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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의 세계-459화 (459/497)

459화 대단원

“괜찮아? 누나야. 정신이 들었니? 진통제가 너무 강한거 아닌가 모르겠다.”

원기는 머리가 몽롱함을 느꼈다. 공중에 부웅 뜨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진통제? 나한테 그런게 필요했나?’

원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들었다. 빛이 눈부셔서 손으로 빛을 가릴려고 들었을 때, 그의 손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화상으로 일그러져 들러붙어 있었다.

‘어떻게 된거지?’

마음속에서 일순 경악했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약기운 탓이었을까? 경악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는 곧 상황을 이해했다.

‘아. 그렇군. 꿈이었군.’

상황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생생한 꿈을 꾼 것이었다. 아마도 진통제 탓일지도 몰랐다.

“괜찮니? 속은 편해?”

누나 승희의 모습이 흐려 보였다. 마치 우유빛 유리를 통해 보는 듯한 시야였다. 장님에 가까운 눈이었다.

누나는 그의 안경을 씌워 주었다. 안경을 쓰자 곧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작고 스마트한 안경인데, 컴퓨터로 만들어 진 것인지 정상적인 시각으로 보는 듯 했다.

“안경이 마음에 드나봐. 무리한 보람이 있네.”

무선 기능으로 체내에 있는 장치와 연결되는 듯 했다. 누나 승희의 얼굴은 기억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다. 눈에는 다크 서클이 피로함을 증명해 보였다. 과로 탓인지 피부도 좋지 않아보였고 머리도 꿈속의 모습에 비하면 부시시 해보였다.

“누나가 미인으로 나오는 꿈을 꿨는데.”

“그거 고맙구나. 약 때문에 잠이 늘었는데 꿈이라도 좋은 걸 꿔야지.”

승희의 말에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배어 있었다. 원기는 자신이 그녀의 족쇄이자 십자가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여신이 등장하는 황당무계한 꿈을 꾼 것도 자신의 바람 탓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밖에 나가서 밥이라도 먹을까? 너무 집안에만 있으면 곤란하니까. 방에서 게임만 하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승희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원기는 그녀의 말에 미소로 답했지만,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굴 대부분은 붕대로 가려져서 알아보기는 힘들 터였다.

“누나가 미인으로 나오는 꿈이라. 대체 어떤 꿈인데? 들어보고 싶네.”

“내가 여신이 되는 꿈이었어. 이계의 여신이 되서 달도 가고 화성도 가는 꿈이었지.”

“여신?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그러니까 꿈이지.”

“하긴, 그런가. 재밌는 꿈이었다니 다행이네.”

승희는 그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꿈에서는 잊고 있었지만, 자신의 손으로는 제대로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비참한 현실, 무력한 자신. 하지만 원기는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너 무슨 일 있니? 어디 아파?”

“아니야. 그냥 눈물이 흐른 것 같아. 눈이 진물렀나?”

원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버무렸다. 그의 몸은 어디하나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눈물이 이유없이 흐르는 경우도 있었다.

꿈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원기는 최대한 빨리 걷고 싶었지만, 여전히 느린 걸음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그리고 승희는 그런 원기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걸어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원기를 구경거리처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에 섞인 경멸과 동정의 눈빛은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는 듯 했다.

‘꿈 덕분인가. 왠지 저 눈빛들이 덜 거슬리는 것 같네.’

변함없이 싫고 기분나쁜 눈빛이었지만, 기대의 눈빛보다는 덜 부담스러웠다. 더러운 것을 보는 듯했고, 일부는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하는 듯 했지만, 그저 평범하게 느껴졌다.

‘호의보다 적의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가. 이건 정말 예상 밖인데. 하긴 꿈속에서의 호의였으니까.’

승희와 함께 도착한 식당은 평범한 설렁탕집이었다.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평범한 음식을 먹고 싶을 때 찾는 메뉴였다.

터미널 가까이에 있어서,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이 들리는 그런 가게이기도 했다.

커다란 TV가 있는데, 거기에는 다섯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원기는 그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희연? 연하?”

“네가 좋아하는 걸그룹이구나. 프레이야였지? 네가 여신 타령한 이유를 알겠다.”

원기는 잠시 TV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희연, 연하, 리디아, 카즈키 그리고 서유리의 다섯명이 여신같은 미모를 자랑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꿈에 저 아가씨들이라도 나온거야?”

“그랬어. 저 중 한명하고는 결혼도 했다니까.”

“훗. 애엄마, 아니 유부녀가 낀 걸그룹이라. 재밌네. 애는 없었지? 누군지 맞춰볼께. 한희연 아니야?”

“잘 아네.”

“네 누나 한두해 해왔니.”

승희는 그렇게 웃으며 말했다. 원기도 자조적으로 웃었다. 화면을 통해서 본 한희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꿈에서나마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해야할지도 몰랐다.

