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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도 귀신을 봅니다-28화 (28/272)

28.

벨테르가 얼굴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하찮은 종자 놈들이 같이 죽고 싶어서 작정했구나!”

“하찮다라. 뭐, 잘나가는 황자님 눈엔 그렇게 보일 수 있겠네. 그런데 말이야.”

카론이 차가운 눈빛을 번뜩이며 벨테르를 바라봤다.

“내가 하찮으면 500년 전 개쪽당한 걸 아직도 못 잊고 이렇게 보자마자 대련하자고 달려드는 놈은 뭐라고 해야 하는 거냐?”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구나.”

“모를 리가 있나. 가르시안 제국의 3황자님이신데.”

“알면서도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다니.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벨테르가 분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일 때, 카론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너무 막 나가지 말자. 나도 엄연히 백작이니까.”

“고작 이름뿐인 백작 따위가!”

“그러니까 이쯤 하자고. 이름뿐인 백작한테 개쪽당하면 얼마나 쪽팔리겠냐.”

“으득, 죽여 버리겠다!”

벨테르가 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카론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맑은 소리가 강의실을 울림과 동시에 벨테르의 몸이 뭔가에 걸린 듯 그대로 멈췄다.

“크윽!”

당혹스러운 듯 짧은 신음을 내뱉는 벨테르에게 다가간 카론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적당히 하자고. 그래도 첫날인데 사고 칠 순 없잖아?”

“너 이 새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알면 기절할 거다.

벨테르가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건 그의 몸에 귀신들이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처참한 몰골로 그의 주변을 서성이던 귀신들이.

카론은 그런 귀신들에게 영혼력을 불어넣어 줬다.

적당히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카론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귀신들에게 의지를 보냈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봐.

-죽여 버리겠어!

그의 의지를 허락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귀신들이 일제히 손을 뻗어 벨테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크으윽!”

목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에 벨테르가 짧은 신음과 함께 주춤 뒤로 물러났다.

몸이 다시 움직이는 걸 확인한 벨테르가 검을 손에 쥔 채로 목 언저리를 훑었지만, 어떤 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당연했다.

영혼력을 부여받았다고 해서 귀신들의 육체가 다시 생겨난 건 아니니까.

“크윽, 너, 너!”

벨테르가 사나운 눈빛으로 카론을 향해 다가가려다 비틀거렸다.

목이 옥죄어 오는 것만이 아니라 온몸이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멜빈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가 벨테르를 부축한 뒤, 그를 따르는 무리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봤다.

“뭣들 하고 있습니까! 빨리 치료실로 모시지 않고!”

“아, 알겠다!”

“벨테르 님! 괜찮으십니까!”

“너 이 새끼!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당장 치료실로 모시고 가!”

“벨테르 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똘마니들이 부랴부랴 달려 나와 그를 들쳐 업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숨통이 트인 듯 벨테르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창백했던 얼굴이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는 벨테르의 모습에 카론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귀신들의 수준이 낮으니까 얼마 버티질 못하네.

인간에게 육체가 있다면 귀신에겐 영체라는 그릇이 존재한다.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엔 묘한 연관점이 있다.

바로 살아 있을 때 이룬 깨달음에 모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하나 벨테르의 곁을 맴도는 귀신들의 영체는 그냥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기에 카론이 불어넣어 주는 영혼력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 힘을 사용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이걸로 만족해야겠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었고 경고만 주려고 했던 것이기에 크게 아쉽진 않았다.

그에 카론이 그대로 몸을 돌려 멜빈을 바라봤다.

“자리는 아무 데나 앉으면 됩니까?”

“아, 저, 그것이…….”

멜빈이 난감한 표정으로 벨테르의 눈치를 살폈다.

그에 숨을 가다듬은 벨테르가 다시금 이를 드러냈다.

“으드득, 내게 무슨 짓거리를 한 것인지 똑똑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론 부족했나 본데?

카론이 차갑게 눈을 빛낼 때,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그만 자리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놈이 이렇게 느끼한 목소리를 가졌나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 엘프인 디알로만큼 잘생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남자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다.

이름은 유페르, 파퀴로우 가문의 장자다.

이 강의실 안에서 가장 유심히 살펴봐야 할 녀석이지.

