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좀비충
조제성은 헬에게 서유리가 헬의 자리를 잇게 만들 후보임을 애초에 밝혔다. 어차피 헬이 눈치채지 못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속셈인가 헬이 경계를 하면서 살폈지만, 어느틈엔가 공포영화에 빠져들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허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헬의 지옥은 사실 완전한 지옥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영원히 인간의 영혼을 괴롭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의 영혼은 모든 자극에 익숙해져버리기 때문이었다.
고통에도 공포에도 후에는 익숙해져 버렸다. 마지막에 웃으면 된다는 말이 헬의 지옥에는 통용되는지도 몰랐다.
인간들을 이런 저런 수단으로 괴롭히고 두렵게 만들어도 나중에는 담담하게 해탈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도리어 헬을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래서 역대 헬들은 인간들이 최대한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도록 지옥을 운영하는데 집중했다. 그런 면에서 헬들은 공포의 연출자이자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터였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더 질겼다. 아무리 강한 충격을 줘도 언젠가는 회복해서 그냥 평범한 상태로 받아들였다. 익숙해지고 지겨워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대의 헬들도 삶이 지겨워져서 후대를 만들고 삶을 은퇴해서 무로 돌아갔다. 그래서 헬들은 최대한 공포를 연출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며, 그것을 살아있는 자들에게 보여서 선전한다음 그들이 공포에 익숙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인간들에게는 숨겼다.
발키리들을 유명한 죄인으로 변장시켜서, 아직도 고통받는 듯이 연출하고 있었을 뿐이다.
특히 헬의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은 역사상의 인물로 비유하면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비폭력 박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왠만한 고통이나 공포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과 공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식간에 득도해버렸다.
고통도 두려움도 도망치려고 할 때 커지는 법이라, 지옥의 효과는 죽은 이들을 벌하기보다는 산자들을 겁주는데 주로 쓰였다.
결국 겉만 번지르한
오딘이건 로키건 영원한 고통이나 영원한 두려움을 줄 수는 없었다. 영원이라는 것은 필멸자에게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오늘은 좀비 영화를 보지요.”
“좀비?”
“아프리카 전설이에요. 되살아난 시체에서 비롯된 건데 좀 B급적인 냄새가 강해요. 취향을 좀 타지만 컨셉이 독특해서 재미있어요.”
유리는 헬에게 흑백 좀비영화부터 보여줬다. 공포영화사를 꿰고 있는 매니아여서, 어떤 순으로 보여줄지가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 좀비라는게 이런거야? 별거 아니군.”
“좀 취향을 타는 편이지요.”
“이거 예전에 만든적이 있었어. 이거랑 아주 비슷한 거야. 하지만 쓸모가 없어서 버려졌지.”
“쓸모가 없어요? 좀비가 세상에 등장하면 무서울텐데.”
“전혀 쓸모 없어. 이곳의 인간들이 비정상인거지. 시체를 두려워한다는게 말이나 되는거야? 닭고기는 먹으면서 죽은 닭을 보고 기겁하는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
헬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실 프레이는 물론이고 펜릴이나 헬조차 지구의 현재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평화를 추구하면서 이룩해놓은 문화는 그들이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스포츠, 영화, 예술 등등은 정말 그들에게 있어서도 큰 즐거움이자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4백년을 살아온 헬은 최근 수십년간 삶에 지쳐서 슬슬 은퇴해서 무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려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최소 수십년 이상은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 세상에 간섭하려고 들지 않는 프레이야의 생각도 내심 마음에 들었다.
“시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좀비는 무섭지 않아요?”
“일단 좀비라는게 있다손 치더라도 너무 약하지. 공격이 고작 육탄공격에 입으로 무는게 고작이니까. 방어구만 조금 갖추면 상대가 안되지. 특히 에인페리아들도 있는데.”
헬의 말에 유리는 잠시 생각해본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구만 충실하게 갖추면 물어서 어떻게 해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오토바이 헬멧에 방어구만 전신에 둘러도 좀비들의 이빨에 당할 일은 없었다.
