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개막전 승자
제준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움직여!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제준이 향한 곳은 카즈키가 있는 쪽이 아니었다. 그는 카즈키에게 도전하는 것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로나가 던진 떡밥을 물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실버 타이거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실버 타이거와 레드 폭스가 보여주는 위용은 말 그대로 사기적이었다.
부러지기 쉽고, 그렇지 않더라도 날이 퍽퍽 나간다는 히트소드를 가지고 관절들을 삭삭 잘라내서 바닥에 몸통만 굴러다니게 만드는 레드 폭스도 그랬지만,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서 상대를 방패겸 무기로 삼아 주위를 일소하는 실버 타이거의 모습은 전율에 가까웠다.
그리고 블루 폭스는 레드 폭스와 라이벌이었다. 정령들 사이의 평가는 왠지 낮은 듯 싶었지만, 적어도 리베로 대전에선 그리 딸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날렵한 푸른 기체에 왠지 이도류로 칼부림을 하려고 작정한 모습에 제준은 재빨리 회피를 선택했다.
“아, 저 멍청한 새퀴는 뭘 하는거야.”
“적전 도망이냐? 한국 국기를 달고 참전한 색휘가.”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눈이 실버 타이거와 레드 폭스의 장절한 싸움에 몰려있었지만, 제준 역시 한국의 유명한 랭커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그러면서도 사방의 전황을 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 저거야.’
그는 재빨리 움직여서 금색의 리베로 뒤에 숨었다. 황금의 호랑이, 펜리아의 기체였다.
“뭐야, 이녀석은?”
마치 자신을 덥치기라도 할 기세로 달려와서 자신의 등뒤로 숨은 아군 기체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그 뒤를 살기등등하게 쫓아온 카즈키의 기체와 마주했다.
“흥, 이제 좀 싸워볼 만한 상대와 마주친 느낌이네.”
훈련 교도대의 멤버들은 전술 교도대에 대해서 경쟁의식은 있지만,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술교도대가 아닌 일반 참가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금색으로 칠하고 이름도 골드 타이거라고 붙인 펜리아를 노렸다. 그리고 그 결과 훈련 교도대는 어이없이 일반 참가자에게 유린당해서 박살난 상태였다.
이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전술 교도대의 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펜리아였지만, 일반 참가로 참여하게 된 덕분에 생겨난 이변이었다.
“좋아. 널 잡아서 내가 더 쓸모있다는걸 보여주겠어.”
펜리아는 애취급받는 자신과 달리 전력으로 간주되어 원기 곁에 붙어있는 카즈키에게 경쟁심을 품고 있었다.
‘젠장. 저년은 그냥은 못이기는데.’
기세 등등한 펜리아와 달리 카즈키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펜리아는 카즈키와 닮은 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넘치는 재능 덕분에 야성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본능적인 전투 감각으로 싸우는 타입이었다.
물론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는 카즈키가 위였지만, 육체를 사용하는 전투는 펜리아가 위라고도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펜리아가 사용하는 전법은 원기의 리베로 전술을 베껴서 적용시킨 것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자신에게 딱 맞춘 방식의 전법이었다.
원기보다 조금 미숙하지만, 그에 필적하는 최강의 리베로 전투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카즈키에게도 그것은 한 눈에 보였다.
‘이대로는 상대가 안돼.’
쟈바라 블레이드를 사용하면 승부가 될 것이라는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날아가는 도중에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쟈바라 블레이드라면 펜리아는 물론이고 원기도 제대로 방어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쟈바라 블레이드는 펜리아나 원기따위에게 보여줘도 될 비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쟈바라 블레이드를 처음 맛을 보는 것은 희연이 아니면 안되었다.
골드 타이거가 앞으로 나서자, 블루 폭스는 뒤로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코미디가 되어버렸는걸.”
제준을 쫓아오던 카즈키가 제준이 방패로 삼은 펜리아에게 쫓겨서 도망치고 쫓는 사태가 벌어졌다. 제준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너무 도망치는 모습만 보여주면 안되겠지.”