유페르만이 아니라 디슘 클래스 학생들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다.

이름이 무엇이고 나이가 몇이며 어떤 신분인지, 따르는 이가 누군지까지도.

귀찮은 걸 피하고자 아카데미로 오기 전 미리 숙지해 놨던 정보들을 떠올릴 때, 벨테르가 사납게 목소리를 높였다.

“넌 나서지 마라! 유페르!”

“나서지 말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벨테르 님이십니다. 이 시간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저 하찮은 놈의 편을 들겠다는 것이냐?”

“누구 편을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그저 제 시간을 방해받기 싫을 뿐이죠.”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건지, 벨테르가 이를 악문 채 유페르를 노려봤다.

그에 유페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대련을 원하시면 지금 이러실 게 아니라 실습 때 하시죠. 어차피 사흘 후면 실습이 있으니까요. 참고로 저 역시 벨테르 님과 대련할 의향이 있으니, 혹 저와도 겨뤄 보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자신감이 넘치는 유페르와 달리 벨테르는 얼굴을 사납게 구기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까드득.

그 섬뜩한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벨테르는 날뛰지 않았다.

그저 살기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유페르만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카론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둘이 앙숙이면 나야 좋지.

순간 유페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벨테르가 고개를 돌려 카론을 바라봤다.

그러곤 입가에 맺힌 미소가 거슬리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놈…….”

“괜히 또 흥분하지 말고 실습 때 보자. 나도 딱히 피할 생각은 없으니까.”

“으드득. 그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할 거다. 만약 어긴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참고 있는 건 너만이 아니니까.”

“그날, 각오하고 오는 게 좋을 거다. 장담하건대 멀쩡히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벨테르가 거칠게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냥 들어가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저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다 들어가지.

똘마니들도 벨테르를 따라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카론이 다시 멜빈을 바라봤다.

아까 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 달라는 뜻으로.

상황이 진정되자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던 멜빈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자리는 아무 곳에나 앉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카론이 단상에서 내려와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다시 유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제대로 된 소개를 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별거 아닌 요구였기에 카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입니다. 앞으로 잘 지내보죠.”

그걸 끝으로 카론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가볍게 무시한 채, 제일 뒤쪽 가운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멜빈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벨테르를 바라봤다.

“벨테르 님, 이대로 수업을 시작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치료실 같은 곳을 가지 않아도 되느냐는 뜻으로 물어본 것이었지만, 벨테르는 상종하기도 싫다는 듯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진행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유페르의 말에 멜빈은 그제야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에 카론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뒤 강의실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뒷모습에서조차 분노가 느껴지는 것 같은 벨테르와 똘마니들.

흉갑을 걸친 무표정한 얼굴의 여인과 군인을 보듯 각이 딱 잡힌 이들.

온몸에서 묘한 색기를 내뿜는 붉은 머리색의 여인과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학생들.

마지막으로 유페르와 그를 둘러싼 여인들까지.

강의실 안은 이렇게 네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의 눈엔 그렇게 보이겠지만 카론에겐 다른 한 부류가 더 보였다.

바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강의실 뒤쪽에 띄엄띄엄 앉아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카론은 그런 그들의 가운데에 앉았다.

이거 아카데미 생활이 흥미진진해질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때, 멜빈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그럼 수업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이곳에선 우리 모두 학생이지 않습니까?”

유페르의 말에 멜빈이 흠칫 몸을 떨었다.

조금 전, 벨테르에게 했던 말을 비꼬는 거란 걸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선 평민이지만 이곳에선 교수라는 말을.

그에 멜빈이 시선을 떨굴 때, 카론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예? 예! 제가 알고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파퀴로우 공작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파, 파퀴로우 공작이라면…….”

“예. 500년 전 마지막까지 베인바르와 함께했던 게일 제국의 공작, 그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순간, 강의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멜빈을 비롯한 모든 학생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런 시선들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유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제가 더 잘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저의 선조 중 한 분이시니.”

여전히 예의 바르고 느글느글한 말투였지만, 카론은 느낄 수 있었다.

바닥에 깔린 진득한 분노를.

하나 카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잘됐네요. 그럼 나중에 좀 알려 주시죠.”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상세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수업을 시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 예!”

멜빈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수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더는 잡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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