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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363화 (363/497)

363화 끝나지 않는 축제는 없다

[무기의 사용 허가가 내려졌습니다.]

지크프리드는 오딘의 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에너지 상태는 어떠한가?]

지크프리드의 질문에 지크프리드의 가슴 유닛에 탑승한 승무원들이 계기를 확인하며 분주하게 조작했다.

“현재 에너지 축적률 60%입니다. 임계점까지 20% 남았습니다.”

[아직은 기다려야 하는건가. 본기의 포격을 계기로 포격을 허가한다. 모든 슈탈크리그는 포격 태세로 이행하라.]

지크프리드는 그렇게 명했지만, 전투 상황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지크프리드는 여전히 다리와 발로 후퇴하는 적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슈탈크리그들도 토르의 병사들이 후퇴하는 것을 공격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토르의 성역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병사들에게 슈탈크리그용 대형 핸드 캐논을 날리는 것도 변함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모터가 장착된 관절부에서 증기와 함께 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슈탈크리그들이 곧 과열될 것이다. 그 틈에 일제히 퇴각한다! 그때까지 신관들은 진영을 유지하라!”

토르의 지휘관들이 그렇게 말하며 병사들과 신관들을 독려했다. 발할라의 이동 능력을 빼앗은 이상, 이 전투는 토르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병력을 잃어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살려 돌아가는 것이 남은 과제였다. 거인 에인페리아들이 슈탈크리그들은 물론이고 지크프리드의 발목까지도 차단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관들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거인 에인페리아들은 신관들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지크프리드가 냉각에 들어갈 것이다! 그 틈을 노려 일제히 퇴각한다!”

거인 에인페리아의 리더인 초호기는 적에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외쳤다. 어차피 지크프리드를 비롯해 몇기는 냉각에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비행 유닛인 하우니브에 탑승한 승무원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였다.

“임계점을 돌파했습니다!”

[좋다. 마동포 발사!]

지크프리드의 가슴 부분이 열렸고, 그곳에서 거대하고 강렬한 빛의 기둥이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초호기를 뚫고 신관들을 강타했다.

그리고도 여전히 뿜어져 나와서, 지크프리드는 빛의 기둥으로 토르의 진영을 유린했다.

빛의 기둥을 유지한 시간은 단 3초지만, 토르의 군세에게는 마치 영원과도 같았다. 빛의 기둥이 대지에 거대한 흉터를 남겼고, 수천명의 병사들이 재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 버렸다.

슈탈크리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가슴에선 0.1초 정도의 지속시간을 지닌 빛의 덩어리가 쏘아졌다. 단 한방에 수십미터의 크레이터가 만들어졌고 수백명이 일순에 증발해 버렸다.

지크프리드도 슈탈크리그도 단 한발씩 밖에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냉각을 위해서 쉴 필요가 없었다. 축적된 에너지를 충분히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마동포의 재 사용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과도한 열기 때문에 기체의 재정비가 필요합니다. 3초의 연속 사용은 무리로 보입니다.”

[상관없다.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지크프리드는 순식간에 지휘체계를 상실하고 오합지졸로 변해버린 토르의 군세를 보며 굳이 쫓아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성역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들은 이미 다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슈탈크리그들이 공중에서 그들에게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수분에 걸쳐서 한발씩 쏘고 있지만, 슈탈크리그들의 재 사격에 당황한 토르의 병사들은 지크프리드가 다시 쏠 것을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숨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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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카드를 갖고 있었다니. 놀라운 놈이로군요.”

“나도 당황스럽군. 토르 녀석의 배신도 그렇고 말이야.”

조제성은 쓴 웃음을 지었다. 토르에겐 안된 일이지만, 거의 모든 병력이 토르의 병사들을 유린하기 위해 쫓아간 지금이 기회였다.

조제성은 탈출을 위해서 두가지 준비를 해뒀다.

