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손절매
“자, 이제 게임의 시작인건가.”
카즈키는 가볍게 어깨를 풀면서 말했다. 그녀에게 이 짜고치는 전투는 그저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연하의 공중 저격을 피하면서 츠루기를 해치우고 동시에 용신족이라고 불리우는 도마뱀 괴물들을 학살하면 되는 것이었다.
죽음의 긴장이 없는 상황이니,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조제성은 이 전투의 승패는 그리 중요치 않다고 말했기에 카즈키는 부담없이 츠루기와의 승부를 즐길 셈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낸 이가 있었다.
‘어라? 얘가 이런 느낌이었나?’
그녀는 희연의 존재감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변화되지 않았다. 붉은 여우가 되면 전투력이 조금 상승하는 정도였고, 그런 상황에서도 여러 차례 겨뤄본 바 있었다.
희연의 존재감은 그녀가 느꼈던 평소의 느낌보다 조금 더 진중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곁에 있는 이의 존재감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원기가 은빛 호랑이가 된 모습에는 익숙해져 있을 터였다. 신체적으로 좀 더 묵직해졌지만, 그녀의 평가는 얼굴이 좀 더 박력있어졌을 뿐, 기술적으로는 거칠어졌다는 평가였다.
희연에게 검술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호랑이 형태가 되면 세련된 검술의 움직임에서 멀어졌고 그래서 카즈키로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껴왔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희연을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감이었다. 카즈키에게는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두려운 느낌을 주는 그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냐? 저 놈. 뭐 잘못먹은거 아냐?”
카즈키는 희연의 곁에 다가가서 물었다. 희연은 원기를 살짝 돌아보고는 미소지었다.
“확실히 평소보다는 ‘조금’ 더 믿음직스러운 느낌이네.”
희연은 카즈키가 원기의 진면모를 본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소지었다. 카즈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기는 지켜야 할 이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대단히 컸다. 실전에서 싸우는 모습을 봤다고 하지만, 현자회와 싸우던 시기에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없었다.
전투에 참가한 엘프들은 거의 모두가 게임 캐릭터들 뿐이었다. 설사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고 해도 발키리로 되살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원기는 최선을 다하지만, 전력을 다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저 남들보다 험하고 위험한 곳에 먼저 뛰어들어가서는 장렬하게 전사하는 역할을 주로 할 뿐이었다.
사실 그런 원기는 희연에게도 그리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희연은 원기가 엘프들이나 다크엘프들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기의 진짜 모습은 남을 위해 죽을 때가 아니라, 남을 위해 죽을 수 없을 때 발휘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아더왕의 조언이 있기 전에도, 그는 한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한칼이라도 더 얻어맞아야 하는 순간에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뿜어냈다.
조제성은 용신족과 수인족들 가운데 갱생이 어려운 종자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그들을 화살받이로 처리할 생각을 했다.
원기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조차도 그는 지키고 싶었다. 한명이라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이 기백이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 강한 존재감이 카즈키를 압도한 것이었다.
방어기술이 좋고 질기기만 한 덩치빨 말고는 볼 것없는 전사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느껴졌다.
“설마…… 여신님?”
카즈키의 무의식적인 한마디에 희연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반응에 카즈키도 되려 놀랐다.
“정말인거야?”
카즈키는 당황하면서도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원기를 보면서 조제성이나 희연 등이 미묘하게 감싸고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즈키가 보기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의 외형이나 재능 모든게 ‘잘난’ 그녀가 보기엔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받은 느낌은 강인한 장수라는 느낌과 함께 새끼들을 지키려는 암호랑이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지키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이 느껴지면서 카즈키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이보그가 된 것도, 현자회로 싸운 것도, 마침내 프레이야 여신에게 의탁하게 된 것만으로도 모두 행운으로 여겨졌다.
자신들을 아끼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냥 흘러들어오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굳이 말이 아니라도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그냥 서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존재들이 있었다.