특히 에인페리아들이라면 힘도 상당히 강해서 좀비들 따위는 무기 대신 휘둘러댈 수 있을 터였다. 시체를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자는 전란의 세계라고 하면 시체라서 무섭다기보단 그냥 약자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좀비 게임이 많은 이유는 일반 인간들보다 사냥하기 쉽다는 것과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이유가 컸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감염되는 좀비를 만드는 거지요? 저주?”
“그건 아니고, 로키가 만든건 기생충이었어. 뇌에 서식하는 기생충이지. 뇌를 파먹으면서 성장하는거야. 그리고 알을 퍼트릴 즈음에는 숙주를 죽이면서 급격히 성장하지. 그리고 기생충의 몸 속에 인간의 심장 역할을 하는 장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로 죽어버린 심장대신에 썩은 피를 강제로 돌리는거야. 그럼 죽은 인간이라고 해도 머리통만으로 살아있게 되는거지. 뇌 대신에 육체를 조종하고, 자신의 몸으로 심장을 대신하는거야. 문제는 시신이 손상되고 부패되면서 약해지는데다가 인간만한 운동신경을 발휘할 수는 없지. 상대를 물어서 알을 상대방 몸속에 흘려보내는거야.”
“음. 정말 좀비랑 비슷하네요.”
“그래. 지금이라면 좀비충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지. 하지만 이미 수천년전에 무용하다고 폐기한 수법이야.”
“수천년 전이요? 그럼 지구에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건가요?”
“그렇지. 미드가르드 시절에 만들어졌던 거야. 현자회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헬은 담담히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공포영화 팬인 유리로서는 묘한 느낌이었다. 진짜 좀비가 등장한다고 생각하니 기대도 되지만,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유리는 장수한에게 헬에게 들은 일명 ‘좀비충’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헬과 함께 ‘전설의 고향’ 시리즈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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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라. 뇌를 파먹고 뇌와 심장을 대체하는 기생충이라니. 정말 거인족다운 발상이로군. 우리가 얻은 정보엔 그에 관한 건 없지 않나?”
“그렇긴 한데 말이지요. 현자회에 대한 정보가 온전히 넘어온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현자회 애들이 관심을 가질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생화학 병기의 일종이 될 수 있으니 말이지. 대처 방법은 없는건가?”
“미리 전용의 구충제를 먹으면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에인페리아들이라면 좀비들 정도는 별 문제가 없지요. 놀원이라면 구충제만 있으면 썩기전에 다 먹어치울지도 모르지요. 다만 전용의 구충제를 만드는 방법은 불명입니다.”
“생각해보면 생화학병기치고는 대처하기 쉬운 종류의 것이긴 하군. 감염 속도도 조심만 하면 급격하게 퍼지지는 않을테고 말이지. 아니야! 극히 위험하군.”
“예? 기생충이 위험하다고요?”
조제성의 반응에 장수한이 의문을 표시했다. 기생충 종류가 생화학적 테러에 사용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식품 테러야. 음식물에 미리 넣어놓으면 사람들은 먹게 되어있지. 당장 표시가 안나기 때문에 독극물보다 더 위험할 수 있어. 이미 조리된 음식 등에 섞는다든지, 초밥이나 회 같은 날 음식도 꽤 많이 유행하고 있지. 결정적으로는 수도 등을 이용할 수도 있어.”
“아, 그렇군요.”
전용의 구충제밖에는 통하지 않는다면, 생각보다 확산시키기 쉬울 수도 있었다. 조제성은 왠지 이 좀비충이라는게 병기로서 꽤 강력한 물건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자회는 잠적중이지만, 그렇기에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잠적하기 전에 현자회는 자신들이 가진 무기와 기술을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팔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아폴로가 마츠모토 부녀를 미국에 팔았듯이 다른 현자회의 인간들도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자금 마련을 위해 다수의 기술을 팔아먹었다.
미국에서 사이보그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좀비충이라면 미국은 물론이고 테러리스트들이나 반미 국가에 팔아먹어을 만한 것이었다.
“골치아프게 되었군. 전용구충제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게. 펜릴도 혹시 알지 모르니까.”
프레이야 여신은 현실 세계에 간섭하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에 빠지길 원하지도 않았다.
조제성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좀비에 대해서 대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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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이라고요? 너무 깎은거 아녜요?”
