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전설의 심장
“다음 시간 피구라고 하던데.”
“골탕좀 먹여볼까? 그 잘난척 하는 년에게?”
“그래. 한방 먹여주고 싶다. 마침 피구공이라고 해서 생각난건데.”
공은 지름 사이즈별로 0호부터 7호까지 존재했다. 축구공이나 농구공도 아동용의 경우에는 3호 사이즈라는 것이 있는데, 3호 사이즈가 지름이 약 18.5cm남짓으로 피구공과 크기가 비슷했다.
물론 크기는 비슷하지만, 무게와 강도는 농구공과 피구공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녀 합동 피구시합이라, 기대가 되는군.”
놀원에게 은근히 원한을 가지고 있던 악동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구 시합 시작과 함께 놀원의 면상에 한방을 먹인다음, 몰랐다고 말하면 끝이었다. 단순한 사고처리가 될 터였다.
놀원은 학생들에게는 폭군과도 같은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놀원의 휘하에 든 아이들은 그런 그녀의 카리스마에 빠져들었지만, 아직은 반감을 가지는 소년들이 제법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관심도 안가는군.’
놀원은 가볍게 무시했다. 자신이 아닌 약한 아이들을 노리는 것은 문제지만, 자신을 노리는 경우라면 당당히 맞서서 짓밟아주면 끝이었다.
‘피구라는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시시할 듯 싶군. 차라리 축구를 하게 해주면 좋을텐데.’
육식 동물들은 작은 사냥감을 쫓는 본능이 있었다.
도망가는 놈은 무조건 쫓아가는 본능도 있었다.
펜릴이 구기종목에 환장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작은 공을 쫓아서 미친듯이 뛰는 모습은 펜릴에게는 꽤 매력적이었다.
프레이는 스포츠를 굳이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본다고 하면 골프나 야구였다. 확률 싸움에 턴이 정해져 있어서 앞을 예측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펜릴이 선호하는 스포츠는 축구와 농구, 럭비였다. 사냥감을 채고 뺏기 위해 싸우고 가로채서 원하는 곳에 보관한다는 개념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놀원은 냉정하고 효율적이지만, 본능적인 면에서는 펜릴과 닮았다. 가장 큰 문제는 보는 스포츠와 하는 스포츠는 몰입도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축구나 럭비, 농구등을 펜릴이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아드레날린으로 사망자가 여럿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오오, 이거 죽이는데.”
미니 농구공이라지만 농구공처럼 보이지 않는 공도 있었다. 메이커별로 중량도 좀 다른 편이라서 특별히 무거운 것으로 준비했다.
던지기는 좀 힘들지만, 피구공과는 다른 스피드로 날아갈게 분명했다.
“이걸로 불꽃슛을 한번 날려 봐야겠군. 실려가는거 아닌가 몰라.”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키득거렸다. 소위 잘나가던 악동들은 놀원이 학교를 장악하면서 입지가 상당히 안좋아진 상태였다. 특히 왕따들이 기세가 등등해 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의 예상대로 놀원은 자원해서 피구 시합에 나왔다. 그리고 미리 맞춰둔 대로 덩치큰 남자애들이 필드 밖에서 서 있었다.
그리고는 공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설의 영웅, 통키 아빠로 만들어 주지.”
소년 하나가 놀원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몇몇 아이들은 미소를 지었고, 몇몇 아이들은 영문을 몰랐다.
“통키 아빠가 누구야?”
“피구왕 통키라고 몰라? 케이블에서 종종 재방송 하던데.”
“근데 통키면 통키지. 왠 통키아빠?”
“통키아빠가 피구하다가 죽었데. 유명한 이야긴데 몰라?”
“왜 죽은거야? 설마 금밟아서?”
“그건 아니고 공에 맞아 죽었다는 것 같던데.”
아이들이 통키아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소년들은 연습한 대로 피구공을 주고받으며 돌렸다. 펜릴은 공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매료되었다. 그녀의 아드레날린이 한계치까지 상승했다.
그녀의 눈은 그저 공만을 쫓았다. 그리고 가장 힘이 센 소년이 농구공을 쥐고 힘껏 놀원에게 던졌다. 그리고 놀원은 그 공을 가볍게 받았다.
그리고는 핏발이 선 눈동자로 자신이 맞춰야 할 대상인 적 팀을 보았다. 룰 자체는 어설프게 기억하고 있지만, 룰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놀이에 익숙치 않다는 것이고,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옆에서 플레이하던 소녀 ‘육회’가 발견했다. 고기가 야들야들해서 기름에 무쳐 먹으면 녹을 것 같다며 붙여준 이름의 소녀였다.
“안돼요!”
육회는 놀원의 허리에 태클을 하듯 감싸며 밀쳤다. 덕분에 놀원은 선뜻 정신을 차리고 힘을 뺐다. 공의 기세는 죽지 않았지만 다행히 컨트롤은 빗나갔다.
그리고 공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가서 운동장 한쪽 구석에 서있던 교감의 차에 명중했다.
펑!하는 폭음이 들렸고, 자동차의 조수석 문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면서 문짝이 접혀 떨어져 나갔고, 차의 유리창은 전부 박살이 나버렸다. 공은 터져서 피구공이었는지 농구공이었는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놀원 아웃! 금밟았어요.”
