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적과 아군
“전쟁에 대해서 유명한 말이 있지요. 늙은이들이 시작하고 젊은이들이 죽는다. 일단 전쟁을 일으키는 놈들은 권력자들입니다. 여론을 선동하는 놈들도 마찬가지지요. 반면에 죽는 놈들은 뭐 사회적 약자라고 해야겠지요. 이들의 죽음은 보통 가볍습니다. 쉽게 잊혀지지요. 전쟁 피해자들이라고 해봐야, 사실 사회적 약자들이고 그들의 죽음의 값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게 현실이라고 해야겠지요.”
조제성의 말에 장수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헬이 벌인 난동으로 인해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긴 했습니다만, 세상을 거시적으로 본다면 실질적인 피해는 줄었습니다. 이 동네가 종교적인 문제와 자원적인 문제로 피해가 큰 곳이었거든요. 식량 부족으로 죽어가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헬이 등장한 덕택에 전쟁이 화려해지긴 했습니다만, 소년병들의 수요도 줄었고 다수의 리베로들이 참전했기 때문에 보이는 것보다는 인명 피해도 줄었습니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죽이고 죽는게 현실이라는 점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만.”
조제성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원기는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라면 내가 듣는 것보다는 여신이 들어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원기는 프레이야 여신의 아바타에 대해서 익숙해졌다. 다만 익숙해진만큼 내적인 구분도 나름대로 되어 있었다. 원기 자신은 잠옷이나 츄리닝같은 느낌이었다. 편하고 홀가분한 복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신의 아바타는 정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불편하지만 필요한 장소에 필요한 복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호화로운 연회장이나 격식있는 자리에선 잠옷바람이나 츄리닝 차림이 부끄럽다고 할지, 불편한 법이었다.
그리고 조제성 역시 그런 눈치를 챘다.
“이건 좀 사소한 변명이었습니다. 일단 헬이 적이라는 사실은 역사적 근거를 통해 봐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말처럼, 국제사회는 이익에 민감하기 때문인겁니다. 오딘이라는 대적이 등장하게 된다면, 헬과 손을 잡는 것은 별일 아니게 됩니다. 히틀러의 경우에도 서방세계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편을 들어줄거라고 생각했지요. 유태인 학살이 아니었다면 그 시나리오대로 갔을지 모릅니다. 집시들이 더 많이 죽었고 더 비참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런 사실들은 쉽게 잊혀지고, 유태인 학살만이 조명받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지요. 소련과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손을 잡았던 것처럼, 국제 사회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손을 많이 써 둔 상태지요. 헬 여신의 혜택을 받고있는 고위층들이 적지 않습니다. 라스푸틴이 많이 기여를 했지요. 헬이 악역인 것은 오히려 좋은 면도 있습니다.”
“좋은 면이라고요?”
“예. 헬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세계는 많은 것을 양보할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 두었지요.”
원폭을 견디는 성역의 방호력은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힘으로 꺾는 것은 쉽지 않은 상대라고 세상이 여기게 된 것이었다. 대적할 수 있는 것은 프레이야의 전력이지만, 오딘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을 아껴야 한다는 사실도 이미 납득한 상태였다.
조제성은 라스푸틴을 이용해서 많은 어둠의 권력가들과의 연줄을 추가로 확보했다. 대기업을 좌우하는 이들이 드러난 벼락부자라면, 수백년에 걸쳐서 사회를 지배해온 이들이 유럽에는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라스푸틴과 현자회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현자회를 이루는 흡혈귀 가운데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생제르망같은 인물도 있었다.
“이미 각국의 지도자들과 협의중입니다. 헬이 오딘과 대립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내세울지를 고민중이지요. 라스푸틴과 생제르망이 교섭에 나섰습니다.”
원기는 제성의 발언에 황당함까지 느껴졌다. 헬을 인류의 적대자로 내세운 것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 나름대로 걱정해왔기 때문이었다. 헬도 희연의 일부로 여기게 된만큼 헬의 명예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제성은 헬의 악역이라는 입장을 이용해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받을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하는게 절약입니다. 아껴야 잘살지요.”
‘절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좀 다른 것도 같고..’
원기는 조제성을 보면서 내심 머리를 저었다. 미끄러져 넘어지더라도 절대 맨손으로는 안일어날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제성이 그렇다고 해서 불안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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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딘을 칠 수 있는 무기가 우리에게 있지. 그건 틀림없어.”