카즈키는 자신의 라이벌이 허튼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더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원기는 카즈키와 희연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듣지 못했다. 아니 눈치채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속은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수인족들도 지켜야 했지만, 용신족들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오딘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용맹하게 용신족 병사들을 죽여야 했다.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다.
조제성의 주문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수인족과 용신족들이 어찌되든 상관말고 닥치는대로 전장에서 날뛰는 것이었다. 비행정을 빼앗으면 그것대로 좋고, 부수게 되면 부수는대로 좋았다. 중요한 것은 결코 짜고치는 전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수인족들은 야음을 틈타 숲속을 전진하고 있었다. 원기는 수풀을 헤치고 가면서, 냉정할 수 없는 자신에게 최대한 잔인하고 냉정해지도록 타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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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연하는 바리어 윙을 사용해서 하늘로 날아 올랐다. 희연과 원기가 이끄는 수인족 부대가 나타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보게 될 지는 예측한 바 있었다.
그녀는 화약이 담긴 화살을 준비했다. 수인족 후방에 몇발 떨궈주면, 수인족들은 더 필사적으로 돌격해 오게 될 터였다.
하늘을 날며 아래쪽을 바라보자, 과연 희연과 원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완벽히 커버할 만한 숲은 항구 부근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게임 시작인가.”
그녀는 활에 고정시켜 놓은 지포 라이터를 켰다. 화살에 달린 폭약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좋도록 고정된 것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멀리서 흙먼지가 보였다. 항구를 향해 달리는 원기측 군세의 먼 뒤편이었다. 로키의 대형 몬스터들 몇마리가 보였다. 로키의 몬스터 군단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불을 끄고 황급히 본진으로 내려섰다.
“수인족의 후방, 그러니까 북서쪽에서 로키의 몬스터 군단이 습격해 오고있어. 어떻게 된거지?”
그녀는 용신족들에게 묻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파티채팅을 이용해 조제성과 장수한에게 묻는 것이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오딘이 우리에게 원군을 보내 준다고 합니다. 곧 합류해서 적을 치겠답니다.”
오딘측 병사가 황급히 달려와서 보고했다. 비행정과 비행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함대의 모습이 동쪽에서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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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성과 장수한은 보고를 듣는 순간, 바로 마음을 정했다.
원기와 연하의 부대가 충돌하는 순간을 노려서 후방에서 로키와 오딘이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딘과 로키가 손을 잡았습니다! 연극은 물건너 갔습니다! 당장 비행정을 탈취해서 도망치세요!”
거침없는 조제성의 말에 장수한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와 오딘이 손을 잡았다고 판단은 내렸지만, 혹시 로키와 오딘이 도우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결단을 늦추는 것이 보통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미련한 짓이 되는 것이었다.
로키가 들인 공을 생각한다면, 이 상황에서 오딘과 손잡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로키정도 된다면 이 상황에서 오딘과 교착 상태를 계속 유지해 봐야 좋을게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말그대로 로키는 손절매를 시도한 것이었다.
로키와 오딘이 혼돈의 대륙에서 백중세라고 하지만, 펜릴과 헬의 실종은 로키에게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로키로서는 오딘에게 양보하고 제 세력을 추수려야 할 상황이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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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래, 상황은 단순해 진거야.’
원기는 머리 속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조제성과 장수한은 대군을 지휘하는데 어울리는 존재였다.
현재 규모에서 순간순간 바뀌는 전황을 지휘하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츠루기와 카즈키의 전쟁 경험은 극도로 부족했다. 십수명 단위의 유닛 전투와 수백명 단위의 국지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지휘를 해야 하는건가.’
원기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망설일 틈은 없었다.
“위장은 해제한다. 적은 로키와 오딘! 우리는 포위되었다! 항구를 빠르게 제압하고 비행정을 탈취해서 도주한다! 익룡 부대! 로키의 몬스터 부대를 공격해서 발을 묶어라! 연하는 지그프리드를 공격해!”
