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왕위 계승
“저보고 회장을 하라고요?”
“그래. 왕위계승을 하는거지.”
조제성의 말에 호철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감히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다. 아니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지배욕의 화신인 박천권이 친족들을 길들인 탓이었다.
철저하게 길들여진 친족들은 감히 박천권을 거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던져주는 고기 한조각을 위해서 서로를 질시하며 피튀기게 싸울 뿐이었다.
그에게 가족은 일종의 수집물에 지나지 않았다.
소중하게 가꾼 인위적인 정원이나 다름 없었다. 인격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호철 역시 철저하게 뒤틀린 한그루 분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저주와 같은 세뇌에서 꽤 해방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거, 왠지 듣기 좋군요. 하지만 귀찮아요.”
호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조제성은 쓴 웃음을 지었지만 예상의 범주 내의 일이었다. 아니 예상에 꼭 들어맞았다.
호철은 돈에 아쉬운 일은 없었다. 취미 생활에 쓸 돈은 궁한 편이었지만, 밥을 굶을 일도 집에서 쫓겨날 일도 없었다.
정신적 압박을 못견뎌서 취미생활로 도망쳤지만, 취미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프레이야 여신으로 인해서 정신적 안정도 얻었다. 딱히 야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남아있지만, 야심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조제성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넌 바지사장, 아니 바지회장을 시켜줄테니. 회사를 키우면 키웠지 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귀찮은 일들은 대부분 네 대역을 이용해서 내가 처리할 것이다. 네 집안 재산을 프레이야 여신님을 위해서 유용하게 써주지.”
조제성의 말에 호철은 할 말이 없었다. 대박그룹에는 많은 고용인들이 있어서, 그들에 대한 책임감은 호철에게도 조금은 있었다. 그런 면까지 고려해서 한 말이었다.
“역시 승상님이시네요.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
호철은 담담하게 말했다. 현회장인 큰할아버지에게 가진 감정은 꽤 복잡한 것이었다. 길들여진 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의 총애를 갈구하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친족들은 좋은 감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그들을 미워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자신이 나쁘다고 자신을 비하해온 탓이기도 했다.
물론 총수에 대해서 딱히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한이형이 알아서 조율해 주겠지.’
조제성 자신이 흠잡을 수 없게 일을 하기 때문에, 호철로서는 큰할아버지에서 조제성으로 회장 자리가 넘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어디가서 회장이라고 자랑할 수 있겠네.’
호철은 김칫국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 조심해야겠다. 너무 좋아하는 티내면, 회장자리를 맡길지도 몰라.’
호철은 회장자리를 좋아하는 구석을 조제성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그게 그가 편안함을 얻기 위해 배운 처세술이었다.
얼굴마담이든 바지사장이든 업무량이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힘들어지기 쉬웠다. 그는 달기지에서 우주전함과 우주용 가변형 리베로 개발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 유감이지만 당분간은 좀 바쁠거야. 박천권회장 앞에서 쩔쩔매는 연기는 발키리에게는 무리거든. 나중에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좀 수고해야 할거다.”
조제성은 그런 호철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이 못을 박았고, 호철의 표정은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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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속 엔진의 연구에 유명 과학자들이 몰려들었다더군요. 저도 그쪽 연구를 해보고 싶었는데요.”
“멍청한 소리야. 불쌍한 녀석들이지. 헛수고야.”
“광속 엔진 연구에 프레이야 여신측이 전적으로 협조한다고 하던데요?”
“솔직히 말해서, 그건 ‘신의 기적’이나 ‘마법’에 가까운 거야. 과학적으로 언젠가는 해명할 수 있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어림도 없지. 네가 신경써야 할 것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고 할 수 있다. 광속이동처럼 보이는 순간이동을 ‘현상’이라고 접근하는 거야. 일단 광속이동이라는 현상이 있어. 이 현상이 ‘왜’일어나는지를 연구하는 것도 있지만, 이 현상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연구하는 것도 가능하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엔 후자가 답이야.”
주임 연구원의 말에 연구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 과학자들의 참여에 가슴이 설렌 것은 사실이지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국가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자신이 사실 더 유리한 것은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왜 프레이야 여신은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소개한 거지요?”
“아마도 오딘과 싸우게 하기 위해서일거다. 우리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테마지. 외계인하고 싸우기. 반면에 신하고 싸우는건 상상하기 힘드니까. 좀비와 외계인은 미국인들에게 익숙하고 좋아하는 테마지.”
“왠지 부정하기 힘드네요. 신무기를 개발해서 외계인하고 싸운다니 정말 기대가 되기는 하네요. 파워드 슈트도 속속 개발되고 있고.”
“그것만은 아닌 듯도 하지만.”
주임연구원은 혀를 찼다. 프레이야 여신은 인간을 신자로 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소문은 이미 ‘아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퍼진 상태였다. 30년 내에 지구를 떠날 거라는 보장도 했고, 달기지 반환까지 약속했다. 그리고 신자들은 프레이야 여신과 함께 떠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미 맹세해버린 사람들은 틀렸다는 소문도 있었지.’
