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315화 (315/497)

315화 스티브

정령들의 대여 계획은 정령들의 환영을 받았다.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여신과 자신의 종족들을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대여됨으로써 여신과 자신의 종족들의 안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최첨단 병기에 장착이 된다면, 적어도 그 병기는 여신을 향해서는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진짜 계약이 필요했다. 정신적으로 깊은 부분까지 연결되는 계약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상성이 맞지 않으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기계를 조종하기 위한 수준의 계약은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무의식 일부를 빌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상대에 따라서 불유쾌한 경험이 될 수는 있었지만, 단기간의 임시 계약에서는 그리 큰 문제는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스티브는 모든 테스트 파일럿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미국의 파일럿들은 기본적으로 정령의 존재에 대해 알고,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스티브만큼 마음속 깊은 곳까지 열어놓은 이는 없었다.

그는 해리엇을 존경했다. 엄격한 군인이자 전사로서 일생을 바쳐온 그녀의 삶을 그는 존경하고 흠모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극히 여성스러운 면에 반했다. 그녀는 섬세했고 주의깊었으며 배려할 줄 알았다.

동시에 그녀의 여성스럽지 않은 면에 반했다. 그녀는 꾸미는데 관심이 없고, 임무를 수행하는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사랑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극히 건조하고 말 그대로 ‘Cool’했다.

여자들의 변덕스러움과 난해함에 질려서 연애를 반쯤 포기하고 있던 스티브에게는 말 그대로 이상형, 아니 천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는 해리엇을 안타깝게 여기고, 해리엇이 무엇이든 할 수 있게끔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이 해리엇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리엇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내게 이런 파쿠르의 실력이 생길 줄은 몰랐군.’

한국에서는 영화 제목 탓에 야마카시라고 잘못 알려진 스포츠인 ‘파쿠르’는 본래 전투를 위한 훈련이었다.

다양한 장애물들을 주파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프랑스의 훈련 ‘파쿠르 뒤 콘바탕’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 소위 흑형들의 운동 능력을 흡수하는 형태로 진화시킨 파쿠르 팀 ‘야마카시’(콩고어로 초인이라는 뜻)가 만든 영상으로 유명해졌다.

현재는 화려한 몸놀림으로 거리에서 예술을 펼치는데 주력하는 프리런닝과 실용적인 몸놀림으로 목표지점까지의 주파를 목적으로 하는 파쿠르로 나뉘어져 있었다.

파쿠르를 익스트림 스포츠가 아닌 전투기술로 여기는 이들은 바로 이런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수부대의 훈련이나 유격 등에서 장애물 주파 훈련을 하는 것이 일종의 초보적인 파쿠르라고 할 수 있었다.

숲에서, 나무 위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활을 쏘는 엘프의 능력은 말 그대로 인간을 초월한 초인의 능력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능력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걸을 수 있듯이, 의식하지 않아도 타자를 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장애물들을 물흐르듯이 미끄러져 나갈 수 있었다.

본래 특수부대 소속이고, 저격수로서의 훈련도 받은 그로서는 자신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능력만으로도 그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동성을 지닌 스나이퍼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저격의 생명은 자리잡기와 이동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동 능력이 뛰어난 저격수는 암살 뿐만 아니라, 일반 전투에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리엇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는데.’

미국측은 예외적으로 그에게 해리엇을 얻도록 시도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령칩 없이도, 정령 계약을 통해 정령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미국측에서 확인한 상태였다.

코드네임 ‘승상’이 미국측과 교섭하는 단계에서 정령에 대한 정보들을 전해준 덕분이었다.

해리엇은 고도의 저격술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령으로서 관측수의 역할까지 해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벽을 통과해서 내부의 정보까지 확인해 줄 수 있었다.

대테러는 물론 인질극 등 다양한 범죄에 대처할 수 있는 만능의 저격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저 해리엇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렇기에 블러디 라인 2에서 벌어지는 리베로 리그를 보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특히 전날에 벌어진 리베로 리그에서 해리엇을 비롯한 정령들은 평소의 SF적인 컨셉의 쫙 달라붙는 슈트가 아니라, 비키니에 가까운 판타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정령들을 눈요기감으로 삼는게 너무 불쾌했다.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제 의상은 너무 대담하더군요.”

