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엄청난 속도로 아카데미를 가로지른 카론은 곧장 운디네의 눈물로 향했다.
촤아아아!
까르르르!
호수에 도착하자 잔물결과 작은 자갈들이 만들어 낸 소리와 여전히 해맑은 운디네들의 웃음소리가 오랜만이라는 듯 인사처럼 들려왔다.
그에 카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긴 여전하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런 호수 하나쯤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산책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등교 시간이었기에 산책길엔 아무도 없었다.
그에 카론은 느긋하게 호수의 정취를 즐기다 토트르의 보고로 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진한 책 냄새가 나는 듯했다.
온다 온다고 해 놓고 이제야 오게 되네.
카론은 피식 웃으며 토트르의 보고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평소엔 환하게 열려 있던 문이 오늘은 불안하게 닫혀 있었다.
아직 안 연 건가?
잠시 고민하던 카론이 슬쩍 밀어 보자 상당한 크기의 문이 가볍게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에 카론은 눈을 빛내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자!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곧 도서관 여는 시간이니까.”
“예, 사서님!”
“화장실도 다시 확인해 봐. 아까 보니까 꼼꼼하게 다시 청소해야겠더라.”
“지금 바로 다시 가 보겠습니다.”
안에는 사서로 보이는 노인과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좀 기다려야겠는데?
카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도서관 안을 둘러봤다.
도서관 내부는 엄청났다.
왜 운디네의 눈물과 함께 아카데미 2대 명물로 손꼽히는지 바로 이해가 될 정도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라 벽과 천장 등에 예술적인 문양과 조각들이 새겨져 있어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신전 안에 들어온 듯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그런 인테리어와 달리 도서관의 구조는 단순했다.
문 앞쪽엔 둥근 형태의 데스크가 존재했는데 책을 대여하거나 반납하는 일을 하는 곳 같았다.
그런 데스크를 지나면 거대한 공간이 나타난다.
사방의 벽엔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꽂힌 책장들이 존재했고, 도서관의 중앙엔 수백 개의 책상이 오와 열을 맞춘 채 놓여 있었다.
학생들이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된 공간인 듯했다.
그런 도서관 중앙의 양옆으로는 틈틈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도서관의 중앙은 천장까지 뻥 뚫려 있었다.
그래서 카론이 서 있는 입구에서도 2층과 3층이 어떤 식으로 놓여 있는지 보였다.
2층과 3층은 1층과 달랐는데 책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수많은 책장만이 가득 층들을 채우고 있었다.
여기를 이제야 온 내 자신한테 욕이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책 냄새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때, 도서관 중앙에서 하인들을 지휘하고 있던 사서가 부랴부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카론 백작님을 뵙습니다!”
“아!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방해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청소는 진즉 끝났는데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다행이네. 그럼 도서관 좀 이용해도 될까?”
“얼마든지 이용하셔도 됩니다!”
“고마워.”
자신을 배려해 준 거란 걸 알기에 짧은 인사를 건넨 뒤, 도서관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순간 사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찾으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찾아 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그냥 좀 둘러볼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해.”
그 말을 끝으로 카론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그의 존재를 눈치챈 하인들이 서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카, 카론 백작님이시다!”
“백작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근데 여긴 왜 오신 걸까?”
“도서관에 왜 오셨겠어! 보실 책이 있으셔서 오셨겠지.”
하인들의 말이 맞다.
찾으려는 책들이 있어서 이곳에 온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침 댓바람부터 도서관에 올 리 없으니까.
그런데도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굳이 사서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도움을 줄 이들이 널렸기 때문이다.
바로 도서관 곳곳에 존재하는 귀신들이었다.
저들만큼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지.
카론은 눈을 빛내며 책들을 살피는 척 귀신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영혼력을 퍼트리면 도서관 안에 있는 모든 귀신에게 자기 뜻을 전할 수 있다.
그럼 원하는 책을 단박에 찾을 수 있지만 카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 쉬운 방법도 안 쓰고 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엘-마르엔 400년 동안 도서관에서 지냈던 디카프리오가 있다.
저번에 들어 보니 도서관에 있는 책 중 자신이 안 읽어 본 책이 없다고 했었다.
굳이 영혼력을 낭비할 것 없이 디카프리오에게 의지만 보내면 책들을 찾을 수 있단 뜻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까지 영혼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책을 찾는지, 왜 그 책을 찾으려는 건지에 대해서 영혼들에게조차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지. 그게 뭐였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카론은 어둠의 숲의 끝에서 보았던 시커먼 도형을 떠올렸다.