조제성의 빠른 결단이 시간을 벌어주었다. 만약 오딘과 로키가 정말로 손을 잡았는지 확인하려고 들었다면 꼼짝 못하고 당했을테지만, 약 삼십분의 시간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조승상님! 현 시점에서 주요 목표는 부유석 확보와 탈출,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혼돈의 대륙은 이제 끝났다고 봐야 할겁니다. 소탕당하기 전에 최대한 사람들을 빼내야 할겁니다. 그리고 부유석을 확보할 마지막 기회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오딘이라면 비행정들이 탈취당하지 않도록 아마 손을 써 뒀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원기의 지시에 따라서 연하와 같이 비룡을 테이밍한 엘프들이 로키측을 향해 날아올랐다. 고작 다섯명에다가 비행 가능시간은 5분 남짓이라서 큰 활약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혼돈의 대륙은 덥고 습한 지역이 많아서 불을 질러서 접근을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연하는 바리어 윙을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테이밍 몬스터와 합체하는 5분간은 2배 이상의 스피드로 날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외의 시간도 날개와 바리어 윙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비행 병력이 있는 오딘의 부대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 가까웠다.
오딘의 비행정에는 거대 까마귀를 탄 궁기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묵직한 걸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지그프리드의 머리 주위를 맴도는 까마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연하가 가진 전통의 화살은 스무발이었고, 까마귀들은 그 수를 넘는 듯이 보였다.
“이거 죽으라는 소리인데.”
연하는 하늘을 날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명사수였지만, 하늘을 날면서 쏘는 화살은 그리 좋은 무기가 아니었다. ak소총 조차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신도 적도 고속으로 비행하기 때문이었다. 바람을 읽는다지만 수초 후의 바람까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가 읽는 것은 현재의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적을 죽이는 것보다는 시간끄는걸 우선해.]
원기의 추가 지시가 있었다. 연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쉽지 않을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하 역시 전장의 원기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원기는 최후의 순간까지 버텼다. 그렇게 죽어가는 것은 설령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수차례 전사를 경험했지만, 원기 같은 장렬한 전사는 경험해 본적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까마귀 부대에 다가간 순간, 몬스터 합체를 활성화 시켰다. 그리고 바리어 윙을 펼친 다음 빠른 속도로 까마귀 부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리어 윙은 무기사랑이나 엑스칼리버와는 달랐다.
까마귀 두마리에 부딛치는 순간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까마귀들의 목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고 두 마리가 격추되었다.
“여섯장 남은 셈인가, 아직 두번은 더 쓸 수 있겠군.”
바리어 윙은 비행에 사용할 수 있는 소모형 실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가 한번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약 열장 정도였지만, 비행을 하는 중에도 소모되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여덟번 정도 막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부 공격에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녀는 다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마리를 격추하는 것으로 끝났다. 옆에서 뛰어든 오딘의 기사가 검으로 후려쳐서 바리어 윙 하나를 소모시킨 것이었다.
‘고작 세마리라니.’
연하는 다시 비행하면서 이번엔 활을 들었다. 남은 시간은 약 1분, 그녀는 화살을 쏴서 기사 하나를 제거했다. 하지만 기사가 죽어도 까마귀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에 흥분한 까마귀가 기사의 시체를 떨구고 그녀를 무차별로 공격하려고 쫓아왔다. 기사가 없는 만큼 더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연하는 황급히 화살을 날렸지만, 치명상이 되지는 않았다. 인간을 태우고 날을 수 있는 거대 까마귀에게 화살 한두개는 그리 큰 위협이 아니었다.
연하는 다시 날개 한장을 소모해서 까마귀를 공격했지만, 까마귀는 부리로 날개를 쪼아서 부숴버렸다. 부리에 화상과 충격파를 먹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하 역시 까마귀가 부리로 쪼는 것을 보는 순간 날개 한장을 더 써서 목을 쳤다.
‘시간도 제대로 못벌겠는걸.’
연하는 몬스터 합체 활성화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 활성화 된 동안은 압도적인 비행 능력이 발휘되었지만, 꺼진 상태에선 까마귀들이 더 비행성능이 뛰어났다.
그녀가 의지할 것은 오직 바람 읽기의 능력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의지해서 지그프리드를 향해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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