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개막전야
‘설정에 충실하게 맞춰줘야 싱크로율 감소를 막을 수 있다고 했던가.’
리베로 리그 결승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에 실제 리베로에 탑승할 기회를 얻은 제준은 미소를 지었다.
실제 리베로에 탑승한 기분은 정말 묘했다. 가짜 정령과 진짜 정령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블러드 라인 2는 완벽에 가까운 가상현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와는 다른 부분이 분명 존재했다.
제준이 얻게된 정령 프로나는 근접 전투가 특기인 정령이었다. 몸의 움직임은 좋지만, 지나치게 적극적인 전투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평이었다. 게임 상에서는 적극적인 전투를 위한 조언만을 던지지만, 실제 정령을 통해 조종하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정령이 멋대로 육신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 무모한 전투는 피해 주세요.”
[내 희생이 모두를 구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몸을 사리는 것은 전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무모한 전투는 아군도 죽여요.”
[전쟁에 절대는 없어. 확률이지. 아군이 말려들어 피해를 볼 가능성도 있지만, 승리를 통해 피해를 줄일 가능성이 더 커.]
‘역시 말로는 통하지 않는군. 학습형 컴퓨터가 맞는 건가? 신념까지 느껴지는걸.’
[그다지 달갑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군.]
‘동의서에 사인은 했지만, 확실히 미묘한 기분이네.’
정령과의 싱크로는 마음 속 일부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자신만의 비밀이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실제로 진짜 정령과의 동조에 앞서 요구되는 이 동의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정령과 동조하는 기회를 포기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조가 가져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친밀감은 꽤 좋은 느낌이었다. 쾌감보다는 행복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왠만한 쾌감보다도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속 비밀을 공유하는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는 느낌이었다. 영혼으로부터 느껴지는 끈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프로나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강한 책임감과 희생정신, 동족에 대한 강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실버 타이거와 싸워볼 수 있다니 기대가 되는군요.”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실버 타이거와 붙어보는게 기대가 되었다. 전술교도대는 리그에 참가하는게 반칙 취급을 받는 강자들이었다. 그리그 제준은 리베로를 다루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기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왕이면 레드 폭스도 내가 잡을 수 있었으면 했는데 말이지요. 블루 폭스로 참아야 한다니, 아쉽군요.”
[허, 웃기지도 않네. 너 따위가 은호님과 적호님을 상대할 수 있다고?]
프로나는 코웃음을 쳤다. 제준은 자신의 정령이라면 자신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조금 발끈하는 기분이 들었다.
‘설정이라고 했지. 설정.’
리베로 리그 측이 나눠준 정령 취급서에는 정령들에 대한 설정이 담겨 있었다. 정령들은 미의 여신 프레이야를 따르는 엘프와 다크엘프들로 설정되어 있으며, 설정에 따라서 사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프레이야라니, 정말 안이한 설정이야. 그래도 예쁜 엘프들하고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설정에 맞추려면 엘프 정령이 아니라 발키리들이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
정령들은 ‘용사’인 에인페리아들을 도와서 싸우는 존재로, 리베로의 조종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설정에 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발키리가 해야 할 역할이지만, 초기 설정 오류로 엘프와 다크 엘프들의 정령들이 용사 후보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있었다.
그리고 정령들이 적당한 후보를 찾게 되면 ‘용사’인 ‘에인페리아’가 되어 전속 정령이 되는 것으로 설명이 나와 있었다.
에인페리아 스티븐은 리베로 리그에 관여하는 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최초이자 지금까지는 유일한 에인페리아나 다름 없었다.
“실버 타이거와 레드 폭스도 에인페리아인건가? 너희와 계약을 나눈 건가?”
[그분들과 계약을 맺는 영광을 얻은 분들이 있긴 하지. 아쉽지만 나 같은 것에겐 기회가 없을거야.]
“무슨 소리지?”
[그분들은 에인페리아들 가운데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분들이자, 여신님의 최측근이지. 여신님과 계약을 맺은 분들이야. 그분들에게 쓰여지려면 최고의 실력자가 아니면 안되지.]
