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파탄
“잠시 쉬다 오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제성의 말에 원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스가르드의 달이 인공 요새라는 사실을 들은게 바로 얼마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데스스타, 혹은 이젤론으로 부르고 있는 이 토르의 달은 당분간 극비로 처리되었다. 조제성은 이를 위해서 위성 중 하나를 고장으로 궤도 이탈시키기까지 했다.
토르의 달에 대해서 알릴 수도 없고,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킬 수도 없기 때문에 벌인 모험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여신님께서 잠시 휴식을 취함으로써 우리도 몰랐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게 되겠지요.”
“저는 아무것도 안하고 노는게 돕는게 되겠군요.”
원기는 납득했다. 사실 원기 자신도 최근에 컨디션이 안좋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온 몸이 간지러운 듯한 느낌, 숨 쉬기 힘든 느낌, 짜증스러운 느낌이 함께 몰려왔다.
분명 가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버려둘 수 없는 꿈틀거림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근질거린다는 느낌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채찍, 아니 못박힌 몽둥이로 패서라도 진정시키고 싶은 느낌이었다.
‘피곤하긴 피곤한가보다.’
원기는 자신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온 몸을 자해하고 싶은 욕구는 이전에 많이 느꼈었다.
그리고 자해하려고 드는 것은 정신적인 위험신호라는 것을 원기 자신도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문제는 그 증상을 자각함으로써 치료의 실마리를 얻고 호전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증상을 자각함으로써 문제가 드러나서 사태가 심각해 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조제성을 비롯한 의료진은 알리지 않는 길을 택했다. 좀 더 정보를 모으고, 확실한 치료법을 알게 되면 고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희연과 카즈키는 많은 정신계 이능력자들의 실험대가 되어야 했다. 헬 여신과 펜릴 여신에게 정신계 이능이 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정신계 이능은 격의 차이가 좌우하는 면이 컸다. 희연이나 카즈키, 심지어 연하조차 격이 높아서 정신계 이능이 거의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시적 지배 같은 이능은 있어도, 인간 영혼을 직접 뜯어고치는 이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니걸 통신이야말로 궁극의 이능이었고 정신계 치유 능력이면서 강화 능력이기까지 했다. 다만, 그 대상에 자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원기 역시 이상을 느낄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가끔씩 사람들을 향해 살의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원기에게 있어서는 자해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아끼고 지켜줘야 할 사람들을 향해서 문득문득 살의가 이는 것이었다.
희연의 경우에는 살의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숨쉬기 어려운 느낌이 종종 들곤 했다. 희연이 숨이 막히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여신 때보다 본체의 때였다.
그 탓에 원기는 여신 상태가 조금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왜 이런 충동이 드는 걸까?’
다행히 바니걸 통신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가 문득문득 갖게되는 살의가 거짓은 아니지만, 본심에서 우러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원기의 본심은 변함없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 그 자체였다.
원기는 자신이 혹여 이 짜증스러움에 못이겨서 누군가를 해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렇게 될 바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서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본체로 돌아온 상태에서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해소되지 않았다. 방을 나서자, 메이드 복을 입은 엘프와 마주쳤다.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경비 임무로 배치된 엘프들이 많은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다. 내 정체를 모르는 엘프로구나.’
원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돌렸다. 신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계약자로서 접하는 엘프와 프레이야 여신임을 알고 있는 엘프는 아무래도 태도가 달랐다.
희연은 헬 여신으로서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고, 카리스마도 넘쳐났다. 그 덕택에 그녀는 조용히 지냄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야 진영에서는 조제성과 필적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에게는 달랐다. 프레이야 여신만이 오직 그들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계약자의 한 사람으로서만 여겨졌다.
“오빠. 같이 가도 될까?”
“아니. 누나랑 만나기로 했어. 가끔 식사라도 해야지.”
“아, 그래? 그럼 난 희연언니랑 놀아야겠네.”
연하는 원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내심 멀리서 지켜보던 조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우같은 마누라하고는 살아도 곰같은 마누라하고는 살기 힘들다고 했던가. 연하가 생긴것과 달리 곰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런 부분은 희연보다 낫군.’
조제성은 돌아서서 집무실로 향했다. 지나친 간섭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제성은 원기가 겪고있는 문제의 원인 중 하나를 타인의 기대에 의한 중압감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는 희연은 안타깝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희연은 원기를 편하게 대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덕 군단이 그나마 쓸모가 있긴 하지.’
다른 이들에게 기대받는 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부담되는 일이기도 했다. 타인의 기대를 거스르는 것도 따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신의 존재는 그런 면에서 상상하기도 힘든 속박일 것이 틀림없었다. 장수한을 필두로 한 오덕 삼인방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여유를 갖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여신을 편하게 대하는 것도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레이야 여신에게 의탁한 이들에게 있어서, 프레이야 여신을 편하게 대하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 걸리는 일이었다.
오덕 삼인방이 그나마 둔하니까, 버티는 거지 정상적인 인간은 그 카리스마에 맞서기가 쉽지 않았다.
