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신의 세계-390화 (390/497)

390화 레이디 나이트

“1분 29초 980입니다! 잠정 폴포지션이에요!”

스텝이 기뻐서 외쳤다. 발키리 칩과 드워프 기술자의 조합이 차의 성능을 대폭 끌어올린 성과였다.

예상치 못한 성적에 원기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리디아가 지나치게 활약하게 된다면, 카즈키와 희연이 나설 자리가 없어지게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절대강자 리디아에게 도전하는 카즈키와 희연이라는 구도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젠장, 나쁜 예감은 잘들어 맞는다니까.”

요한 벙커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애초 계획은 2위 그리드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지노 스톰 말고도 30초의 벽을 깰 선수가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드라이빙을 보면서 가능성은 없지 않다고 여겼다.

다만 가능하면 안좋은 예감에서 끝나길 바랐을 뿐이었다.

“망할, 두명을 블로킹하려면 고생 좀 하겠어.”

요한 벙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최속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길리엄 패트릭이나 지노 스톰에게 어울리는 닉네임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백한 서킷의 지배자였다.

그는 레코드라인을 타지 않는다. 패스티스트 랩, 가장 빠른 타임을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의 머신은 레코드 라인 대신에 어떤 라인을 타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강했다.

모든 라인을 지배하는 황제이자, 전략가이며 예술가로 꼽혔다.

그저 빠르기만 한 라이벌은 손쉬운 상대였다.

“슬슬 저그불과 프로터스의 기록이 나오겠군.”

“요한씨. 한번 더 나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리디아에 밀려 3위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스텝이 말했다. 하지만 요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예상대로의 랩타임이 나왔어. 지금 상황에서 더 달린다고 소득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 머신의 상태만 망칠거야.”

요한은 쿨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저그불의 2번차가 지나갔다. 그리고 환호성이 올랐다.

“저그불의 마이스터 자비에르가 해냈습니다! 잠정 1위! 타임은 1분 28초 121! 황제 요한 벙커보다 자그마치 2초가 빠릅니다!”

요한 벙커는 그 순간 들고있던 물컵을 떨어뜨렸다. 이건 완전한 상정 외의 사태라고 할 수 있었다. 자비에르 선수는 그와 같은 전략가 타입의 선수였다. 온갖 잔재주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순위를 지키고 끌어올리는 타입이었다.

예술적인 블로킹을 가진 황제와 달리, 실격패를 종종 당하기도 하는 위협적인 공격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2초나 빠르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곤란하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그 순간이었다. 더 큰 환호성이 들려왔다. 프로터스의 2번차가 또 사고를 친 것이었다.

“1분 28초 002 영웅이 돌아왔습니다! 프로터스 2번 드라이버 잠정 1위 폴포지션을 획득했습니다. 황제 요한 벙커 선수 4위로 물러났습니다.”

“미치겠군. 이제 진짜가 등장하는 건가?”

“들어왔습니다! 지노 스톰! 코스 레코드를 경신하면서 잠정 1위에 올랐습니다. 자그마치 1분 26초 222! 이건 믿기지 않는군요.”

“이럴수가! 길리엄 패트릭이 또 다시 해냈습니다. 1분 25초 993! 이건 정말 믿기지 않는 성적입니다!”

지노 스톰의 기록에 환호하며 놀라던 관객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요한 벙커와 4초를 넘는 시간차이가 났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맙소사. 이번 시즌은 날려먹었군.”

요한 벙커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건 실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준의 차이가 아니었다.

“원인은 뭐지? 엔진부터 전체적인 퍼포먼스가 완전히 다른 것 같은데 말이야.”

요한 벙커는 전광판을 봤다. 말도 안되는 성적을 낸 것은 단 두 팀 뿐이었다. 그 외의 선수들은 요한 벙커와 스텝들의 예측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스미스 형제가 각각 저그불과 프로터스에 영입되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들의 탓이 아닐까 싶군요. 이번 년도에 머신에도 돈을 많이 들였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시상대에 오르기도 힘들겠어. 어떻게 탈출구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 이대로라면 나도 이적하고 싶어질거야.”

“당연합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좋아. 그럼 어떻게든 시상대에는 올라보도록 하지.”

요한 벙커는 의식에서 지노와 길리엄을 지워버렸다. 이 둘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일 가능성이 컸다. 2초 차이가 나는 2번 드라이버를 잡는 것도 쉽지는 않아보였다.

“드워프들의 힘이라는게 놀랍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어.”

원기는 혀를 찼다. 2인자와 3인자 팀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했고, 스미스 형제는 막대한 계약금을 받고 각각 저그불과 프로터스에 스카우트 되었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결과가 나올 것 까지는 생각치 못했다.

“2-3라운드가 지나면 테라니에도 드워프 한 명을 파견해보도록 하지. 아니 가능한 모든 팀에 파견해 보도록 하자.”

“폐차장의 형제들 중에 뛰어난 친구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기는 리디아의 차량에 다가갔다. 잠정 1위였다가 5위까지 밀려난 상태라서 아쉬움은 확실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당초 계획에 어울리는 순위라고도 할 수 있었다. 5위에서 10위권을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했어. 뭘 들어줄까? 말만 해.”

“손에 입을 맞출 수 있는 영광을 주세요.”

리디아는 열정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눈빛이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참으로 소박한 소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디아를 신뢰하기 때문에 내린 명이기는 했지만, 어떤 부탁이 들어올지 내심 기대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정도라면야. 원하는 때, 언제든 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머신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마치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가뿐한 움직임이었다. 갑자기 빛이 바래긴 했지만, 황제 요한 벙커를 랩타임에서 앞지른 매력적인 여성 드라이버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우아하고 가벼운 움직임에 감탄하며,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했다.

그리고 리디아는 헬멧을 벗어서 옆구리에 끼고는 기품있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무릎을 꿇고는 원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사람들은 그녀의 진지하고 엄숙하면서 성스럽기까지 한 움직임에 압도되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 이건.”

원기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리디아의 입술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벼운 입맞춤이지만 우아하고 엄숙한 그녀의 움직임과 결합되니 원기를 순간적으로 동결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문제는 이 동작이 근세에 들어서 레이디에게 신사가 표하는 예절이라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원기의 손등에 입맞추는 사진이 특종이 되어 온갖 언론 기사를 장식했다.

레이디 나이트, 그것이 그녀를 일컫는 명칭이 되었다.

성결한 여기사, 혹은 성기사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당황하는 원기의 사진은 그리 많이 실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습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서 확대되는 과정에서 주로 손만 실렸기 때문이었다.

“손등에 하는 키스가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을 줄은 몰랐어.”

“정말 멋지더라.”

“동화속의 한장면 같기도 하고, 뭔가 눈에 거슬리는 물건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유럽권만이 아니라, 아시아 권에서도 손등에 하는 키스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남성의 손등에 여성이 키스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종종 눈에 띄기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국에서는 인터넷 뉴스 한 구석에 ‘20세 청년 블러드 라인 2를 즐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 2주만에 발견.’이라는 기사가 작게 떴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신만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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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올라온 루키에게 레이싱의 무서움을 보여주도록 하지.”

자비에르는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리디아의 기사를 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미모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예술적인 우아한 움직임으로 회장을 매료시킨 여성 드라이버의 모습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비에르 역시 그 한사람이었고, 리디아의 키스 장면에 배신감과 분노까지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악의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마침 4위였던 그는 5위와 6위를 차지한 리디아와 요한 벙커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결선 경기를 기대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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