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투자
“아, 이...이건, 그게 아니고...”
호철이 상황을 눈치챈건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상태였다. 호철은 당황해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한거지.’
입에 들어온 세계수의 술은 꽤 맛있는 편이었다. 호철이 당황한 것은 그저 예상한 맛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중증 오덕들에 흔히 보이듯 호철은 미맹에 가까울 정도로 음식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마, 맛있는데, 전에 먹던, 아니 마시던 것과 좀 맛이 달라서.”
그 순간 사람들의 눈이 더 싸늘하게 변했다. 별볼일 없는 녀석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장소는 보잘 것 없는 재벌 3세가 나설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대박그룹이 요새 잘나가나 봐요. 후계자도 아닌 사람이 이런 귀한 술을 자주 마시나보지요?”
그제서야 호철은 자신이 말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러움과 당혹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 때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평소에 드시던 것으로 가져왔습니다.”
허깨비가 나타나듯이 소리도 안나는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엘프 하나가 호철의 옆에 나타났다. 턱시도가 대단히 잘 어울리는 늘씬한 엘프 여성은 호철의 잔을 뺏고 고급스러운 빈 잔을 넘겼다. 그리고 아름답게 장식된 술병을 따고는 호철의 잔에 따랐다.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분홍빛과는 다른 선명하고 신비로운 금빛의 술이었다.
‘아, 이거였지.’
호철은 평소에 마시던 엘프주를 비로소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같은 술일 리가 없었다. 프레이야 여신을 위해 엘프들이 특별히 빚은 술이었다. 여신에게만 바쳐지던 술이어서 술을 빚는 엘프들 일부가 맛을 보는게 고작인 물건이었다.
‘이렇게 빛나던 물건이었나.’
호철이 못알아본 이유는 이 술을 마실 때는 프레이야 여신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 여신의 존재감 앞에선 이 술의 존재감은 달빛앞의 반딧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병은 여기 두겠습니다.”
엘프는 병째로 호철 옆에 두고 물러나려고 했다. 그 때 옆에 있던 사람이 황급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웨이터 역할을 하는 엘프들이지만 결코 범상치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저, 이 술과 저 술은 전혀 달라 보이는데요.”
“예. 지금 들고 계신 것은 세계수의 꿀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저것은 세계수의 과실로 만들어진 것이지요.”
“과실주요?”
그녀가 반문하자, 엘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나려고 들었다. 그러자 황급히 다른 손님이 말을 걸었다.
“여, 여기도 과실주 한병 가져다 주겠소?”
리셉션 장에서 나눠주는 세계수의 술은 단 한잔만 제공되는 것으로 이미 알려져 있었다.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한잔 이상 얻어 마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됩니다.”
엘프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엘프의 얼굴에는 황당한 요구를 들은 듯한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조각같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계수의 과실이라니, 귀한 것인가 봅니다.”
리디아와 환담을 나누던 고위 정치가가 넌지시 말을 건냈다. 리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꽃은 마치 벗꽃처럼 나무 전체에 피지요. 하지만 과실은 단 하나만 열립니다.”
“호오, 그거 낭만적이군요. 왠지 에덴 동산에 있었다는 선악과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귀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도 한 잔 얻어 마실 수 없을까요?”
그 순간 리디아의 얼굴도 싸늘하게 굳었다. 리디아조차 한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입에 댈 생각도 없었다.
여신께 바치는 술은 모두 여신의 것이었다. 여신이 친히 하사한 이들 외에는 감히 넘봐도 될 것이 아니었다.
여신은 몇몇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마셔도 좋다고 허락했고, 그 사람들 가운데 호철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리디아의 차가운 거절에 상대는 꼼짝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호철에게 쏠렸다.
호철은 난감해졌다.
‘이게 그렇게 귀한 물건이었나?’
팔 수도 없고, 따로 마실 사람도 없으니 마음껏 마시라고 들었던 물건이었다. 세계수마다 하나씩 열리지만, 프레이야의 세계수도 한그루는 아니었다. 그리고 실체가 없던 여신은 과실을 먹지 않았고 장기 보관을 위해서 술로 담가놓은 것이었다.