프레이야 여신의 위광을 접한 이후로는 원기의 모습으로 있어도 여신의 존재를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희연이 목숨보다 소중한 경호 대상으로서 원기를 대하는 것도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연하가 희연과 놀러 간다며 붙잡아주는 것은 그런 면에서 감각적이지만 훌륭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당한 임무를 줘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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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오늘은 좀 쉬도록 휴식 시간을 받았어. 누나와 식사라도 좀 하고 싶네.”
원기는 승희와 오랜만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는 레이니입니다. 여신님은 현재 회사 앞에 와계십니다. 승희님과 식사를 하실 모양입니다.]
[세부적인 보고는 필요없다. 경호에만 전념해주기 바란다.]
레이니를 비롯한 최정예의 엘프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원기의 본체가 움직이는 상황은 그만큼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신체와 정신의 조화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초기부터 고려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본체가 죽고 에인페리아의 육체로 되살아난 이들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서, 조금 안심하고 있었던 차에 가장 중요한 여신에게서 문제가 터져서 패닉에 빠졌다고도 할 수 있었다.
본체조차도 제 역할을 못한다고 보여지지만, 본체를 잃는다는 것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본체를 못쓰게 하는 것도 안되기 때문에, 제성은 최대한의 보호를 제공하도록 했다.
원기 역시 자신에게 경호가 붙어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지만, 본체의 감각으로 엘프 최정예들을 알아채는 것은 무리였다.
[음, 좀 더 미리 연락을 하지 그랬어. 지금 바쁜데. 나중에 다시 와. 지금 어디야?]
“회사 앞인데.”
[야. 나 엄청나게 바쁜거 모르니? 웬수가 따로 없네. 근처에서 놀면서 기다려. 일 빨리 끝내고 갈께. 빠르면 두시간 쯤 걸릴거야.]
“알았어.”
원기는 그렇게 답하고는 회사 앞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리고는 공허한 눈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선글래스와 마스크 탓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상한 듯이 쳐다보기는 했지만, 원기의 존재는 눈치 못채고 지나쳐갔다.
뒤늦게 상황에 대해 보고받은 제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승희의 이능은 여전히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자본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벌려놓은 사업이 많아서 낭비없이 운용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데이모스와 달기지, 아니 달의 지하 도시, 아니 국가 건설급의 일들이 벌어진 상태였다.
승희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승희역시 돈에 한이 맺혔던 사람이라서, 돈을 움직여서 이익을 내는 경영쪽에 재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무리는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일을 우선하는 것은 상정하지 못했다. 물론 사태를 알려주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게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뿐이었다.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히 여기던 여신님의 옥체가 찬바람 맞고 매연 맡으면서 길바닥에 멍하니 서있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아냐. 잘 생각해 봐야해. 본체의 내구연한까지만 버텨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지도 몰라.’
조제성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암담해졌다. 프레이야 여신을 잃고 난 후에도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꽤 암울했다.
아마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 이후를 살아갈 생각조차 못할 것이고, 혜서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조제성은 승희에게 연락해서, 일을 빨리 끝마치는게 어떻겠느냐고 물었지만, 일이 바빠서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 결국 밤 늦은 시간에 겨우 일이 끝났고, 원기는 그동안 망부석처럼 벽에 붙어서 사람들을 구경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자체가 꽤 위험신호로 보였다. 적어도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결국 여섯시간이나 걸렸네. 뭐하면서 기다렸어?”
“아, 그냥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지.”
“미리 연락좀 하지 그랬어. 그래도 몇 달 만에 보는건데.”
승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원기의 등을 두들겼다. 원기는 피식 웃었다. 사람들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느낌으로 있는 것은 생각보다 좋았다. 모두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운 곳에서 지내왔기 때문에 더욱 좋았다.
그들의 관심이 배려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밥도 안먹었지. 어디가 좋을까.”
승희가 만지는 돈은 천문학적인 단위로 늘었지만, 돈 써본 경험은 거의 없던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는 원기를 데리고 허름한 분식집으로 갔다.
그리고 떡볶이와 오뎅, 순대 같은 것을 시켰다.
“이러니까, 왠지 그립게 느껴지는걸.”
“누나랑 분식집에 와본 적이 있던가?”
“그러고보니 없었네. 요새 바쁘다보니 나도 분식집은 오랜만이다.”
직원이 사온 음식을 먹거나 비지니스 상대와 식사를 하다보니 평범한 식사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뭐, 상대가 요즘 잘나가는 훈남배우이니 나쁘진 않네.”
승희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기도 그녀가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승희는 지금의 원기가 자신의 동생인 원기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승희도 자신의 동생을 잃어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원기도 눈치챘다.
‘난 대체 누구인거지? 여기있는건 누구야? 나는 아니, 원기는 어디로 가버린 거지?’
원기의 안색이 변했다. 그때 분식집의 손님인 여학생들 중 하나가 원기를 알아봤다. 그녀는 황급히 다가와서 싸인을 청했다.
그리고 그것이 원기가 숨을 못쉬게 만들었다.
원기는 가슴을 쥐고는 창백한 안색이 되어 비틀거리다가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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