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약탈애
희연은 태연한 듯 마츠모토 부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가장 큰 사명이 원기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 대해 츠루기는 무심히 넘겼지만, 카즈키는 묘하게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카즈키에게서 원기를 지켜내겠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자기 남편이 좋아도 그렇지. 이런 태도는 좀 아니지 않아?’
희연은 아버지에게서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을 받아서 성장한 엘리트라고 한다면, 카즈키는 체계적 훈련보다는 오기로 성장한 천재라고 할 수 있었다. 츠루기는 좋은 대련 상대이자, 목표는 될 수 있었지만 그녀를 이끌어 줄만한 인내심도 배려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기싫다는 오기와 천재성이 카즈키가 성장한 원동력이었다.
기본에 충실한 희연의 검술이 정도라면, 재능과 오기가 만들어낸 카즈키의 검술은 지극히 자유분방한 사도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러지 말고, 두 사람이 겨뤄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희연양도 대단한 검사지만, 제 딸도 저 못지 않은 실력자입니다. 한때 저도 천재소리 들었지만, 제 딸내미의 재능은 그걸 능가하지요.”
츠루기가 호탕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게 카즈키의 심사를 또 건드렸다. 츠루기보다 카즈키의 재능이 더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츠루기가 그 점을 질투한 것도 사실이었다.
검에 미친 어린애, 그게 카즈키의 츠루기에 대한 평가였다.
자신이 강해지고 나니까, 자랑스럽게 말하는게 은근히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고 츠루기 역시 카즈키를 그다지 아끼는 쪽은 아니었다.
적당한 대련 상대이자, 라이벌로 여기고 있었다. 카즈키가 자신보다 강해지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으면서도, 자신보다 강해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희연이라는 강적이 추가된 셈이었다.
카즈키는 물론이고 츠루기보다도 기본에 충실했다. 좋은 스승 밑에서 기초부터 착실히 단련해서 성장했다.
대인전의 경험은 부족하지만, 전쟁의 경험은 마츠모토 부녀를 훨씬 능가했다. 하비에와 싸우기 전에는 츠루기가 내심 방심하고 있었던 면이 있었다. 대인전에 대해서 많은 경험이 있어서, 희연을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존심은 하비에 앞에서 처참하게 박살났다.
그는 규격외의 상대와 검을 겨뤄본 경험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하물며 인간같지도 않은 괴물과 겨뤄보는 것은 생각도 못해봤다.
같은 검을 들고,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들과의 경험은 많았지만, 상식 밖의 능력을 상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적에 대한 경험은 없었다.
카즈키와 하비에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전의를 상실한 것은 그때문이었다.
카즈키는 츠루기보다 더 자유로웠다. 틀이 없는 자유분방함이 있었고, 그 때문에 예상외의 적에 대해서 츠루기보다 명백히 강했다.
하지만 하비에의 전법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하비에와의 전투가 끝난 후, 희연의 전투 기록을 열람했다. 그녀가 싸운 전투는 모두 데이터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방대해서 다 찾아보는 것은 무리였다. 지금까지 2년 이상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어진 경험은 결코 녹녹치는 않아 보였다.
카즈키와 희연을 싸우게 하는 것은, 츠루기가 희연을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비에와의 전투를 통해서 그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성장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은 결코 완성되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희연과 카즈키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희연은 마츠모토류 검사와 다시 검을 겨룰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희연은 마츠모토류의 세련된 검을 동경하던 변경의 도장 딸인 것이다. 아군이 되었으니 영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는게 당연한 거야. 많이 배우자.’
희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죽도를 들고, 카즈키의 앞에 섰다. 하지만 카즈키는 도장에서 준 죽도를 거부했다. 그리고 진검을 들었다.
“어차피 죽어도 살아난다며? 그럼 죽도는 필요없지. 너도 진검을 드는게 어때?”
“아바타는 그렇지요. 하지만 에인페리아는 거저 되살아나는건 아닐텐데요.”