제준은 그렇게 판단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골드 타이거에게 기체에 손상을 입은 이들이 널려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제준은 막타를 날렸다.
“이정도면 충분히 활약했다고 간주되겠지.”
제준은 자신에게 몰린 카메라를 눈치채지 못했다.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은 실버 타이거와 레드 폭스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훈련 교도대와 블루 폭스에게도 몰려 있었다.
훈련 교도대와 블루 폭스에게 몰려있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준에게도 쏠리게 되었고, 그는 일약 두개의 명칭을 얻게 된다.
‘비겁의 제왕’, ‘킬딸의 황제’라는 두개의 명예스러운지 불명예스러운지 모를 호칭을 얻게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제준은 전장을 주의깊게 살폈다.
‘재밌는 녀석이군. 이런 싸움 법도 있었지.’
프로나는 제준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강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우선 목표를 확실히 해둔 다음, 쓸데없는 자부심이나 일체의 망설임을 버리고, 작전 성공률을 높이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프로나로서는 불가능했던 싸움법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저 용감하게 싸워서 모두를 지킨다는 것 말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실버 타이거와 레드 폭스를 노리는 대군들이 차례차례 무너져갔다. 그리고 소수의 기체들만이 남았다.
희연은 결국 무기사랑을 사용해서 무자비하게 적을 베기 시작했다. 두자루 있던 여분의 히트소드를 모두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실버 타이거의 외형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지만, 전투력을 거의 온존했다. 하지만 희연은 이능을 사용하면서 한계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쪽으로 카즈키와 펜리아가 뛰어들었다.
“하사미 우치!”
카즈키는 그렇게 외치면서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리베로의 목을 양 검으로 날려버렸다. 그녀 역시 가위의 움직임을 응용한 전법을 사용했다. 양검을 가운데에서 교차시키면서 적의 일점을 베는 하사미 기리와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해서 꿰뚫는 하사미 우치라는 수법을 썼다.
장갑과 골조가 단단해서 일반적인 검격으로는 절삭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만들어낸 수법이었다.
문제는 레드 폭스, 희연을 둘러싼 적들이 카즈키의 우군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공격할 수 없는 최악의 장애물이었다.
‘젠장.’
카즈키는 할 수 없이 쟈바라 블레이드의 봉인을 풀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녀의 검이 수십미터 길이로 늘어나서 주위를 쓸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검편이 반짝이면서 사방을 휩쓸고 다녔고, 원기 주위에 있던 리베로들이 무력하게 이곳 저곳에서 기름을 흘리면서 바닥에 누웠다.
관절부와 주변의 파이프, 전선 등을 교묘하게 긁고 지나가는 것만으로 무력화 시킨 것이었다.
일본 팬들은 이 모습을 보고 반해서 ‘사쿠라 후부키’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시 말하지만, 희연은 내거야. 건드리지 마.”
카즈키의 통신에 원기는 쓴 웃음을 지었다. 강자를 찾아서 싸우고 싶어하는 그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기가 희연을 상대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가르쳐 주는 강자이기 때문이었다. 희연 같은 강자에게 무얼 배우는 것은 좋지만, 강자와 싸우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런데, 나보고 뭘 하라고?”
“희연을 둘러싼 놈들을 해치워줘.”
원기는 그 순간, 입을 딱 벌렸다.
“역시 넌 머리가 나쁘구나. 천재이긴 해도.”
“무슨 소리지?”
“너랑 나랑 같은 편이야. 그리고 쟤들도 같은 편이고. 너만 못때리는게 아니고, 나도 못때려.”
“아, 그런가.”
그녀가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자, 희연 역시 막바지가 왔다고 느끼고 무기 사랑을 최대한으로 짜내서 폭풍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주위의 대부분의 기체들을 박살내 버렸다.
