하는 자를 쓰레기 취급하고, 병상의 환자를 가족이 칼로 쳐죽이는 아스가르드에서는 대단히 이질적인 가르침이었다.
엘프들은 쉽게 받아들였지만, 프레이야 제국내의 인간들조차 가치관이 혼란스러워질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생존을 위해 남을 죽여야 한다고 믿어온 그들에게 무슨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는 프레이야의 방침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고, 삶을 즐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엘프가 단독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강력한 에인페리아라는 뜻이지. 사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군.’
스키피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녀는 불꽃의 새를 떠올렸다. 그녀의 심상력이 믿음으로 바뀌면서 불꽃의 새들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은색 털이 불꽃의 색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강도단원들도 총기를 꺼내서 공격 준비를 했다.
“뿔달린 바퀴벌레라. 멍청한 녀석이지. 불꽃에 뛰어드는 벌레 같은 놈이겠지.”
크리그는 미소를 지으며, 줄에 묶여있던 젊은 여성의 가슴에 손을 꽂아서 심장을 쥐어 터뜨렸다. 여인은 비명도 못지르고 절명했다. 여인의 아이인 듯한 꼬마 둘이 울부짖으며 다가오자, 크리그는 그 두 아이의 가슴에도 양팔을 박아 넣고 생기를 빨아 들였다.
그것을 본 원기는 분노해서 바로 달려 들었다. 무시무시한 기세의 탄환 비행이었다. 크리그는 그것을 보고는 털을 곤두세웠다. 주변의 열을 빨아들이면서 그의 털이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주변의 열기를 빨아들임으로써 냉기의 갑옷을 만드는 흡수계 능력이었다.
‘무모한 공격이군.’
스키피는 쓴 웃음을 지었다. 뿔달린 바퀴벌레, 아니 투구벌레의 탄환비행은 빠르고 강력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저 무거운 몸체를 이용해 직선으로 날아온다면 피하는 것은 간단했다. 그들이 피하면 뒷편에 있는 바위에 부딛쳐서 소문대로 박살나서 바닥에 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불꽃은 거의 효과가 없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꽃의 새들을 날아오는 원기에게 날려보냈다. 그녀의 예상대로 불꽃의 새들은 원기의 두꺼운 껍질에 부딛쳐서 부서져 나갔다.
그녀는 쓴 웃음을 짓고는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 순간, 희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쪼렙 학살이 발동되었다.
스키피는 몸이 생각대로 안움직여 주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그 순간 거대한 투구벌레의 몸통이 그녀의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굉음과 함께 원기의 돌진이 강도단의 중앙을 뚫고 나갔다. 뒤에 있던 바위도 함께 관통되었다.
신체 강화로 뿔을 강화한 것이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스키피! 이 멍청한 년이!”
크리그가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크리그는 쪼렙 학살에 걸리지 않아서 쉽게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키피는 원기의 강화된 뿔에 산산히 찢겨 나갔다. 그리고 다수의 강도들은 덤프 트럭에 부딛치기라도 한것처럼 즉사 혹은 중상을 입었다.
희연과 연하, 그리고 리디아는 정신을 못차리고 우왕좌왕하는 강도들을 총알을 난사해서 제거해 나갔다. 희연의 쪼렙 학살은 희연이 가진 총의 위력이 온전히 발휘되도록 도왔다.
“이런 빌어먹을 년들이!”
크리그는 스키피가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하들도 스키피를 더 신뢰하고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키피를 부관으로 데리고 왔다.
그녀는 믿을 만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부하들의 단속을 맡기고 자신은 하고싶은데로 전투를 벌이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잔소리를 좀 들어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 스키피가 눈 앞에서 죽어나갔다. 분노로 머리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는 냉정함을 되찾으려고 했다. 바로 스키피 때문이었다.
스키피는 에인페리아였다. 에인페리아들은 부활을 약속받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부활의 약속은 꼭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신들이 무능하다고 여기면, 부활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스키피를 되살리기 위해선, 공을 세워야 했다. 부하들을 더 잃어선 안되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투구벌레를 외면하고 부하들을 총으로 학살하는 희연과 연하, 리디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엘프 계집을 노려야 해. 엘프 계집은 먼저 몸을 뺄거다.’
원기는 필사적으로 크리그를 쫓았지만, 육체적 능력 자체가 차이가 컸다. 생기를 흡수한 크리그의 근력이나 순발력은 평범한 에인페리아의 수준을 훨씬 상회했다. 게다가 원기는 두꺼운 껍질들을 짊어지고 있어서 속도에 차이가 있었다.