“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걸. 하지만 내가 네게 질리는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카즈키는 처음부터 강하게 도발했다. 희연도 그 모습을 본 순간,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카즈키가 희연에게 질투심을 가진 것처럼, 희연 역시 카즈키에게 동경하는 마음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
희연은 무기 사랑을 이용해서 죽도로 카즈키의 진검을 내리쳤다. 카즈키의 애검이 가볍게 토막나버렸다. 상당한 고가의 검이자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이었다.
“이런. 미안해요.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고보니 엑스칼리버의 이능은 카즈키양의 본래 실력이 아니었지요? 빌려 쓰는 힘이라는걸 깜빡했네요. 미안해요.”
희연은 정중하게 사과하는 듯 교묘하게 염장을 질렀다. 카즈키는 약이 올랐고, 츠루기와 한상운, 그리고 원기는 두 여자의 싸움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원기는 물론이고 한상운조차 희연이 저렇게 감정적이고 호승심을 드러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젠장. 안해!”
카즈키는 짜증나는 듯이 검을 던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 옆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던 원기의 목을 잡아채서 들어올렸다.
“움직이지 마! 네 서방 목이 부러지는 수가 있어!”
카즈키의 말에 희연은 움직임을 멈췄다. 원기는 에인페리아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을 뿐더러, 갑자기 벌어진 돌발 상황에 당황했다. 마츠모토 부녀가 에인페리아로서 프레이야에게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원기의 정체가 프레이야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인만큼 그것에 의지할 수는 없었다.
‘페인 마스터리를 써야 하나?’
원기는 카즈키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 힘의 차이는 절대적이지만, 페인 마스터리를 사용하면 충분히 카즈키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카즈키의 손목으로 향하는 순간, 카즈키가 원기의 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강렬한 키스를 했다.
원기는 당황해서 경직되어 있었고, 카즈키는 긴 키스를 하고는 원기를 원래 앉아있던 자리에 떨치듯 내려 놓았다.
“고맙게 생각해. 내 첫키스니까.”
그렇게 선언하고는 카즈키는 외투만 챙겨서 도복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원기는 얼굴이 상기된 채 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희연이 원기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려서, 역시 키스를 했다.
“이건 그냥 소독이에요. 잡균이 들어왔을지도 모르니까.”
카즈키는 눈살을 찌푸리며 발끈해서 뭔가 말하려다가,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프레이야 진영에서 영향력이 큰 존재를 꼽는다면 조제성은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사실 원기의 사고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존재가 조제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제성은 유혜서와 천년해로할 계획을 세우고 움직였다.
그런 사고방식은 원기만이 아닌 주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희연이 첫경험을 백년쯤 지나서 가지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조제성의 영향이었다.
즐거움을 손에 넣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질리지 않고 오래 즐기며 사는가가 중요하다는게 조제성의 지론이었다.
고작 수십년을 살 인간과 수백년 이상을 살 그들이 같은 방식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이 조제성의 생각이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다.
희연은 백년쯤 후에나 관계를 가져볼 생각이었지만 남편이기 이전에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레이야를 속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리디아, 혹은 연하가 원기와 관계를 갖는다고 해도 별 상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카즈키는 달랐다. 카즈키에게만큼은 지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한상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없었던 유일한 것이, 승부욕이었다.
상대가 될만한 이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독하고 묵묵하게 검의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지고싶지 않다는 마음 속 깊이 우러나는 승부욕은 한상운이 생각하는 강한 검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습니까? 같이 술이라도 한잔 하러 가시는건.”
“오, 그거 좋겠군요. 그리고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강하게 반발하는 딸들과는 달리, 아버지들은 의기투합했다. 카즈키와 희연이 같은 극의 자석이라면, 두 사람은 다른 극의 자석과도 같았다.
“부탁이라니요, 말씀만 하십시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제 전속 트레이닝 코치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최근 느꼈습니다.”