선생이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심판을 보던 소년이 담담히 선언했다. 공에 반파가 되어버린 자동차에 놀라 넋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눈꼽만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 결과 놀원에게는 스포츠 금지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들은 장수한은 또 다른 실없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배틀 풋볼이었다.
블러드 라인 2에서 벌어지는 유혈의 풋볼 게임이었다. 죽지는 않지만, 고통이 현실과 똑 같은 블러드 라인 2에서 벌여지는 스포츠와 검투의 결합 같은 스포츠였다.
“왠지 옛날에 흥하던 B급 영화를 연상시키는군. 펜릴이나 놀원은 좋아하겠는걸.”
조제성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예산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문화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포츠 금지령이 떨어진 놀원도 이 게임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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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거 마음이 무겁구나.”
마츠모토 츠루기는 한숨을 쉬었다. 하비에를 꺾어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지만,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딱히 살육극을 벌이지 않는 하비에는 그냥 방치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엘프들과 게임 아바타를 이용한 무한 컨티뉴로 제거할 수는 있지만 그럴 정도의 피해는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한희연과 승부를 겨뤄보고 싶어서 그녀가 현재 훈련하는 도장으로 가기는 했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한희연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로서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가슴에 묵직한게 들어앉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 진짜 소심하기는. 그 잘났다는 계집애보다 강하다면서요. 적어도 동등하게는 겨뤘다면서.”
카즈키는 짜증나는 듯이 말했다. 츠루기는 검의 달인이었지만, 인간으로서 성숙하다고 말하기엔 좀 부족한 면이 있었다. 검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했지만, 즉흥적이고 예측을 불어하는 점이 없지 않았다.
대회장에선 누구나 인정하는 거물이었지만, 도장에서는 괴짜로 낙인 찍혀 있었다. 카즈키의 외가는 일본 굴지의 전통있는 도장이었지만, 결국 츠루기는 그곳에서 적응 못하고 쫓겨났다고 봐야했다.
검에 미친 사회 부적응자, 카즈키가 평하길 ‘찬바라 오타쿠’가 마츠모토 츠루기라는 인물에 어울릴지도 몰랐다.
‘소토 벤케이’ 겉모습만 그럴 듯한 소심자라는 것이 카즈키의 평가였다.
“오, 오셨습니까. 영광입니다.”
“저도 뵙게되어 영광이에요. 혹시 괜찮으시면 여기 사인이라도 좀 해주시겠어요. 제 호심경인데.”
소심한 츠루기가 내심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그가 나타나자 도장주인 한희연의 아버지와 한희연은 마치 아이돌을 영접하는 팬클럽처럼 마츠모토를 반겼다.
특히 한희연의 아버지인 한상운은 마츠모토의 시합을 꽤 오래전 것부터 최근까지 모조리 모아놓은 광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즈키는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한희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츠모토 부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에인페리아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도록 게임 아바타로 도장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나쁜걸.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야.’
카즈키는 희연의 기량을 읽고는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츠루기는 한희연과 한상운의 열렬한 환영에 들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상운은 검의 재능은 없으나, 누구보다도 검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수로서의 재능은 없지만, 코치로서의 재능은 있었다.
그래서 한희연을 길러낼 수 있었고, 그런 그에게 있어서 교본이자 이상형은 검성 마츠모토였다.
반면, 마츠모토는 선수로서의 재능은 뛰어나지만 코치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만약 카즈키의 외가가 명문의 도장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살릴 수 없었을 터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츠루기는 스승이 아니라, 라이벌에 가까웠다.
츠루기는 자신의 딸을 대련 상대로 키웠을 뿐이다. 자신의 후계자를 기른다는 의식 따위는 없었다.
카즈키는 츠루기와 겨루면서 스스로의 재능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희연은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라이벌에 굶주렸다면, 카즈키는 자신을 섬세하게 보살피며 이끌어줄 스승에 굶주렸다고 할 수 있었다.
도달점은 비슷하지만, 걸어온 길은 완전히 달랐다.
희연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카즈키는 그다지 만족하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도 차이가 있었다.
희연이 모범생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부모에 대한 신뢰, 자신을 올바로 이끌어준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희연 역시 카즈키가 부러웠다. TV에서 보는 츠루기라는 선수는 평면상의 존재였다. 그녀의 전술이나 기술에 반응해 줄 리가 없었다.
반면, 카즈키는 마음껏 츠루기와 검을 부딛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닮은 꼴인 두명의 검사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묘한 질투심과 적개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 사위도 왔군. 이리 와보게. 저 사람이 그 유명한 츠루기 선수라네.”
한상운이 도장 문으로 들어온 박원기를 보면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평소에는 좀더 진중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이던 그였지만, 그만큼 반갑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기가 나타나자, 희연은 살짝 움직여서 츠루기 부녀와 원기 사이에 섰다. 원기가 아바타가 아닌 본신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상운의 도장에서 검을 연습할 때에는 원기는 본신으로 오곤 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츠모토 부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신뢰가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에인페리아가 되었으니, 프레이야를 배신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직 원기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인격적인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츠루기와 카즈키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사위라고 했으니, 남편인가? 쥐여 사는 건가?’
츠루기는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카즈키 역시 원기가 중요인물이라서 보호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소중하단 말이야? 왠지 뺏어버리고 싶은데.’
카즈키는 양민수준으로밖에 안보이는 원기의 모습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였다. 희연의 경계가 결과적으로는 카즈키를 도발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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