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여신의 근위대
머리만 남아서 고통받는 학살자들, 헬 여신의 알현실을 장식하고 있는 그들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듯 보였지만 모두가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고통이라도 마음가짐에 따라서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내 라드는 비교적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고통에 괴로워하면서, 많은 것을 원망했다. 하지만 그를 구해준 것은 양심의 가책이었다.
자신이 저질러온 짓들에 대한 죄의식이 곧 그의 머리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학살을 방관했으며, 나아가서는 참여했다.
방관하기도 힘든 죄악이었지만, 어느샌가 무덤덤해졌다.
여성을 범하고 죽이는 것도 어느틈엔가 일상, 곧 관행이 되어 버렸다.
죄의식은 사라지고 짐승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헬 여신에게 응징당하고 끝을 모르는 고통 속에서 그는 온갖 생각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래? 남들도 다 하는 짓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한 짓들이 차츰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는 스스로가 ‘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지옥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스가르드에서 지옥이 유명무실해진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은 늦건 이르건,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는 고통을 달갑게 받아들인다.
때로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자해로 완화시키려는 이들이 있는 것과도 같았다.
라드는 그렇게 차츰차츰 제정신을 찾고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곧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헬 여신의 알현실은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장소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헬 여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눈치챈 것들은 꽤 많았다.
‘헬 여신님은 한국어를 주로 쓰는군. 이건 의외야.’
라드는 조직내에서 비교적 인텔리에 온건파였다. 그래서 그는 정체를 숨기고 외부와 교섭하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몸을 숨길 장소로 선택된 후보지가 한국과 일본이었다. 중동인이나 아프리카계 흑인의 얼굴을 잘 구분을 못하고 테러에 대한 경계가 심하지 않은 나라였다.
테러를 일으키기는 어렵지만, 몸을 숙이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기에는 꽤 좋은 나라였다. 치안이 좋은 편이라서, 사고에 휘말릴 가능성도 적었다.
라드는 그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를 인사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아는 단어들만으로도 꽤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음, 진짜 헬 여신님이 나오시는 건가?’
그는 헬 여신이 한 몸을 공유하는 두 인격이라는 사실을 곧 눈치챘다. 어느쪽이 진짜인지는 사실 알 수 없었지만, 여신다운 카리스마가 있는 쪽을 진짜로 가정했다.
진짜가 등장하는 것은 알현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잡일을 처리하는 벌레형 인간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벌레형 인간들이 부리는 작고 큰 벌레들도 함께 모습을 감춘다. 헬 여신의 눈에 띄여서는 안된다는 사명이라도 가진 것과도 비슷했다.
‘특이한 건 헬 여신의 천사라고 할까 사신들의 태도였지.’
가짜가 헬 여신의 전면에 있을 때는 사신들의 모습은 사신 같지도 천사 같지도 않았다. 아시아의 불량한 소녀들과 비슷했다.
껌을 씹고 자세는 풀어져서 이곳저곳에 기대거나 뒹구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헬 여신의 육체에 진짜가 강림할 때는 달랐다.
그들의 모습은 군인을 넘어서 진짜 천사나 사신을 보는 듯 했다.
‘진짜 사신인데 그걸 의심하게 만드는게 이상하지.’
그는 잡스러운 생각에 피식 웃었다. 이미 죽어서 머리만 남은 몸,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도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게 어색했다.
헬 여신에게 알현을 청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았다.
거의 모든 세력이 헬 여신과 거래를 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프레이야 여신과 템플 기사단과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었지만, 거래 상대로는 아군 보다 적이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헬 여신과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지만, 거래는 요청했다.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기술, 물자, 그리고 일부 세력에서는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신성력에 의한 기적이었다.
세계수의 수액, 다양한 생물 샘플, 여신의 기적 등이 거래의 대상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싶다며 접근하는 이들도 있고, 죽어가는 이를 살리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무리다. 육신은 창조해도 영혼을 되돌릴 수는 없다. 남의 것을 빌려오거나 대체품이라면 만들 수 있지만, 너희가 원하는 것은 아닐테지.”
헬 여신이 거래가 되는 상대이며,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각세력들은 물밑으로 많은 거래를 시도했다.
라드를 놀라게 한 것은 헬 여신의 뒤에 흑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지?”
“음. 생각해보니까, 내가 되고 싶은건 네 에인페리아였어.”
카즈키라고 불리운 아시아 소녀는 헬 여신에게 서슴없이 말을 놓았다. 그리고 자신을 에인페리아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여신과 대등하게 말하는 소녀의 존재는 라드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 뿐이 아니었다.
“여. 너희들이 사용할 리베로를 가져왔다. 특별 사양이야. 아스가르드에 보낸 생체형 리베로를 더 강화한 모델이다. 헬 여신과 헬 여신의 수석 에인페리아가 사용할 생체형 리베로들이지.”
“강화판인건가요? 꽤 괜찮아 보이는군요.”
헬 여신은 진중함이 부족해 보이는 사내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반면 사내는 헬 여신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헬 여신의 외모는 이국적이고, 카즈키라는 수석 에인페리아 소녀의 한국말은 라드도 눈치챌 수 있을만큼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헬 여신과 카즈키는 종종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장수한이라는 사내는 어디로보나 한국인이었고, 그런 그가 말을 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래. 신성력이 대량으로 필요해서 여신이 탑승하거나, 고레벨 성역에서만 운용가능하지만 덩치도 크고 부드럽게 움직이지. 민첩함도 엘프를 키워놓은 수준이야.”
“오, 그거 대단해보이네. 재밌겠는걸. 리베로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나도 에인페리아로는 탈 수 있는거지?”
“물론이야. 네 것도 출력이나 성능에선 큰 차이가 없어. 다만 성역에서 나가면 활동 시간이 좀 떨어지지. 여신과 에인페리아의 차이라고 보면 될거다.”
“그거 괜찮은 걸.”
카즈키는 둘만이 같은 리베로를 사용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카즈키의 마음 속에서 부동의 일위를 차지하는 것은 희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생체 강화형 리베로, 약칭 ‘생리’라고 부르기로 정했지. 너희 두대를 합쳐서 ‘여신의 생리대’라고 정했다. 앞으로 많은 활약 바란다. 생리대.”
라드 역시 생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여성의 근로조건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리나 생리대에 대한 언급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여신에게 성적 농담을 성희롱 수준으로 던지는 사내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최종 흑막과 만났다.
“이름이 라드라고 했던가? 이 친구 눈빛이 다르군.”
헬 여신에게 정중한 말투로, 명백한 지시를 내리던 사내는 라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라드의 상태를 알아챘다. 조제성은 비서의 손에서 태블릿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라드에 대한 상세 정보를 살피기 시작했다. 절망속에서 그들이 외친 절규 안에는 고문으로 얻을 수 없는 다양한 정보들도 들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여러 차례 드나든 기록도 있고, 그냥 넘어가기는 좀 그렇군. 혹시 인간을 그만둘 생각 있나?”
남보다 빠른 반성과 깊은 후회, 그것이 라드의 운명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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