그는 씁쓸한 듯 혀를 찼다. 프레이야 여신을 부정하는 말을 하면, 그녀의 신자가 될 수 없었다. 바니걸 통신을 듣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신자로 간주했다.
프레이야를 부정한 이를 풀어주는 것은 신관들 뿐이었고, 대다수는 엘프들이었다. 그리고 엘프들은 자신들의 신을 믿겠다는 인간들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한번 프레이야를 부정한 이들이 프레이야 신자가 될 가능성은 극도로 희박했다.
‘우주 진출의 길은 열렸지만...’
가능하면 프레이야 여신과 함께 떠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을 달래는 주임연구원이었다.
현 시점에서 우주 진출은 나사보다는 미공군쪽이 더 유력한 상태였다. 나사에 있어서 프레이야는 외계인이었지만, 미공군측에는 고대 신화의 존재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공간이동을 광속이동으로 연구하는 행동으로 무언가 성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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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이 안되게 생겼는걸.”
한때 게임기 취급하는 가게로 넘쳤던 상가 건물이지만, 현재는 장수한이 운영하는 게임 가게 하나가 한층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손님이라고는 정말 찾기 힘든 데다가 매장 빈자리만 가득한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었다.
장수한과 박호철, 최찬균은 그런 매장 한구석에 천막같은 공간에서 머무르며 장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곳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호철의 정체가 드러난 탓이었다.
원기와 희연에게도 조사의 손길이 미쳤지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원기와 희연이 장수한과 호철, 찬균과 어울렸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게임을 통해서만 만나서, 그런 부분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원기 본체 대신에 게임 캐릭터를 투입한 것을 제외하면 원기에게 그리 바뀐 것은 없었다.
“니가 칠칠치 못하게 토해서 그래.”
장수한의 말에 호철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자신이 벌인 짓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좀 황당했다.
“그때는 프레이야 여신님이 원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호철은 말이 되는 듯, 안되는 듯한 말을 했지만, 수한과 찬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게임 보러오셨나요?”
장수한이 가까이 다가온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매장에는 신형 게임은 별로 없었다. 장수한이 전부터 모아온 고전 게임기들의 중고 물품들 뿐이었다.
“안살거라면 오지 마세요. 다른 용건은 다른 창구로 받겠습니다.”
장수한의 말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호철에게 줄을 대보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수한의 모습을 발견했다. 과거의 서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학교 선생 출신의 장애인이라고 조사했지만, 건강을 찾고 외견도 좀더 다듬어진 탓에 과거의 사진을 통해서는 연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리고 장수한의 현재 모습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여신의 심복 중 하나인 것이었다.
장수한의 이능인 이종족 사랑은 엘프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모든 이종족들에게 어느정도씩 통용이 되었는데, 한가지 웃긴 것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에게도 조금씩은 통했다.
사회에 좌절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판타지 세계에 대한 동경이 나은 것이 이종족 사랑인데,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미약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한국인을 제외한 모든 지성체에게 통용되는 특수한 이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효과는 아시아인에게 미약하고 백인과 흑인에게 조금 더 강력한 편이었다.
아마도 외계인이 나타난다면, 외계인에게도 적용될 것이 분명한 이능이었다. 미약하지만 외국인들에게도 호감을 얻는 능력이 있고 말발도 좋고 제성의 의향을 잘 읽는 능력이 있어서, 리디아와 함께 프레이야 진영의 교섭에 나서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수한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철보다 더 큰 대어이면서도 쉽게 넘보기 힘든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호철이 거대한 참치라면, 장수한은 모비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너 때문에 나도 피곤해지게 생겼다.”
장수한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조만간 어떤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이권이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수 이전 계획이 실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염병 사태로 인해서 세계수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 노출된 세계수의 위치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세계수는 건강을 공급하고 병으로부터 지켜줄 뿐만 아니라, 이능을 각성시켜 주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이었다. 이능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도시괴담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당연히 세계수가 있는 지역의 땅값이 꿈틀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었다.
대기업 총수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세계수 영향권 안으로 이사를 했고, 그 혜택을 몰래 누렸다는 사실이었다.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세계수의 이전이 필요하다며 대사관 부지를 요구한 것이 조제성이었다.
모든 세계수들은 곧 철수될 것이지만, 대사관 부지를 제공한 곳에 이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사관 부지에 맞춰서 세계수가 배정되고, 부지의 70%는 설치한 국가의 재량에 맡기겠다는 것이 조제성의 제안이었다.
부지가 크면 세계수를 그 부지에 맡게 성장시킬 수도 있다는 조건을 담았다. 반대로 부지가 작으면 세계수의 성장을 정지시킬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이로 인해서 각 국가들은 세계수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비벼볼 구석은 장수한과 리디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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