“그게 뭡니까?”
“세계수 탈취. 씨앗을 지닌 반신급 이능자가 오딘 휘하의 세계수를 탈취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너희들 휘하의 누군가가 신이 될 수 있게 되겠지. 그걸 위한 마법진이 내게는 있다. 프레이야의 세계수를 빼앗고, 내가 신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지. 다만...”
라스푸틴이 말을 끌자, 각국의 지도자들의 눈길이 그의 입으로 모였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지. 난 완전한 신이 되지는 못했다. 인간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인간을 포기한다고 해서, 내가 이대로 있을거라는 보장은 못하겠군.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세계수는 하나 뿐이다. 한 사람당 하나. 그리고 그것으로는 독립된 신으로 홀로 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헬님의 휘하에 들어간 것이지. 나는 그러니까, 반신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신으로 각성하지 않을까 기대는 하고 있다.”
지도자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머리속으로 현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라스푸틴이 호기있게 신이 된다고 말하고서 헬 여신의 휘하가 된 것은 이를 통해 납득할 수 있었다.
“프레이야도 헬 여신님도 적대 신의 성역 내에 들어갈 수는 없다.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지. 하지만 내 마법진이 있으면, 반신급 이능자들 중 누군가가 세계수를 강탈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꽤 큰 메리트가 있겠지. 세계수는 인간이 방출하는 정신력을 신성력으로 바꿔주는 존재다. 세계수의 주인은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지. 그대들 가운데도 씨앗을 가진 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있다. 위험은 따르겠지만, 용기를 갖고 도전해 볼만 할 것이다. 헬 여신님이 날 받아 주신 것도 그 때문이지. 오딘과 로키를 쓰러뜨리고 자유롭게 되실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이지.”
씨앗을 가진 자들은 백만분의 일에 가까운 희소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구 인구는 이미 백억에 육박하고 있었다. 단순 계산으로 만명 이상의 씨앗 소유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 발견된 이들만 3천명이 넘었다. 각국 정상들 가운데에도 세명에 한명 꼴로 씨앗 보유자가 있었고, 가까운 친인척 가운데에 씨앗 보유자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헬만이 아니라 프레이야 여신님도 자립을 도울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 없이, 자유의지를 유지한 상태로 신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요. 오딘의 세계수가 하나라도 더 줄어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여신님께서는 만족하실 겁니다.”
리디아가 말하자, 세계정상들의 눈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자신, 혹은 자신의 입김이 닿는 자가, 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 여신님께서는 조만간 지구를 떠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소?”
“물론입니다. 그 약속은 지켜질 것입니다. 물론 달 기지도 포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화성은 약속 범위에 들어있지 않지요. 그리고 아스가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스가르드에서는 좀 어렵겠지만, 화성에서도 신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시는 것은 가능합니다.”
“아니, 굳이 떠날 필요는 없을 듯도 합니다만...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흠. 아군도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구를 비우는 것은 좋지만, 달을 포기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교류는 계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동의합니다.”
“그런 문제는 좀 뒤로 두고, 반신이라면 그 능력은 어느정도까지 행사가 가능한겁니까? 쓸모 없는 능력은 아니겠지요?”
“일단 세계수의 주인이 된다고 해서, 세계수의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수를 키울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추종자가 필요하다. 그저 소속감만 갖고 있는 것으론 부족하지. 광신자에 가까운 열렬한 신자라면 천명, 이름뿐인 신자라면 최소 십 만명은 필요하지. 그리고 십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성역을 키우려면 최소 십년은 필요하지. 그래서 나는 세계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헬 여신님의 도움이 필요했다. 신성력 부족으로 세계수를 말려죽일 뻔 했지. 세계수 한그루에 최소한 신관 열명 정도는 거느릴 수 있다.”
세계수의 존재 자체가 국력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신관 열명이라고 하지만, 회복마법, 아니 치유의 기적을 펼치는 이들이었다. 죽은 사람은 못살린다지만, 죽지만 않으면 회춘도 가능하게 만드는 기적의 사용자들이었다.
지도자들의 눈에서 오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세계수라는 자원에 대한 탐욕이 자리잡았다.
‘이로서 전황은 크게 움직이게 되겠군요.’
리디아는 조제성이 인간을 다루는 능력에 내심 감탄했다. 그녀로서는 인간의 심리를 읽는 것은 아직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능수능란하게 인간들을 다루는 조련사가 될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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