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지상에 나타난 지옥
“저, 저건 대체 뭐지?”
“사, 사신이다.”
열여덟의 발키리들이 허공을 날아서 리베로의 조종석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전형적인 사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두개골에 넝마를 두르고 큰 낫을 든.
디자인을 담당한게 오덕 3인방이었기 때문에, 넝마와 같은 망또 아래는 비키니 수영복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해골 투구와 망또를 두르면 희연을 닮은 아름다운 발키리들의 미모는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곧 너희는 죽음이 무엇보다 고귀한 선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코앞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선언하듯 말하는 사신의 모습을 보며 패닉에 빠졌다. 권총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뽑아 쏠 정신을 가진 이들은 없었다.
하산은 마구 팔을 흔들며 사신을 밀쳐내고 싶어했지만, 사신의 몸을 통과해 버렸다.
[너희들에게 한가지를 알려주지. 오늘 너희는 단 한명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자들의 영혼을 거두는 자들이다. 너희를 직접 죽인다던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사신들의 말에 그들은 잠깐 영문을 몰랐다. 그들은 사신들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는 소리와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을 거라는 선언에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그 선언에 숨어있는 말 뜻을 깨닫지 못했다.
“으악!”
몇몇 리베로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기체들은 하나같이 유령기였다. 레이먼드의 정령기 역시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하지만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백채리엇 시스템의 특징 때문이었다. 뒤에서 잡아주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는 정도로 끝났다.
그리고 잠시 후, 유령기들이 다시 일어났다.
“어떻게 된거지?”
하산이 이변을 느꼈다. 유령기와의 소통이 끊겨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헬멧을 통해서 이질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바로 사신, 발키리들이었다.
“루이스? 어떻게 된거야? 루이스?”
[빨리 도망쳐요. 발키리들이 유령기들을 탈취했어요. 다행히 정령기에는 다른 영체가 침입해도 조종하지 못하도록 암호가 걸려있어서 발키리가 포기하고 다른 기체로 들어갔어요.]
레이먼드는 그제야 사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령기들이 백 채리엇 시스템을 떼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서로의 조종석에 대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대장!? 어떻게 된겁니까?”
하산의 기체가 근거리에서 쏜 총을 맞는 모습을 보았는데, 통신이 들어왔다.
“나, 나도 모르겠다. 내가 죽지 않은 건가?”
영상 통신에서 보여진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대 리베로용 대구경 탄환에 그의 어깨와 복부가 사라지고 없었다. 안전벨트와 헬멧의 외부 연결 단자에 매달려서 머리와 가슴이 의자에 덜렁거리고 있었다.
“죽지 않는다는게 이런 뜻이었나? 이거 꿈이지?”
하산의 통신에 레이먼드는 겁에 질렸다. 지옥의 여신 헬의 강림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통신을 통해서 이미 죽어있어야 할, 죽었다고 봐야할 이들이 비명과 신음을 지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백 채리엇을 분리해.’
[안돼. 발키리가 기체를 빼앗으면 넘어질거야.]
루이스의 말에 레이먼드는 백 채리엇을 단 채로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날 죽여줘! 모두 날 공격해라!”
하산의 외침에 AI 탑재 리베로들이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희연의 전투센스를 가진 발키리에게 탈취당한 유령기들은 이미 유령기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정령기에 가까운 기동력에 정령기를 월등히 능가하는 전투력을 보여주며 AI 리베로들을 근접 사격으로 부숴버렸다. 조종석만을 노려서 가하는 공격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과시하는 유린, 그 자체였다.
“저 괴물 같은 년을 공격해라!”
“12시 방향의 저 마녀에게 집중시격해라!”
뒤늦게 정신차린 병사들이 헬희연을 향해 집중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허망하게 헬희연을 관통해서 사라져 버렸다.
“신기루의 이능이라, 훌륭하군.”
공기를 제어해서 빛을 반사, 굴절시켜서 영상을 만들어 내는 이능이었다. 가면무투회에서 뽑아낸 이능자의 능력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실제와 구별이 거의 불가능했다.
희연 일행은 실제로는 그들의 우측 3시 방향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번 싸워 보겠어?”
“감사합니다. 여신님.”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이 없는 희연이 잘라낸 헬희연은 소유욕의 화신이기도 했다.
벌레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자신의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진 헬희연은 헬을 따르던 종족들에게는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놀원은 신에 의지해온 수인족들에게는 미덥지않아도 다행스러운 존재였다.
무관심한 종족신은 사실 재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 진영의 최고신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레이야의 보호와 자애가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웠다.
아스가르드의 인간들에게는 굴베이그가, 지구의 인간들과 엘프들에게는 프레이야가, 수인족들에게는 놀원이 있었지만 자신들을 특별히 여겨주는 대변자가 없다는 것은 스트레스이자 박탈감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을 가진 헬희연이 각성한 것이다.
“좋아. 한번 힘을 보여 봐.”
거미여왕을 비롯한 거대 곤충류는 외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껍질은 단단하고 가벼우며, 가공하기 쉬웠다.