[아, 이 옷 말이야?]

군복 스타일이던 해리엇의 옷차림이 판타지 스타일의 비키니로 바뀌었다.

[맘에 들면, 이 차림으로 있어도 상관 없어.]

“음, 전 너무 노출이 심해서 달갑지 않군요.”

[이미 죽은 사람인데 모양새 따위 신경쓸 필요 있나? 옷을 입고 있는 것도 난 웃기다는 생각을 하는데 말이지. 모양새에 치중하는 윗 분들이 있어서 골치아프네.]

“윗분들이요?”

[그래. 우리 상사들이라고 해야 하나? 한 사람은 마법소녀 매니아고, 한 사람은 밀리터리 매니아야. 그리고 책임지는 분은 판타지 매니아지. 그분들이 지시하는데로 입는다고 해야 하나? 보여지게 되어있어.]

정령들의 담당은 장수한이었고, 그를 보좌해서 ‘팔아먹는’ 담당은 찬균과 호철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분들이 벗으라고 하면 벗어야 하는 겁니까?”

[그건 안돼. 벗으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이 되어버린다고 하더라. 여신님도 싫어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 아! 게임 말이로군요. 지금은 해당되지 않는 것 아닌가요?”

[그도 그런가. 뭐 죽은 유령이 무슨 차림을 하든 무슨 상관인건지 난 모르겠네. 죽은 사람이 새끼를 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사랑, 결혼 등을 중시하는 문화는 사실 그리스도교적인 문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비그리스도교권에서는 결혼의 의미를 그렇게까지 깊게 두지는 않았다. 일부다처도 흔하고, 여성의 권리에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낳기 위해 사회가 강제 결합시키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

아스가르드에서는 생존을 위한 번식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특히 엘프들은 성욕 외에도 대부분의 욕구가 희박한 편이었다.

해리엇의 경우에는 뛰어난 전사였기 때문에, 번식 임무에서 제외되었다. 진화를 위해서라면 뛰어난 전사가 더 많은 자식을 남겨야 할지도 모르지만, 생물의 변이와 진화를 강제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아스가르드에서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그녀가 몇 명의 자식을 낳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짝을 가진 적 없는 싱글이었다는 사실이 기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인간은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어요.”

[번식 불가능한 대상에게 발정하는 건 좀 어떨려나.]

스티브는 은근한 사랑고백일 셈이었지만, 해리엇이 ‘발정’이라고 단정짓듯 말하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에 익지 않은 기체들이 보였다.

‘아, 리그 우승자들인가.’

수일 내에 리그 우승자들이 리그전 시범 리그에 참가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 아직 미국측 정식 레귤러들이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게임쪽 우승자들일 것이라고 스티브는 판단했다.

스티브는 최근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고, 게이머들에 대해서는 반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봐. 혹시 실전 형식으로 나와 붙어보지 않겠나? 선배로서 리베로 리그라는게 어떤 건지 가르쳐 주지.”

스티브의 선언은 외부 스피커를 통해서 밖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목이 그와 신입들에게 쏠렸다.

스티브는 단독으로 러시아 측의 다섯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강자이기도 했다. 러시아 측에선 당황했지만, 학습형 컴퓨터의 성능차이라고 리그 사무소쪽에 불평만 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 강자가 신입들에게 으름짱을 놓는 상황이라,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마침 잘되었군.”(上等じゃないか)

젊은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발언에 답하듯이 튀어나왔다.

“일본인인가?”

[잘되었다는군. 그리고 ‘이왕이면 한꺼번에 다덤벼라. 양키들.’이라고 하는데?]

“미쳤군. 일본 젊은 애들이 잘 걸린다는 그 병 환자인건가?”

[음. 유감이지만, 지금은 네가 그쪽인 것 같은데.]