한해 열 병 정도가 만들어져서 수백년 쌓인 탓에 술창고가 가득차 있었다. 원기 역시 관심이 없어서 그냥 남아도는 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뭐해, 호철아. 회장님 가져다 드리지않고.”
아저씨뻘되는 친척이 황급히 다가와서 호철의 옆구리를 치면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호철에 대한 경멸이 드러나 있었다.
운좋게 보물을 손에 넣은 얼간이라고 자신을 보고 있는게 역력했다. 호철은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 어.”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호철은 더 짜증이 났다. 자신에게 가져다 준 술을 자신이 마시는데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말인가. 호철은 이 술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프레이야 여신과 함께 있으면 빛이 바래는데다가 창고 안에는 제법 많은 수가 있었다. 자신이 몇십 병쯤 가져간다고 해도 프레이야 여신은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이놈이 미쳤나?”
호철은 그 소리에 무심코 회장의 모습을 봤다. 그의 눈빛에서도 황당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욕망도 느껴졌다. 제국을 꿈꾸는 박천권 회장은 장수에 대한 집착도 적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제국을 물려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자식들보다 손자들보다 오래 오래 살면서 악착같이 지배할 생각이 호철에게는 뻔히 보였다.
“에이, 젠장. 별로 맛도 없네.”
호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병을 들어서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호철은 술기운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엘프주라고 하지만 술은 술이었고, 술이라는 것은 취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억하심정이 터져나온 호철은 거침없이 그리고 좀 비틀거리면서 베이더 복장을 한 자신의 대역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멱살을 잡았다.
“저, 저거 잡아!”
경비를 서던 보디가드들이 빠르게 움직여서 호철을 제지하려고 달려갔다. 리디아와 베이더, 그리고 엘프들은 국빈이었고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호철을 제지하기 위해서 다가가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엘프들이 나타나서 경비원들의 목에 레이피어를 겨눴다.
“멈춰라. 접근하면 용서치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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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철이 녀석이 사고를 쳤군요.”
“잘된 일이야.”
제성은 웃으면서 말했다.
“호철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원기의 정체도 드러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건 좋지 않을텐데요.”
“아니지. 필요한거야. 정체가 드러난 이상은 본체를 위험하게 방치하지 않아도 될테니까.”
조제성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초기에는 원기의 연예 활동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금전적으로 이득도 있고,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원기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경제적 규모가 커지고, 원기 역시 해야 할 일이 많아진 지금은 의미가 별로 없었다.
반면 원기의 본체의 중요성은 생각보다 커진 상태였다.
캐릭터가 소멸당한다고 해도, 본체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은 본체를 소중히 모셔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프레이야 여신의 아바타가 공격받아서 계정까지 통째로 날아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프레이야 여신이 신성을 잃는다고 해서, 프레이야 여신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엘프들의 충성심은 프레이야의 신성이 아닌, 프레이야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엘프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이미 굴베이그와 헬, 펜릴의 신성까지 손에 넣은 이상은 프레이야의 신성을 대체할 대체재도 충분히 있었다.
원기 그 자신의 중요성과 의미는 커진 반면에 프레이야 여신의 신성은 과거에 비해서 그 중요도가 적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바니걸 통신은 본연의 이능이니.’
프레이야의 신성 캐릭터를 잃는다해도, 바니걸 통신을 쓸 수 있는 원기에겐 그리 큰 타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조제성은 이번 사건을 잘 된 것으로 판단했다.
“혹시 이것도 의도하신 건 아니겠지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그저 언젠가는 정체가 드러날 것이 분명하다고 봤지. 그리고 그 시기가 위기가 아니길 바란 것 뿐이야.”
“여전하시군요.”