하나는 발할라성 지하에 탈출용 땅굴을 파두는 것이었다. 게임측 게이트에서 현실로 나올 때 게임 캐릭터들은 실제 육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영혼이 이 육신에 묶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에인페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였지만, 에인페리아는 죽을 때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면 게임 캐릭터는 부활하는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죽는다고 해방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임 내부가 아니면 로그 아웃이 되지 않았고, 로그 아웃 없이는 육체에서 해발될 수 없는 것이다.

게임 내에서처럼 마을로 이동하는 것도 안되고, 당연히 마을에서 부활하는 것도 안되었다. 오직 죽은 자리에서 부활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완전히 죽은 자리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융통성은 있었다. 다만 고작 15미터의 범위였다. 이것으로 도망치는 것은 무리혔다. 하지만 평면 좌표가 같으면 부활 위치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했다.

폴리곤이 깨진다던가 물리엔진 오류 등의 이유로 캐릭터가 땅속에 파묻히거나 가라앉는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 조제성은 발할라 외각 지하에 땅굴을 파두었다.

문제는 토르의 배신하는 시점을 잘못 판단했다. 토르가 진심으로 발할라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한 거였다.

배신의 시점은 최소한 중앙신전을 제압한 다음으로 생각했다.

제준과 엘프 신관들이 배치된 탈출 게이트와 땅굴 탈출로 두 곳이 확보된 상태였다.

탈출 게이트는 역으로 아군이 나올 수도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점을 이용해서 다수의 엘프들이 게임 캐릭터로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대기한 상태였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겠군.’

제성은 즉시 분산되어 모두가 탈출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가장 중요한 최우선 등급은 원기였고, 2등급이 놀원과 굴베이그, 희연이었다. 그리고 3등급이 연하와 레이니를 비롯한 계약자들로 분류했다.

그리고 나머지 엘프 게이머들은 탈출구를 이용하지 않고 사방으로 분산되도록 지시했다.

제성이 지시를 내리자, 엘프 게이머들이 부활해서 사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혹시 숨겨진 매복이 없는지 정찰하며 퇴로를 확보하는 역할도 맡았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모두 일제히 부활해서 탈출루트로 향하세요. 지상 루트와 지하 루트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만큼 빠르고 안전한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조제성의 지시에 원기와 희연, 굴베이그, 놀원이 일제히 부활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달려가던 엘프 게이머 하나가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명중했다.

[화살 공격입니다. 아티팩트인 듯 단발에 사망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화살에 동료가 맞는 것을 본 엘프들이 보고했다.

“우선 계속 달리라고 전해. 지금 사망한 엘프가 누구지? 길드 채팅으로 상태를 확인해 봐.”

“스이니입니다. 그런데 파티 채팅에도 길드 채팅에도 안뜹니다.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제성은 당황했다. 블러드 라인은 사망자라고 해도 파티 채팅이나 길드 채팅에서 채팅이 가능했다. FPS가 아닌 RPG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성은 빠르게 제준에게 지시를 내렸다.

“제준군. 엘프 신관들에게 즉시 게이트를 열라고 말해!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 대기자들에게 즉시 나오라고 전해!”

“또 화살 공격을 당했습니다. 엘프 게이머입니다.”

“모두 자살하라고 해.”

제성은 빠르게 외쳤다. 맞으면 반드시 죽는 소멸의 화살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로그 아웃도 안되는 상황에서 부활하지 못하는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은 정말 최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성의 지시가 떨어지기 전에 몇몇 사람들이 죽음을 맞았다.

다행하게도 화살에 맞기 전에 원기를 비롯해서 굴베이그, 놀원, 희연은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죽은 원기의 시신 옆에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이 녀석은 내 에인페리아 중 하나야. 그가 누군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을 테니 굳이 소개하지는 않겠네.]

원기와 조제성은 그 목소리가 오딘의 목소리임을 알아챘다. 잘생긴 사내지만 냉혹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내의 왼팔에는 암살자가 쓸법한 작은 활이 장착되어 있었다.

[활도 그리 중요한 물건은 아니지. 하지만 화살은 꽤 중요한 물건이야. 소멸의 화살이라고 하는 물건의 강화판이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군.]

