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토르
신근호의 배신을 위장한 전향으로 대량의 리베로와 생산시설, 그리고 기술자들이 넘어갔다.
위장을 위해서 신근호는 다수의 엘프 경비병들을 학살했다. 엘프 경비병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자인 신근호에게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수일 전부터 게임 캐릭터로 경비를 서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이 죽은 순간, 메시지로 부활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받고 시체를 바닥에 남겨둔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신근호의 작전을 위해 투입된 토르의 성기사들은 영문도 모르는채 죽어가는 엘프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작전이 성공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그마치 50명이 넘어가는 엘프들이 자신들의 손에 죽어갔기 때문이었다. 엘프들이 사망하면 대부분 정령으로 부활한다는 사실은 다른 신들에게는 알려진 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들이 대량으로 죽는 상황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다. 수명이 다한 엘프들이 엘프들의 마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상황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엘프들이 정령화되어 프레이야 진영에 다시 합류하게 되는 것이었다.
프레이야가 엘프를 끔찍하게 아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없는 만큼, 토르 측에서도 신근호의 배신이 진짜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배신이 진짜든 아니든 그를 우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단물만 빼고 제거하는 대신에 쓸모가 있을지 두고 본다는 것으로 태도가 바뀐 것도 사실이었다.
신근호는 게임 캐릭터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죽는게 끔찍하게 싫었기 때문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길을 찾아내고, 연기를 잘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필요하다면 비굴한 아첨꾼도 카리스마 있는 보스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연기를 했고, 토르를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엄청난 장소로군.’
거대한 신전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다. 리베로처럼 거대한 거인들이 오가는 것이 더 자신을 왜소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토르님을 찬미합시다.”
한 근엄한 모습의 거인 에인페리아가 외치자, 신전에 들어찬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땅에 쳐박듯이 엎드려서 무언가 정해진 듯한 기도를 읊기 시작했다.
신근호 역시 주변의 눈치를 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목덜미를 거대한 손이 가볍게 잡아채서 끌고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들통난건가?’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 그는 작은 회의실에 던져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투명한 근엄한 사내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시스틴 성당 천정화, 천지창조에 그려진 신의 모습과 비슷했지만, 호화로운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토르로군. 대체 왜 이런 식으로 대면하게 된거지?’
고문이나 신문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조승상이라고 했던가? 재미있는 선물을 보냈더군.”
신근호는 뜨끔했지만, 입을 다물고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눈치는 비상해서 거짓말이 통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으면 넘겨짚는 것일 수도 있어.’
“걱정할 필요 없다. 속아 넘어가 줄 테니까 말이지. 아마 오딘도 속아 넘어가 줄 것이다. 선물은 잘 받았다.”
토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지만, 신근호는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오, 오딘의 눈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 멍청한 짓거리를 하는 것도 그 얍삽한 놈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니까.”
토르의 말에 신근호는 고개를 들었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알을 굴리면서 소심한 모습을 보였다.
“네 녀석이 불사의 존재라는 것을 모를 것 같나? 아마도 엘프들도 모조리 그 불사의 비법으로 되살렸겠지. 굳이 약한척 할 필요는 없다.”
신근호는 토르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천공의 성좌라는 만능 CCTV에 대한 대비책으로 영화에서 흔히 보는 듯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꽤 오래 전부터 눈치챈 듯한 분위기였다.
[당황하지 마.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다. 상대가 저렇게 말한다고 인정하지 마. 그리고 어차피 넌 부활된다고 해도 돌아오기는 쉽지 않아.]
조제성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조제성의 말대로였다. 신근호는 게임 캐릭터를 사용하는 이상, 절대로 억류되거나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고렙 선공몹 필드에 저렙 캐릭터로 뚝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부활 능력만 믿고 돌아가기엔 정말 힘들 터였다.
“저는 어리석은 일개 잡졸이라, 신들의 지혜를 감히 넘볼 수 없습니다.”
“후후, 그렇게 나오는군.”
“혹시 원하시는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프레이야 진영에 남겨진 제 ‘협력자’가 정보를 캐올 수 있을 지 모릅니다.”
신근호는 조제성의 메시지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달했다.
‘속고 속이는게 아니라, 서로 속아주는 척 하는 건가. 젠장 어려운 세상이로군.’
신근호는 진땀을 흘렸다. 상대가 뻔히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인정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상대가 잘못알고 있다고 밀어붙여서도 안된다.
‘왜이래? 선수끼리’같은 식으로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군. 그대가 가져온 리베로라는 강철 갑옷의 크기는 약 7미터더군. 혹시 4미터급 강철갑옷용의 무기에 대한 정보가 없나?”
“아, 있습니다. 약 일주일 뒤에 전선으로 보내지는 보급 열차에 4미터급 거인이 쓸 수 있는 무기들이 실려있습니다. 그걸 강탈하시면 됩니다.”