크리그는 빠르게 리디아에게 다가갔다.
‘엘프를 보호하려고 들면 그 틈에 제거한다.’
크리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희연과 연하는 굳이 리디아를 보호하려고 들지 않았다. 딱히 엘프라고 해서 리디아의 목숨값이 희연이나 연하보다 높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게임 캐릭터라서 부활할 수 있기도 했다. 희연과 연하는 리디아를 무시한채 부하들을 제거하고 마을 사람들을 구하는데 전념했다.
그리고 리디아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크리그의 손을 피했다. 크리그가 재차 리디아를 공격하려는 순간, 그의 눈 앞에 원기가 나타났다. 탄환 비행으로 쫓아온 것이었다.
크리그는 할 수없이 원기를 먼저 제거하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원기의 껍질 탓에 발톱을 뜻대로 체내에 박아넣을 수가 없었다. 원기는 원기 나름대로 양 주먹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크리그를 때리려고 했지만, 근접 격투 기술이나 순발력 면에서 크리그가 훨씬 뛰어났다.
스치지도 않는 이상은 아무리 강화된 주먹이라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거리를 벌이는 척을 하자.’
크리그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리디아를 쫓을 듯이 냅다 달렸다. 그 순간 원기는 탄환비행으로 크리그를 쫓기 위해서 등껍질을 펼치고 날개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틈으로 크리그가 돌아서서 발톱을 박아 넣었다.
원기는 자신의 등으로 파고들어오는 크리그의 주먹을 느끼면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크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크리그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깨갱거리는 소리가 주변 수키로미터에는 들릴 듯이 울렸다. 크리그가 흡혈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순간, 원기의 몸속 내부의 감촉을 느끼게 된 순간 원기의 페인 마스터리 발동 조건도 채워진 것이었다.
몸에 손상이 없는데다가 육체의 에너지도 그리 부족하지 않은 터라 흡수 능력은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고통에 비명을 지르느라 정신을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틈에 원기는 한손으로 크리그의 멱살을 잡고 반대쪽 손에 에너지를 모았다.
그리고 에너지를 모은 주먹을 있는 힘을 다해서 크리그에게 날렸다. 폭발과 함께 크리그는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원기는 자신의 일격이 상대의 머리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킨 것을 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상대가 죽일 놈이라고 해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제길. 이렇게 죽다니.’
크리그는 자신의 시신을 보면서 혀를 찼다. 어차피 자신은 에인페리아였다. 스키피라면 몰라도 자신은 펜릴 제국의 강자 중 하나였던 만큼 부활은 보장되어 있었다.
‘가자. 펜릴님의 곁으로.’
‘펜리아님의 곁으로 가자는 거겠지요? 유감스럽지만 그렇게는 안되겠군요.’
‘응? 넌 내게 붙어있는 발키리가 아니었나? 펜릴님께 내 영혼을 바치는게 네 사명일텐데?’
‘펜릴님은 더 이상 없어요. 있는 것은 펜리아 여신님뿐. 그리고 여신님의 번식상대를 공격한 그대가 되살아날 일도 없군요. 부디 성불하세요. 바이바이.’
그렇게 말한 발키리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펜릴이 가진 발키리들은 놀원에게 모두 소유권이 이전된 상태였다. 펜릴 자체가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키리들도 소멸과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다.
놀원은 혼돈의 대륙 출신이라, 신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살아왔다. 그리고 펜릴의 신성을 이으면서, 프레이야의 신성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종속신으로서 충성심은 갖지만 동급 존재로서 대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혼돈의 대륙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번식’이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강한 수컷이면서 동급 이상인 존재는 오직 원기 뿐이기 때문에 놀원은 여전히 원기를 노리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당신은 펜리아님께 충성을 맹세한다면 되살아날 수 있을 거에요.’
스키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다음 고개를 저었다. 약하고 어린 암컷이었던 자신을 지켜주고 전사로 자랄 수 있게 이끌어 준 것은 크리그였다. 욕망에 물들어 타인의 생명을 빨아들이는 것에 집착하게 된 그를 경멸하면서도, 그의 강함과 삶의 방식을 마음 한구석에서 동경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저는 충분히 오래 산 것 같군요.’
발키리는 스키피의 의사를 존중해서 그녀의 영혼을 놓아보냈다. 펜릴 제국을 무사히 흡수하기 위해선, 권력의 중추가 되는 에인페리아들을 솎아낼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의 부활을 보장해줄 발키리들이 자신들을 평가하고 언제든 저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펜릴의 에인페리아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거인족이 보낸 강도단들의 경우 위치와 악행, 능력등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 제거 대상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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