그 도형은 분명 자신의 가슴에 박혔었다.
그런데… 그것뿐이었지.
어떤 고통도 없었다. 그리고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듯 움직여서 몸을 빼앗거나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거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일절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지.
아무리 몸 안을 살펴봐도 시커먼 도형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말이다.
어둠의 숲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진짜 꿈을 꾼 건가 싶었겠지.
시커먼 도형이 가슴에 박힌 뒤, 숲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엔 사라진 게 맞나 싶었다.
땅도, 풀도, 나무도, 바위도 여전히 모든 것들이 시커맸으니까.
하나 울창한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이 증명해 줬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게 하던 어둠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망령들 역시도 마찬가지지.
어둠에 갇혀 숲을 헤매며 스스로 존재를 잃어버렸던 망령들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순식간에, 그리고 일제히 사라졌다.
그렇게 5대 금지로 불렸던 어둠의 숲은 이제 평범한 곳이 되었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여전히 숲 안은 시커멓고, 그 안에 있는 몬스터들 역시 건재하니까.
거기다 어둠과 망령들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건 나밖에 모를 테니까.
카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귀신들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하인들 주변을 기웃거리는 꼬마에 도서관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남학생, 그리고 책장 위에 앉아 깔깔거리며 웃는 여자까지, 참 다양한 귀신들이 도서관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모습들 역시 각양각색이었는데 마냥 공부만 할 것 같은 귀신들만 있는 게 아니라 시커멓게 탔거나, 온몸이 칼로 난도질당했거나, 목이 없는 모습을 한 귀신들도 있었다.
그런 귀신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카론은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길게 빼곡하게 세워진 책장들을 천천히 둘러보다 걸음을 멈춰 섰다.
책장 안쪽 구석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여서다.
오직 책만을 바라본 채 꿈쩍도 하지 않는 누군가는 왜소해 보이는 작은 소년이었는데, 그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아지랑이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소년만이 아니라 다른 귀신들과 사람들에게도 보이는 광경이었다.
시커먼 도형이 가슴에 박힌 후부터 말이다.
어둠의 숲을 나와 처음 귀신들과 사람들을 봤을 땐 저게 뭔가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 빛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영혼의 빛깔, 뭐 이런 거라고 해야겠지?
지금까지 본 색은 새하얀 색과 시커먼 색이 전부였다.
다른 색이 또 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확인한 건 두 가지 색뿐이었다.
그리고 그 색들이 뭘 의미하는지도 알게 됐다.
바로 새하얀 빛은 선함을, 시커먼 빛은 악함을 뜻하는 것이란 걸 말이다.
이게 내 유일한 변화지.
도대체 시커먼 도형이 무엇이기에 이런 능력을 가지게 한 걸까?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기에 어둠의 숲의 끝에 있었던 걸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도서관에 온 거다.
리엔에게 5대 금지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한 것 역시 그 때문이고.
카론은 선한 빛을 띤 왜소한 소년의 곁으로 다가가 책을 고르는 척했다.
하나 소년은 카론이 곁에 왔음에도 여전히 책을 읽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제법인데?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은 진짜 책이다.
그리고 소년의 손짓에 따라 책장이 실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말은 영혼력을 사용해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엄청 강한 영혼은 아니었다.
왜소한 몸집만큼이나 영혼력 역시 낮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책을 들고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은 책을 읽고 싶단 의지와 집중력이 엄청나단 뜻일 거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카론이 책 한 권을 꺼내 펼쳐 들며 의지를 보냈다.
-무슨 책을 그렇게 재밌게 읽냐?
카론의 의지에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그냥 둘러보는 게 아니라 주변을 잔뜩 경계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에 카론은 다시 의지를 보냈다.
-뭘 그렇게 찾아? 바로 옆에 있는데.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카론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다시 꽂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산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건 오랜만이지?
-으으으! 으아아아아!
소년이 자지러지듯 비명을 내지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귀신 본 사람처럼 놀라네. 지가 귀신이면서.
어이없는 상황에 카론이 손을 뻗어 소년의 팔을 붙잡았다.
-으아아아아! 잡았어! 잡혔어!
소년이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카론은 특단의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입 다물어라. 소멸시켜 버리기 전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년이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카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물어보려는 것뿐이니까 도망치지 마라. 만약 팔 놔줬는데 또 도망치려고 하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년이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끄덕여 댔다.
-5대 금지에 관한 책들 어디 있는지 알고 있냐?
카론이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며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