사내는 왼팔의 작은 활에 화살을 장전했다. 그리고 죽어 널브러진 원기의 시체에 화살을 겨냥했다. 이미 죽은 시체를 난도질한다고 해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태도에 사람들은 등골이 오싹해 오는 것을 느꼈다. 죽은 상태로 시신 옆에서 지켜보는 원기도 닥쳐오는 공포에 가슴이 떨려왔다.

[이 강력한 화살은 성역 5에서만 발동되는 특별한 아티팩트야. 보통은 절대 안 쓸 강력한 무기지. 육체도 영혼도 존재도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리는 화살이야. 절대 죽음의 화살이지. 그런데 말이야. 이 화살을 시체가 맞으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죽은 시체를 칼질해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알고 있네. 태워버린다고 부활 못하는건 아니지. 그런데 이 화살을 맞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않나?]

오딘의 메시지에는 오딘의 분노와 살기가 함께 실려져서 전해지고 있었다. 발할라를 못쓰게 만든 토르의 작전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는 프레이야를 지켜보는 것을 택해왔지만, 역린을 건드린 탓에 오딘이 결단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안돼!”

오딘의 강력한 살의와 함께 프레이야의 파멸에 대한 확신을 함께 느낀 조제성은 당황해서 외쳤다. 지켜보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암살자의 화살이 원기의 남겨진 시체에 명중했다.

화살에 맞은 원기의 시신이 사라졌다. 그리고 조제성의 친구 리스트에서도 원기의 존재가 사라졌다.

“당장 블러드 라인에 들어가서 대기자들을 불러내! 총력전이다!”

제성이 외치자, 제준이 신관들이 연 게이트를 통해 블러드 라인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게이트가 사라졌어요! 블러드 라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프레이야 님은 어떻게 되셨나? 발키리들은 알 수 있지 않나?”

[프레이야님의 존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조제성의 발키리가 응답했다. 조제성은 황급히 냉정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는 이 최악의 사태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를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당장 굴베이그님과 놀원님, 희연님을 탈출시켜라! 지하 터널로 이동하면 탈출 할 수 있어! 더 이상 신을 잃어선 안돼!”

조제성은 프레이야의 소멸을 인정하고, 최대한 손실이 적게끔 일을 처리하려고 마음먹었다. 패닉에 빠진 이들은 조제성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따랐다.

굴베이그는 조제성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프레이야가 없어졌다면, 그 남은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놀 원은 패닉 상태에서 어쩔 바를 모르는 상태로 굴베이그에게 이끌려서 탈출장소로 향했다.

다른 계약자들과 엘프들은 탈출을 포기하고 암살자를 향해서 몰려들었다. 자신들이 설령 죽어 없어져서 영혼의 흔적조차 사라진다고 해도 소중한 이들과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희연님도 빨리 탈출하세요!”

조제성의 메시지에 부활한 희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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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키는 희연이 아무런 걱정 없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희연은 전형적인 우등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착실하고 예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축복을 받은 존재처럼 생각했고, 그래서 편히 살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희연은 달랐다.

프레이야 여신과 만나기 전의 희연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편부 슬하에, 유일한 보호자인 아버지는 생활력이 부족했다. 검술 도장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잘 아는 유명 협회에 소속된 것도 아니었다. 대회에 나갈 수도 없었다.

생계 수단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취미생활에 가까운 것이었다. 도장을 찾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희연은 자신이 강해지면, 도장에 수련생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어린애다운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강해졌지만, 그녀의 강함을 보여줄 무대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실전 무술을 동경한 아버지는 희연을 통해서 완벽하게 살인검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했지만, 그게 설 자리가 없었다.