“넌 최고가 아니라는 건가?”
[그래.]
프로나의 답변에 담긴 깊은 안타까움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나라도 너 같은 인간들에겐 과분해’라는 기분까지 전해져 와서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을 나눈 탓일까, 동조가 조금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내가 최고가 되어, 널 최고로 인정받게 해주지.’
제준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느꼈다. 프로나에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또한 프로나의 강함을 모두에게 인정받게 해주고 싶어졌다.
“만약 내가 실버 타이거에게 승리를 거둔다면 어떻게 되는거지? 에인페리아가 될 수 있는건가?”
[그분들은 강함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면에서 특별한 존재야. 하지만 그분들을 능가하는 강함이라면 충분히 에인페리아가 될 수 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넌 그분들에게 미칠 수 없어. 그래서 헛된 약속을 할 수는 없군. 대신에 한가지 조건을 걸어주지. 은호님과 적호님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어. 대전하게 될 때, 유효타를 안길 수 있다면 널 내 계약자로 인정해 주겠어. 물론 총격전은 예외야. 눈먼 탄환은 어쩔 수 없으니까 말이지.]
“총격전이 주특기인데 좀 아쉽군. 그건 그렇고 다음 대전에서라도 괜찮은거야?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실버 타이거를 노릴텐데?”
[상관없어. 다수의 대전에서라도 좋아. 한방만 유효타를 명중시키면, 널 내 전속 계약자로 삼아주지. 리베로를 탈 수 없게 된다면, 네 핸드폰에라도 머물러 줄거야. 적어도 네가 자발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거나 죽을 때까지는 널 계약자로 삼아주지.]
“좋았어. 약속인거다.”
[그래. 하지만 성공할 거라는 기대는 너무 갖지 않는게 좋아.]
프로나의 말을 들으면서 제준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역량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리베로에서 내려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우선은 혼전에 휩쓸린 상태에서 뒤를 노리는게 좋겠지. 나 말고도 실버 타이거를 노릴 놈들은 많을거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지막까지 서있을 수는 없을거야. 그가 쓰러지기 전에 유효타를 최소한 한방은 넣어야 하니, 여유를 갖기는 어렵겠지.’
그는 실버 타이거가 자신보다 강할 거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성장 가능성 또한 믿었다. 충분히 리베로에 익숙해진다면,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내일이 아니라도, 리그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는 한은 언젠가 실버 타이거든 레드 폭스든 한방을 먹일 수는 있을거야. 그리고 레드 폭스는 그렇게까지 강하다는 느낌은 없었어.’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레드 폭스의 움직임은 확실히 뛰어나고 전투 센스는 좋아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날렵한 스티븐과 해리엇의 조합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방어력을 자랑하는 실버 타이거가 보스몹이라면, 그녀는 중간보스도 아니고 보스 곁에 따라다니는 근위몬스터 정도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고 있었다.
‘아쉽다. 실버 타이거 편이었으면 레드 폭스를 상대할 수 있었을텐데. 아니야. 그녀였다면 내가 공격할 틈도 없이 순삭당할 수도 있어.’
그는 자신이 레드 폭스의 편이라는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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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창 물었습니다. 떡밥이 역시 좋긴 좋군요.”
“정령과 계약이 그렇게 좋은가? 난 잘 모르겠군.”
“형님은 오직 형수님 뿐이라서 그런 겁니다. 영혼의 일부를 공유하는 친밀함에서 느껴지는 기분은 결코 녹녹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상대가 미모의 이성이면 그 기분은 절대적이지요.”
“남자 다크엘프를 선호하는 남성 유저들도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세상은 넓으니까 그런 겁니다.”
리베로 조종에 뛰어난 이들 가운데,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에게 정령들은 호승심을 유발하며 계약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 계약자체가 정령에 대해서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효과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리베로 리그는 리베로 조종사를 섭외하고 양성하는 역할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희연이를 많이들 얕잡아 보고 있는 듯 싶더군요.”
“내일 벌어질 개막전이 볼만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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