“너한테 대뜸 선보이면 비겁할 것 같아서, 보여준거야. 이게 내 새로운 무기 ‘쟈바라 블레이드’야.”
칼날들이 반짝이며 춤을 추듯 카즈키의 주변을 돌았다. 칼날과 칼날 사이에서는 전기가 튀기도 했다. 자력을 이용한 컨트롤은 쉽지 않은 것이었지만, 정령인 아오이가 아주 멋지게 컨트롤해주고 있었다.
[희연님에게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 아니었나요?]
“이정도면 충분히 놀랐어.”
카즈키는 겸연쩍은 듯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희연은 무기사랑을 전개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지만, 카즈키 역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쟈바라 블레이드를 조종하기 위한 전력 소모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기에 승부를 서둘렀다.
그리고 원기는 자연스럽게 골드 타이거에게 눈이 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검과 검의 전투와, 난폭하고 야만스러운 육체와 육체의 전투가 펼쳐졌다.
카즈키의 쟈바라 블레이드는 정말 살아있는 듯 움직여서 레드 폭스의 기체 전체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희연 역시 속수무책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희연의 무기 사랑이 쟈바라 블레이드를 잇는 선을 가볍게 잘라버렸다. 그리고 무기를 잃은 카즈키의 기체가 머리를 잃고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원기와 놀원의 전투는 이미 끝나있었다. 놀원이 원기의 오른 팔을 뽑았고, 원기는 놀원의 머리통을 부숴버렸다.
희연은 마지막 결판을 내기 위해 원기를 향해 무기사랑이 깃든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원기는 그것을 오른쪽 어깨로 받았다. 검이 부딛치고 어깨를 파고드는 순간, 원기의 움직임은 검면이 넓게 마찰되도록 유도했고, 무기사랑의 효과가 반감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원기의 왼팔이 레드 폭스의 목을 잡아 뜯었다.
“아직은 내가…”
원기가 승리 선언을 하려는 순간, 실버 타이거의 머리통 위에 철퇴가 떨어져서, 머리통이 으깨어지며 폭발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준이 서 있었다.
“내 승리다!”
그는 기쁨의 함성을 질렀고, 장내는 야유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뒤통수의 신’이라는 칭호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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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 녀석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줄은 몰랐군.”
제성은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토르의 제안은 그만큼 파격적인 것이기도 했다.
“놀랍군요. 별 1호 작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별 1호 작전은 장수한이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기동투사 칸담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이름은 그렇지만, 작전 그 자체는 조제성이 입안하고 준비해 온 것이었다.
바로 발할라 공략이었다.
오딘의 기동요새, 공중 궁전 발할라.
이를 함락할 수 있다면, 충분히 프레이야 진영은 오딘과 군사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차근차근 발할라 공략작전을 준비하는 와중에, 토르에게서 제의가 들어온 것이었다.
발할라 공략전을 위해서 리베로 전력을 투입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함정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토르가 발할라를 점령한다면, 상황은 꽤 바뀔 것이 틀림없었다.
“잘하면 토르와 오딘의 전력을 감소시킬 수 있어. 발할라만 무력화시킨다고 해도 더 바랄게 없겠지.”
“요구는 뭐지요?”
“조율해 봐야겠지. 하지만 이런 제의가 온 만큼 시간 여유는 없을거야. 리베로 리그는 성공적이었나?”
“일단 적자는 면했습니다.”
장수한의 말에 조제성은 미소를 지었다. 원거리전, 근접전해서 도합 240기의 리베로가 파손된 개막전이었다. 240기분을 생산한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한데다가 수리에 들어갈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자를 면했다는 것은, 리베로 리그에 참여를 표명한 국가와 기업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었다.
‘잘하면 500기 가까운 리베로를 투입할 수 있겠군. 토르와 티르의 연합군이 오딘의 발할라를 친다니.’
조제성은 승리든 패배든 손해볼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달콤한 이야기에는 위험이 따를 거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아니 떨쳐 버릴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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