카즈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육체는 미의 여신 프레이야가 만든 에인페리아의 육체였다. 희연이나 연하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은 외모였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벌어먹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신분은 새롭게 날조되는 것이니까요.”
카즈키와 츠루기도 게임 캐릭터를 이용하게 되면 육체가 남는다고 할 수 있었다. 츠루기의 전투용 육체는 연예계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카즈키의 육체라면 충분히 쓸모가 있었다.
게다가 희연에 대한 경쟁심 때문에 희연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카즈키는 계약에 동의했다. 다만 나이가 희연보다 다섯살이나 적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제 나이는 카즈키가 희연보다 조금이지만 연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팬들은 젊고 어릴수록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계약 내용좀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매니저가 계약서를 보여줬다. 계약 자체는 카즈키에게 불리할 내용은 없었다. 어차피 뒤에는 장수한과 조제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본체로 돌아와서 허가없이 연애 금지. 허가없이 연예활동 금지? 연예활동 금지는 뭐지요?”
“아, 그건 연하양 때문에 첨가된 겁니다.”
매니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계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연하가 중학시절 양궁부의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다. 부상을 입기 전에는 꽤 밝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노래방에서 친구들이 톱아이돌인 연하의 노래를 듣고 싶어한 것이 문제였다. 톱아이돌이 생으로 불러주는 노래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문제는 연하가 가사조차 못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나오는 기사 등은 스크랩까지 해뒀지만, 쑥쓰럽다는 이유로 발키리가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노래방에서 시도해 본 결과 예상밖으로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 점수만 낮은게 아니라, 누가 들어도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하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연습했다. 친구들 앞에서 멋지게 불러서 오명을 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몇가지 일이 겹치면서 친구들과 노래방에 갈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스케쥴표에 대규모 콘서트가 들어 있었다.
모처럼 연습했으니, 멋지게 직접 불러보겠다고 결심한 그녀는 과감하게 누구와도 상담하지 않고 콘서트에 도전했다.
그녀의 발키리는 당연히 그녀의 지시를 따라서 그녀에게 육체를 돌려줬다. 그리고 사건은 터졌다.
연하의 육체는 최고 수준으로 발키리가 단련해 놨지만, 그녀의 노래솜씨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가성까지 포함하면 10옥타브 이상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부르는 발키리와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조종해놓은 노래방의 반주와, 인간을 초월하는 역량을 과시하도록 철저히 준비된 콘서트의 반주는 완전히 달랐다.
타오르던 콘서트장의 열기가 가라앉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처음부터 삑사리가 나기 시작해서, 음정은 물론이고 박자까지 혼란이 왔다. 백밴드가 중심을 잡기는커녕 그녀에게 휘둘려서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뻔뻔하게 노래를 불러댄 연하의 근성은 알아줄 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큰 화제가 되었다. 톱아이돌이자 신이 내린 디바로 유명한 연하가 알고보니 립싱크 가수였던 것 아니냐라는 의혹제기에서부터, 준비없이 콘서트에 올라온 무성의함을 욕하는 기사도 있었다.
반면에 연하의 새로운 컨셉트가 아닌가 하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츄어 같은 순진함을 보여준 팬서비스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콘서트장에서 부른 연하의 노래가 따로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팬들에게 있어선 소중한 보물 영상과 음악이 되어버렸다. 어떤 콘서트에서도 조금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던 그녀가 ‘자연스러운 여고생’같은 느낌으로 불렀다는게 호평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렇게 원만히 수습되는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고생이 따랐다.
“그거 멋지네요. 왜 제가 그런 멋진 이벤트를 피해야 하지요? 놀원도 자기 하고 싶은데로 하지 않아요?”
카즈키는 매니저의 설명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컨셉트가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럼 제 컨셉트도 그렇게 해주세요. 좋은 것 배웠네요. 재밌겠다. 갭모에라는 것도 있는 법이지요.”
카즈키의 확고한 말에 매니저는 울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희연과 연하, 원기의 위장용으로 사용된 연예사업이지만, 발키리의 연기력을 비롯해서 많은 능력이 향상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카즈키는 능히 연하를 능가하는 재목이 될 거라는 판단에 일부러 연령도 15살로 줄여놓은 것이기도 했다.
“그럼, 알아서 잘 부탁해요.”
매니저는 카즈키가 강적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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