“검성 츠루기의 개인 트레이너라니. 다시 없는 영광입니다. 꼭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츠루기와 한상운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손을 맞잡았다. 순식간에 죽이 맞아서 도원결의라도 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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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갑병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제성은 연구원들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수만명의 바니걸신자 집단 각성사태 이후로 프레이야는 신자를 늘리는 문제에 대해서 관대해졌다.
조제성이 필요한 인재들을 신자로 만드는데 관대해 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만명이 넘어가는 판에 일이백명 늘어난다고 별 차이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덕분에 조제성은 아스가르드의 비밀을 공유하면서 연구할 연구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초능력 사기꾼들은 가장 속이기 쉬운 존재로 과학자들을 꼽는다.
이들은 대단히 비판적으로 보이지만, 자신이 실험 혹은 이론적 절차를 통해 확인한 것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보일만큼 믿는 경향이 컸다.
그들은 실증되지 않은 것은 믿지않지만, 실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간단히 받아들인다.
프레이야의 속임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접한 이들은 아주 가볍고 강력한 신자로 전환되었다.
조제성은 그들을 이용해서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다.
“지그프리드라는 이 거대 로봇이 가능한 것은 바로 부유석 때문입니다. 현재 직립 로봇이 갖는 문제가 부유석만으로 간단히 해결이 됩니다.”
이족 보행 로봇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밸런스였다. 균형을 잡지 못하면 쓰러진다. 인간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문제가 있었다.
인간도 잘못하면 쓰러진다. 그런데 수미터에서 수십미터의 인간형 로봇이 쓰러진다면, 안의 파일럿과 기계장치가 무사할 수는 없었다.
지그프리드에게는 바로 그 문제가 없었다.
가슴에 있는 부유석이 몸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설서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느릿하게 사뿐히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똑바로 서거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마치 풀장에서 튜브를 낀 소년이 물속에서 걷듯이 적당히 땅을 밀어주기만 하면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정교한 컴퓨터 없이, 고도의 센서가 없이도 지그프리드가 마력로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때문이었다.
“문제는 없는건가?”
“문제는 많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움직임이 굼뜹니다. 지그프리드처럼 크면 슬금슬금 움직여도 꽤 빠르기는 합니다만, 민첩한 움직임은 기대하기 힘들지요. 하지만 부유석의 크기를 줄인다면 줄인만큼 민첩해 집니다. 그게 중요한 점입니다.”
“그렇군. 우리쪽은 컴퓨터를 통한 자세 제어를 사용한다는 말이지.”
“예. 그걸 통해서 쓰러졌을 때의 충격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이족보행병기의 현실화가 가능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 시작형입니다.”
조제성의 눈 앞에 4미터급 인형 병기의 모습이 보였다. 부유석이 없었기 때문에, 천정에 장착된 크레인에서 줄이 내려와 있었다.
“가슴에 부유석이 장착되어있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부유석을 장착할 공간도 확보되어 있습니다. 위의 크레인에서 내려온 줄은 부유석을 대신해서 위로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조제성은 시작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생각밖으로 부드럽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쓰러질 때의 충격도 크지 않았고, 무게에 비해서 지면에 가해지는 힘이 적어서 바닥의 손상도 적었다.
“바람에 약한 것은 아닌가?”
“지면에 고정시켜주는 힘 자체는 좀 부족합니다만, 질량 자체는 큽니다. 표면적도 작은 편이라서 그리 큰 영향은 받지 않습니다. 태풍급이 온다면 모를까 왠만한 돌풍에는 그리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남은 건 부유석 뿐이로군. 조달할 방법은 하나 뿐인가.”
조제성은 쓴 웃음을 지었다. 부유석을 만들 수 있는 신은 오직 오딘 뿐이었다. 아니 오딘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발하라는 신들의 방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량의 신성력이 동원된 대사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형 마법진에 대량의 신성력을 동원해서 일순간에 거대한 섬을 부유석 덩어리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프로펠라와 엔진을 본 오딘이 발하라의 일부를 캐서 비행정을 만들고 지그프리드를 만든 것이었다.
손에 넣을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오딘의 군대에게서 강탈하는 방법 뿐이었다.
“작전을 좀 세워 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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