해리엇의 말을 스티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해리엇은 일본인 소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프레이야의 최강 에인페리아인 희연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비슷한 타입의 소녀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티브에게는 승산이 아예 없었다.

[저쪽에서 말하는데로 다섯명이서 도전하는게 어때? 그럼 좀 해볼만 하지 않을까?]

“무슨 소립니까. 절 너무 무시하시면 안되지요. 게임만 하던 멍청이들에게 진짜 세상이라는걸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훗. 재밌네. 네가 저들에게 이긴다면 정식계약을 해줘도 좋아.]

“정말입니까?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일대 삼으로 싸우자고 하면 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저들 중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이긴다면 충분해.]

“그럼, 한번이면 충분할 겁니다. 전의가 싹 날아가버릴 테니까요.”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체를 몰아 전면에 나섰다. 일본인 소녀도 성큼성큼 걸어서 연습장 중앙에 섰다. 그리고 리베로를 위해 만들어진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스티브가 자세를 갖추자,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들어왔다. 스티브는 예상 밖의 예리함에 살짝 감탄했다.

“느려.”

스티브는 물흐르듯 가볍고 부드럽게 피하면서, 손목을 잡아채서 카즈키의 검을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다리를 걸었다. 그와 함께 카즈키의 기체는 보기좋게 바닥을 굴렀다.

아니, 바닥을 구르면서 목이 부러졌고,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팔은 어깨부분에서 부러져서 스티브의 손에 들려있었다.

“봐요. 이정도 쯤은 할 수 있다고요.”

스티브가 미소를 지으며 해리엇에게 말했다. 해리엇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카즈키도 정령도 리베로를 조종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걸음마 단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반면 해리엇은 스티브의 전면적인 협조 덕택에 리베로 조종에 있어서는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방 구석에서 게임만 해본 녀석들이 뭘 안다고 까부나.”

스티브는 외부 스피커를 향해서 비웃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발언은 원기의 심사를 건드렸다. 아스가르드어에 통달한지 오래된 터라,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번엔 제가 상대해 드리지요. 게임만 해온 사람으로서 듣고 있을 수 없군요.”

원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리베로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희연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카즈키의 기체를 일으켜 세웠다. 요란하게 나가 떨어졌지만, 카즈키는 무사했다.

리베로의 체급은 비탑승형인 소형과 탑승형인 중형, 그리고 중형을 넘어서는 대형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리베로 리그에는 탑승형인 중형으로 약 7미터급의 기체가 사용되었다. 인간이 탑승하지 않으면 박진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에서였다.

그로 인해서 내부의 인간을 충격에서 보호하도록 아티팩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좀 생각좀 해라. 상황 파악도 못하고 덮어놓고 싸우려고 드냐.”

희연은 카즈키에게 핀잔을 주었다. 카즈키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유쾌한 기분이었다. 불리한 조건에서 져보는 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충동적이고 승부를 즐기는 쪽이었다.

“넌 이길 수 있어?”

“적어도 지금 상태로는 무리야.”

희연은 단정짓듯이 말했다. 희연은 머리회전이 빠르고 상황 판단이 정확한 타입이었다. 득이 되지 않으면 싸움을 걸지 않는 쪽이기도 했다.

스티브의 기체는 완전히 인간을 넘어선, 엘프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문제는 희연과 카즈키는 운동신경이 좋다고 하지만, 엘프 같은 유연성이나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움직임은 기본적으로 엘프보다는 인간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반면 전투 센스와 기술은 천재적 영역이었다. 그래서 엘프들도 감히 따를 수 없었다. 문제는 이 영역을 리베로를 움직이는 엘프가 따라가지 못했다.

스티브가 엘프의 조종에 맡겨서 스티브의 무의식 영역을 엘프가 개발한 것처럼, 엘프가 그들의 의식적인 조종을 따름으로써 전투 센스를 습득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엑스칼리버나 무기사랑의 이능을 사용할 수 없는 만큼, 리베로를 키워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원기는?”

“그의 강함은 우리랑은 성격이 다르니까.”

그리고 원기와 스티브의 기체가 굉음을 울리며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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