‘내가 되게 좋아했었나보네.’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쓴 탓에 기억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다. 꿈이 더 생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른 애들은 어땠어?”

“어쩌긴 뭘 어째.”

“어차피 꿈인데, 뭘 그래. 누나한테 감출 필요 있냐?”

“사실은 연하랑 리디아와도 좋은 분위기로 갔었지. 하지만 나한테 희연이 있어서, 참았지. 지금와서 생각하니 되게 아깝네.”

“다른 멤버들은 안나왔어? 서유리라든가.”

“카즈키는 좀 나왔어. 하지만 서유리는 그다지 안나왔어. 예쁘긴 한데 사람들을 만나는걸 별로 안좋아한다더라고. 꿈 속에선.”

“아쉽네. 누나는 서유리 팬인데.”

승희가 눈에 띄게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원기는 그녀와 말하면서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동생 꿈에 서유리가 비중이 크든 작든 무슨 큰 상관이 있다는건지.

“확실히 아깝네. 꿈이란거 알았으면 조금은 달랐을텐데 말이지.”

원기가 말하는데 음식점 주인이 설렁탕 두그릇을 들고 왔다. 주인 아줌마의 눈빛이나 표정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장사에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으니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니 늘 익숙해 왔다. 괜히 마음만 상하면 모처럼의 음식이 맛없게 변할 터였다.

“잘 먹겠습니다.”

따뜻한 국물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면서, 원기는 왠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듯이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어갈 것이었다.

즐겁고 재미난 꿈이었지만, 꿈은 꿈이었다. 진통제가 보여준 행복한 꿈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 신이 꿈을 통해 작은 행복을 맛보게 해줬는지도 모른다.

‘기운 내야지.’

원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 숟갈 떠서 국물 맛을 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完]

“그런데, 확실히 아까워. 연하 같은 경우엔 정말 좋은 선까지 갔었는데. 그쪽도 날 좋아하는 것 같았고, 내가 왜 안건드린건지 정말 후회되는데.”

원기는 김치에 젓가락을 가져가면서 말했다. 활기차고 발랄한 모습의 연하를 떠올리니 그리운 느낌까지 들었다. 함께 있으면 즐거워지는 소녀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절 생각해서 사양하실 필요는 없어요.”

원기의 옆에 누군가가 앉으면서 말했다. 원기는 고개를 돌리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 한희연이 앉아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스타 연예인이었다. 결혼하는 꿈까지 꿀 정도였다.

“그럼 오늘 밤 호텔이라도 잡아야겠네.”

그렇게 말하며 원기의 팔에 팔을 끼우는 여성이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연하였다.

“어라?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건가?”

어느틈엔가 눈앞에 있던 누나의 모습은 서유리로 변해 있었다. 주위에는 리디아와 카즈키의 모습도 보였다.

“지금 내가 꿈속인건가?”

“그건 아니야. 내가 연출한 작전이지. 코드명은 ACBC. 일명 아쉬발쿰 작전이다.”

주방에서 장수한이 나타나서 말했다. 원기는 영문을 잘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꿈인지 생신지 여전히 잘 모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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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효과가 있는 듯 하군요.”

“저정도로 극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효과는 확실 한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라는게 참 묘하군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입니다만, 변화에 약한 면도 있습니다. 특히 환경의 변화에 의외로 약한 구석이 많습니다. 매맞던 여자들, 가정폭력의 희생자들을 구조했을 때, 그들 중 상당수가 매맞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지요. 환경이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그 환경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겁니다. 전쟁터에서 심리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전쟁터로 다시 뛰어든다던가 하는 예도 있지요.”

“그나마, 헬 여신의 정신 공격이 먹혀들어갔으니 다행이로군요.”

조제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유리의 특기는 상대가 두려워하는 환상을 보여주는 이능이었다. 그녀가 헬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원기에게 이능을 사용한 것이었다.

일시적이지만, 약물의 힘을 빌려서 꿈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었다.

“가능하면 좀 오래 쉬시도록 두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게 꼭 좋게 작용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 꿈은 여신님이 두려워하던 공포의 반영입니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장기간 꿀 꿈은 아닌 겁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원기가 바니걸 통신을 시작했다. 정신을 쓰러지고 며칠이 지난 터라, 바니걸 청취자들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허전함이라기보다는 금단증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바니걸 통신과 함께 여신의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사랑의 감정과 고마움의 감정이었다.

“아무래도 안정감을 찾으신 것 같습니다. 망설임이 사라지셨군요. 이제는 우리를 더 걱정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의사의 말에 조제성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니걸 통신이 갖는 힘이 더 강해진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시련을 사랑하고, 작은 일에 감사하는 마음, 그것도 함께 전해졌다. 그리고 이는 바니걸 통신과 연결된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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