대회용 검술로는 협회의 편파 판정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희연의 신체 조건은 대회용 검술로 상대를 압도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심판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병원비를 부담하게 되자, 상황은 더욱 안좋아졌다. 그녀는 검술에 뛰어나지만, 그것을 인정해 주는 이들은 없었다. 그녀는 공부를 잘했지만, 진학할 여유가 집안에는 없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에 이미 집과 도장에는 막대한 대출금이 걸려 있었고, 쓰러진 이후에는 그 부담이 더 커졌다. 장학금을 받는다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불가능했다.

파산 신청이 제대로 되는지는 몰랐지만, 설사 파산신청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병원비를 바이트로 매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길 말고는 그녀에게 살아갈 길은 없어보였다.

그녀는 절제심이 강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소홀히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검술을 단련했고, 공부를 했고, 가능한 바이트를 찾아서 일을 하고자 했다.

그녀는 예쁜 용모가 있어서, 일을 찾기 쉬울 줄 알았지만 그녀를 고용하고자 하는 이들 중 다수가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올바르게 살려고 했지만, 세상은 그녀가 올바르게 살게 두지를 않았다.

그녀가 느끼기에 세상이 그녀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상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여전히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하루 죽어가면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계가 다가오고 있음은 그녀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

한계가 가까워오던 어느날, 갑자기 허공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여신이 나타났다.

여신은 세상에게 배척받던 그녀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힘을 필요로 해 주었다. 그녀에게 살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프레이야는 그녀에게 ‘살아도 좋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녀에게 프레이야는 단순한 여신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프레이야는 그녀가 살아가도 좋을 세상 그 자체였다.

[희연님! 빨리 달아나세요!]

조제성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프레이야가 사라진 다음을 생각하는 간사함이 가증스러웠다. 조제성이 옳고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가 살아갈 세상은, 그녀가 살아도 좋을 세상은 더 이상 없었다.

그녀의 온 몸에서 검은 색의 기운이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카즈키는 깜짝 놀랐다. 희연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둠 그 자체였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어둠이란 빛이 결여된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연의 어둠은 달랐다. 빛마저도 어둠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괜찮은거야?”

희연의 불길한 모습에 카즈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연은 카즈키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게이머들을 차례차례 지워버리던 암살자가 희연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희연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기사랑의 빛이 그녀의 검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보다 몇배나 큰 어둠이 검에서 타오르고 있다가 암살자를 향해 나아갔다.

암살자는 어둠의 검이 그를 베고 지나갔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두어걸음 걷다가 바닥을 굴렀다. 그의 육체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그의 가슴은 호흡에 맞춰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즈키는 그가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희연을 감싼 불길한 어둠 탓이었다. 후긴과 무닌이 하늘을 날아서 다가오며 불을 뿜었다. 하지만 희연이 검을 휘두르자 무기력한 모습으로 땅에 추락했다. 한마리는 목이 부러져서 죽었고, 한마리는 살아있지만 역시 죽어있었다.

희연은 암살자에게 다가가서 화살을 하나 뽑아들었다. 카즈키는 그 화살이 희연 자신에게 쓰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즈키는 뺏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지금 쓰여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즈키는 자신의 사복검을 채찍처럼 사용해서 화살 하나를 챙겼다.

희연은 거침없이 중앙 신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봐! 같이 가자!”

카즈키는 희연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고 미소를 지으며 희연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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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군. 굴베이그님과 놀원, 아니 펜리아님은 구출했으니.”

조제성의 말에 장수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프레이야를 잃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궁전에 있는 게이트도 막혀버린 상태였다.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남아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굴베이그와 놀원이라도 구출한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희연의 저 능력은 뭐였지요?”

“아마, 헬 여신의 능력, 아니 헬 여신으로서 그녀가 얻은 능력이 아닐까? 프레이야 여신님과는 반대의 능력이라고 봐야겠지.”

조제성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프레이야의 바니걸 통신을 영원히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상실감이 더 커졌다. 프레이야를 잃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프레이야의 바니걸 통신은 원기의 이능이면서, 프레이야이기에 얻어진 이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었다.

외로움에 사무쳐, 사람을 갈구하던 소년의 영혼이 만들어낸 신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희연의 어둠은 그녀의 깊은 파괴욕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성이 억눌러온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거부가 낳은 힘이었다.