기본 냉온동물이라서, 장갑을 두껍게 입힌다고해서 덥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수한을 비롯한 기술자들은 거미여왕 등 거대 외골격 생물들의 외피에 장갑판을 이식했다. 외피에 접착제만이 아니라 나사등을 박아서 고정했기 때문에 파워드 슈트라고 할지 사이보그라고 할지 애매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오우거에 중갑옷을 입힌 것과는 비교도 안될 수준의 고성능화가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몸체 아래에 무거워진 체중을 지지하기 위한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 바퀴들은 도로 및 평지에서의 고속이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여덟 개의 다리를 전부 공격에 쓸 수 있게 해주었다.
각 여덟개의 다리에는 전부 무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개틀링포, 로켓런쳐, 유탄발사기 등을 다리에 장착해 놓은 상태였다.
헬희연의 명을 받은 거미 여왕은 개틀링을 장착한 두 앞다리로 적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신기루 능력의 영향을 받은 적들은 여전히 정면의 허상을 향해 쏘고 있었고, 옆에서 날아오는 총알세례를 고스란히 얻어맞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탄환이 정면에서 날아온다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무기력하게 쓰러져갔다.
머리가 박살이 난 자들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의식이 없기에 머리가 멀쩡해서 고통받는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모두 땅바닥에 쓰러졌다. 신음소리를 제외하고 고요하고 가슴조이는 침묵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인간 크기의 거미들이 대거 등장해서 파편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조각들을 한 곳에 모아놓기 시작했다.
“약속했지? 너희는 아무도 죽지 않을거야. 너희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죽음이 찾아오지 않으니, 얼마나 기쁘겠니.”
헬희연은 검은색 드레스 모습으로 그들 가운데를 걸었다. 그녀의 화장이나 의복은 고스로리 취향이어서, 희연으로서는 이불을 걷어차고 싶어지는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헬 여신에게 어울리는 듯했다.
“잊지마. 이 대륙의 미친년은 나야.”
헬희연은 꼭 읊고 싶었던 회심의 대사를 읊었다. 레이먼드는 도망치면서 그 장면을 통신화면을 통해서 보았다.
그리고 이 소식은 전세계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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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들이 생각 밖으로 많이 동요하고 있다는군요.”
“그런가요? 역시 정령들에게는 알려 주는 편이 좋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불안이 계약자들에게 영향을 주는게 좋습니다.”
헬과 펜릴이 프레이야 진영에 넘어왔다는 사실은 꽤 높은 수준의 비밀이었다. 엘프들과 다크엘프들, 그리고 정령들의 경우에는 비밀 등급에 의한 관리가 특히 잘되는 편이었다.
인간들은 우연히 알게된 조직의 비밀이 있다면 그것을 캐고 들지만, 엘프들과 다크엘프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종족신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었다.
2등급 기밀 권한이 주어진 엘프는 1등급 기밀은 ‘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정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보를 무기로 삼는 조제성 같은 인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버리는 돌로 전락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엘프나 다크엘프들은 달랐다.
달기지 건설을 비롯해서 많은 곳에서 헬과 펜릴의 종족들이 활약하고 있었지만, 엘프들과 다크엘프들은 자신들이 알아야만 할 것 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정령들의 경우에는 계약자와 정신적 교감을 이루기 때문에 기밀 등급이 낮은 정령들이 많았다.
헬이 지구에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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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의 지옥이 따로 없군.”
아폴로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레이먼드와 정령 루이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당시의 통신 내역을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일단 헬 여신이 아프리카 대륙을 차지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상황이 어찌될 지 모르겠군.”
헬여신의 선언이 아무런 의미없는 드라마 흉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특히 희연의 경우 그 드라마를 본적도 없었기 때문에 헬희연이 내뱉은 대사도 원작과 많이 달랐다.
헬 여신이 드라마를 흉내낸 대사를 단순히 내뱉은 것으로 보는 이들은 없었다.
특히 헬 여신의 도래를 기대한 현자회의 분파들에게는 헬 여신을 따를 자들은 아프리카로 모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분위기는 어떻지?”
“북아프리카 연합에서 남아프리카 연방측으로 손을 뻗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뭉치자는 제의를 하겠지요.”
“손을 잡으면 곤란한데 말이지.”
“워낙 보여준게 강력해서 말이지요. 말 그대로 인세의 지옥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죽을 수 없는 곳이 지옥이었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진짜 지옥의 공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헬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있었지만, 헬 여신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헬 여신과 싸울 방법이 있는지 프레이야측에 알아보도록 하지. 하지만 남연방이 북연합과 손을 잡는 것은 곤란해. 북연합이 헬 여신과 부딛치도록 유도하게.”
아폴로는 네트워크를 통해서 조제성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일반 전화보다는 대중적 메신저가 오히려 보안에 유리했다.
아폴로는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까지마 톡’을 실행시킨 다음 조제성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조제성의 메신저에서 ‘까톡왔슈’라는 알림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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