장수한은 조제성이 한국쪽 초대장을 많이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닐터였지만, 어디로 굴러갈 지 모른다해도 되도록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굴러가기 쉽게 손을 쓰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호철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것을 최우선이라고 명했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아무리 엘프들이라지만 세계수의 과실로 만들어진 술을 가지고 다닐 리는 없었다. 그리고 호철의 정체를 아는 엘프들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호철의 객기에 손발이 맞아떨어지는, 돌이킬 수 없게끔 만들어진 연출은 의도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사람이 나쁘시군요.”
“흠, 자네가 성장한 건지 내 수가 얕아진 건지는 잘 모르겠군. 이것 가서 검토해보게.”
조제성이 내민 것은 대박그룹과의 협조 계획에 대한 것이었다. 대박그룹은 호철의 존재를 알게된 이상,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들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조제성은 그 계획을 역이용하는 것이었다. 호철을 통해 대박그룹에 특혜를 주고, 그와 함께 호철의 비중을 키운 다음 통째로 대박그룹을 먹어치우는 계획이었다.
“으, 이런 앞일까지 염두에 두신 겁니까?”
“대박그룹에 투자 정도는 해둬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대박그룹의 주인을 호철로 만들어 버린다면, 대박그룹은 든든한 아군이 되게 되는 것이었다.
계승권가진 재벌 3세라는 카드는 사실 낭비하기는 아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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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너였어?”
베이더의 투구를 벗긴 곳에서 나온 것은 다크엘프 여비서인 마고였다. 호철은 기운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
마고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호철이 주위를 둘러보자, 그를 보호하듯 등을 보이는 엘프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고를 쳤구나. 속은 좀 어때? 시원한거야?”
호철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프레이야 여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엘프주 병이 들려 있었다.
“한잔 더 할래?”
프레이야 여신의 등장과 동시에 장내는 조용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일부 엘프 전사들을 제외한 엘프들은 프레이야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굽히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다른 초대객들도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일 망친 건 아니지?”
“나야 모르지. 조승상께서 잘했다고 술한잔 하사하면 어떻겠냐고 그러더라.”
“그래? 다행이다.”
호철역시 조제성이 괜찮다고 하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제성의 눈치를 본다기 보다는, 역시 프레이야의 일에 도움이 되고 싶지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여신이 술을 따라주자, 호철은 담담히 받아 마셨다. 하지만 그 모습은 사람들의 인상에 깊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곧 사람들의 눈빛이 경악에 사로잡혔다. 조제성의 이야기에 긴장이 풀린 호철이 갑자기 올라온 술기운 탓에 빈대떡을 부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여신의 드레스 위에 부쳐버렸다.
“짜식, 맘 고생이 심했나보구나.”
원기는 별다른 내색않고 호철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친구 사이에선 있을 법한 일이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그런 장면을 볼 때, 원기는 전신 화상의 후유증을 앓고 잘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홀로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고민하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아우성치는 모습은 그런 원기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면서, 자신에게는 없을 일처럼 느껴졌다.
‘막상 당해보니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은걸.’
원기는 가까운 곳에 있는 보울을 가져다가 호철의 입 아래에 받쳐놓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프레이야 여신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어린 시절의 비참한 시절의 사소한 꿈 하나가 이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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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이다.’
‘대박그룹에 대박이 터졌다.’
‘퍼스트 컨택터가 대박 그룹의 자식이었나?’
퍼스트 컨택터, 가짜 베이더를 지칭하는 인물이었다. 다스베이더의 분장을 한 지구인이자, 외계인 프레이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마고에 대해서는 이미 가짜 베이더의 비서 역할을 하는 엘프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베이더의 대역을 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국에 우주 전함이 빨리 배정된 것도 저 친구의 덕분인건가?’
‘자칫 잘못하면 우주 개척 사업의 창구가 대박 그룹이 되겠군. 아니 이미 된 것이나 다름없나?’
대박그룹의 주가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 이전, 호철이 프레이야 여신의 계약자가 되는 순간부터 조제성은 대박그룹의 주식을 틈틈이 사 모은 상태였다.
“왕좌 쟁탈전에는 계승 순위가 어떻게 되든 왕위 계승권자가 없으면 안되는 법이지. 돼지는 살찌운 다음에 잡아야 하는 법이고.”
조제성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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