“호오, 그런가? 그 열차에 총기와 화약 등, 대공 무기가 포함되어 있으면 좋겠군.”
“물론 그 무기들로 가득찬 열차입니다. 다만, 그 열차는 한달 뒤에 출발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열차 강탈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려면 적들을 방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토르님과 티르님의 병력들이 마을을 습격한다던가, 민간인을 공격하는 일이 생기면 경계가 삼엄해 질 것 같습니다. 티르님에게 필요한 물자가 실린 열차도 있을지 모릅니다. 토르님께서 생색을 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군. 국경 지대에서 함부로 민간을 약탈하는 것은 금지시키도록 하지. 열차 강탈이나 창고를 습격하는게 더 중요하니까 말이지. 열차 강탈과 창고 습격을 위한 정보는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맘에 드는군.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언가?”
“출세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딘의 정보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요직을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르님이 오딘에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군. 자네는 대 프레이야 제국 특수 첩보부에 배속되게 될걸세. 자네만이 알 수 있는 프레이야 제국의 정보를 보고하도록. 대신 자네에게 오딘에 대한 2급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혹시 지금 나누는 이야기를 협력자도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그와 저는 한몸이나 다름 없어서, 제가 보고 듣는건 그도 똑같이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한가지 조언을 해주지. 티르도 나도 일종의 전쟁신이지만, 오딘이야말로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다. 그의 목표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군림하는 것도 아니야. 그의 존재가치는 도전자를 짓밟는데 있다. 그걸 위해서 그는 도전자를 키우지. 전대의 프레이야를 멸망시키려고 한 것은 도전자로서 싹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적으로 돌린 이유도 슬슬 수확의 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따라서 선택의 여지가 좀 있다.”
토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승리해서 오딘을 말살하는 것이다. 나와 티르도 숨겨둔 카드는 당연히 있다. 꽤 강력한 놈들이지. 하지만 오딘 역시 많은 것을 숨겨뒀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패배해서 도전자로 사육될 것인가, 아니면 쓸모없는 존재로 처분될 것인가이지. 오딘은 지금의 프레이야 제국, 특히 ‘협력자’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 모든 카드를 소진하지 않는 한, 다시 기어오를 기회를 줄 가능성이 크지.”
신근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관전자에겐 내부 상황이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보여준 성의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라.”
토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신근호를 내보냈다. 그리고 신근호는 다시 토르를 찬미하는 제사에 참여해야 했다. 어찌보면 지루하고 공허한 예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딘도 이 예식의 의미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신근호는 그렇게 생각하니, 출세 따위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다.
[대사 취임 축하하네.]
<대사라고요?>
[특별 첩보부인지 특수 첩보부가 실질적으로는 대사관이라고 생각하면 될거야. 우리가 제공하는 정보를 받겠다는거지. 자네가 일반 첩보부에 접근하려고 들었다간 큰일 날걸세. 자네는 토르가 열람하라고 주는 정보만 받아오면 되네.]
조제성의 말에 신근호는 생각에 잠겼다.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는 정보 수집이라고 일하는 것보다는 노는 것을 즐기는 쪽이었다.
‘잘된 거라고 봐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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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무기라니, 어느정도 수준의 것이 필요한 걸까요.”
“어차피 오딘에게도 2차세계대전 수준의 군사 기술은 있다고 봐야겠지. 그러니 88미리 대공포 수준의 화기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걸 거인 에인페리어가 들 수 있을까요?”
“무리지. 거인 에인페리어들이 운용할 수만 있으면 되는거야. 수레 형식으로 손잡이를 달아서 두명이서 끌 수 있게 한다던지. 조작판을 거인용으로 만들면 될테지.”
고사포는 그대로 라이플포로 활용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하지만 오딘이 나치라는 카드를 꺼내보인 이상은 그에 맞춰서 상황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었다.
“휴대용으로 저화력 무기를 제공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비행체를 공격하려면 탄속이 빨라야 해. 그걸 생각하면 거인용 저격총이 만들어지겠지. 그게 더 위험하지 않겠어? 우리한테 전차가 없는 이상, 대전차 병기로 쓸 일은 없을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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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는 살려둔다는 거지.’
조제성은 토르의 말을 통해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못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 못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는 것만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갖고있는 것으로는 만족 못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오딘도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싸움에는 상대가 필요했다. 시시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상대를 키우는 것은 자신이 멸망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필요했다.
티르와 토르는 군신과 전신이지만, 오딘과는 달랐다.
‘그건 그렇고 토르도 생각보다 유연한 놈이로군. 충분히 위험하겠어.’
로키는 오딘에게 길러지는 도전자였고, 그래서 자신을 위해 싸워줄 자식들을 만들었다. 그래서 펜릴과 헬, 요르문간드는 꽤 단순한 편이었다. 하지만 토르와 티르는 로키와 마찬가지로 도전자로 길러진 존재였다.
‘티르도 쉬운 상대는 아닐 듯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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