“엑스칼리버를 각성하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군.”

조제성은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프레이야를 지키는 임무를 영광으로 생각했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키는 힘보다는 파괴하는 힘으로만 각성했다.

카즈키가 쪼렙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것이 강자로서의 여유라면, 희연의 쪼렙 학살은 그저 살육을 돕기 위한 수단이었다.

자신을 지키지 않고,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죽이기 위한 힘만을 각성한 그녀의 어둠이 헬의 힘을 통해서 새롭게 발현된 것이었다.

당황한 오딘이 에인페리아들을 부활시켜서 필사적으로 희연을 저지하려고 들었지만, 희연은 그들을 허무로 돌려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려고 들지않는 희연을 카즈키가 사복검을 써서 지원했다. 희연은 카즈키를 무시했지만, 두사람의 움직임은 약속된 춤동작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희연을 향해서 전차들이 돌진했다. 희연의 어둠이 전차를 갈랐지만, 전차는 변함없이 달려들었다. 내부 승무원이 액셀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연은 다가오는 전차를 밟고 뛰어가면서 다음 전차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어둠이 검기처럼 발현되어 초승달의 형태로 날아가서 전차를 베었다.

탑승자가 조종간을 꺾은 듯, 전차는 방향을 틀고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멈췄다. 전후좌우에서 화살 창들이 날아왔지만, 카즈키가 모두 쳐냈다.

평소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신기를 발휘하고 있었지만 카즈키는 담담했다. 그녀도 반쯤 무아지경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었다.

희연은 중앙 신전을 검으로 잘랐다. 빛을 발하는 무기사랑의 힘만으로는 성력으로 보호받는 신전의 문을 자를 수 없지만, 어둠이 감싸고 있기에 가볍게 잘렸다.

희연은 신전 중앙에 있는 세계수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어둠이 세계수를 양단했고, 세계수는 그녀의 어둠에 잡아 먹혔다.

[으아아악! 대체! 무슨 짓을!]

오딘은 비명을 질렀다. 세계수가 베이는 순간, 오딘은 자신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많은 세계수를 잃기도 하고 버리기도 했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괴, 괴물! 네 년은 악마인거냐!]

“용사야. 여신을 지키지 못한 실패한 용사.”

자조적인 목소리로 허무와 슬픔을 담아 말한 그녀는 다시 검을 치켜 들었다. 세상을 부수고 싶지만, 원기가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토르의 해머가 중앙신전을 직격했다. 오딘이 토르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희연의 힘에 공포감을 느낀 토르가 협력했다.

희연과 카즈키는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나타나서 바닥에 떨어진 검 중 하나를 주워들었다.

“용사는 마왕을 죽일 때까지 컨티뉴를 계속할 수 있지. 그게 용사의 권리야.”

카즈키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카즈키의 검도 부서졌지만 마땅한 대체품이 없어서 그녀는 적당한 길이의 밧줄을 주워들었다.

희연은 천공의 성좌를 향해 움직였다.

그녀가 천공의 성좌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무력한 신관과 성기사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천공의 성좌에 있던 세계수는 오딘을 따르던 성기사들의 손에 파괴되어 있었다.

희연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것이었다.

“역시 무한 컨티뉴에 당할 장사가 없다니까. 어떻게 할래?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까?”

카즈키는 가볍게 물었지만, 답변은 굳이 들을 필요가 없었다. 희연이 살아갈 모든 기력을 잃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연은 화살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찍었다. 그리고 소멸했다.

“하아. 왠지 한심하군.”

카즈키는 바닥에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죽고싶은 기분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냥 다 귀찮아졌다.

“어쩌겠어. 재미없어도 살아야지.”

아직도 성역 레벨은 높은 상태였고, 신관과 성기사들은 카즈키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덤벼들 생각을 못하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미친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딘이 도망갔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믿고 살아오던 세상이 사라진 것과 다름없는 충격이었다.

“끝나지 않는 축제는 없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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