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도 귀신을 봅니다-203화 (202/272)

203.

황금 궁전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세상에 알려졌다.

하나 그 일은 사람들의 관심을 얼마 끌지 못했다.

대륙 곳곳에서 그에 준하는 일들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크레타 제국이 벨론트 공국을 공격했다.’

‘테른 왕국의 수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게 공격당해 무너졌다.’

‘필론 왕국이 게일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각 나라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이들은 바로 어둠의 의회다.’

‘어둠의 의회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소식들이 태풍처럼 삽시간에 대륙을 휩쓸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소식들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비웃기라도 하듯 또 다른 소문이 대륙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우리 소이안 왕국은 지금 이 순간부터 어둠의 의회를 따르는 종이 될 것이다.’

‘셀트만 왕국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둠의 종으로서 그 뜻을 받들어 선봉에 설 것을 공표하는 바이다!’

갑작스러운 두 왕국의 발표에 사람들이 경악할 때, 크레타 제국의 황제인 칼도르테의 말이 대륙을 뒤흔들었다.

‘너희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저 두려워하고 몸부림쳐라. 절규하고 절망해라! 그것만이 너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 될 테니까!’

어둠의 의회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었다.

크레타 제국의 뒤에 어둠의 의회가 있다는 걸.

그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며 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카론 백작이 우리를 구해 줄 거다.’

‘빛의 검의 후손을 중심으로 모여라.’

사람들의 반응에 응답한 것은 카론이 아니라 게일 제국이었다.

‘우리 게일 제국은 500년 전의 과오를 청산하고 대륙에 진 빚을 갚고자 어둠의 의회를 척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어둠의 종인 크레타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과 손을 잡은 나라를 모두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게일 제국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게 했다.

‘게일 제국으로 가자! 그곳만이 어둠의 의회를 막을 수 있다.’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다. 500년 전과 같은 지옥이 펼쳐지기 전에 어둠의 의회를 막아야 한다.’

‘지난날의 과오를 갚으려는 게일 제국의 모습에 감동했다. 미약하지만 우리 페롤 왕국 역시 제국과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제국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두 게일 제국을 도와 어둠의 의회와 맞서 싸우자.’

게일 제국을 옹호하고 응원하며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물론 좋은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카론 백작은 어디서 뭘 하기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거지?’

‘빛의 검의 후손은 겁쟁이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버렸다.’

‘그런 겁쟁이를 영웅이라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우리 모두 게일 제국을 중심으로 모이자.’

‘제국이라고 다 같은 제국이 아님을 깨닫고 가르시안 제국 역시 하루라도 빨리 입장을 표명하라!’

게일 제국의 적극적인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카론과 가르시안 제국을 걸고넘어지게 만들었다.

가르시안 제국이야 같은 제국으로서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럴 수 있다곤 하지만, 카론 백작까지 겁쟁이로 몰아세우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최상급 마족을 막을 때만 해도 영웅으로 치켜세우기 바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며 카론을 깎아내렸다.

그에 빛. 사. 모 회원들이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사람들을 향해 한마음 한뜻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카론 백작님께선 절대 겁쟁이가 아니다.’

‘어딘가에서 어둠의 의회를 상대하고 있으실 게 분명하다.’

‘함부로 카론 백작님을 욕하지 말라!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최선을 다해 어둠의 의회를 막았던 분이다.’

‘우린 여전히 카론 백작님을 지지한다! 백작님께선 분명 다시 모습을 드러내시어 어둠의 의회와 격전을 펼치실 것이다!’

하나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크레타 제국을 위시한 여러 나라가 주변 나라들을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빛. 사. 모 회원들의 외침은 거대한 폭포 앞에서 내지른 소리처럼 파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륙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자 각 나라와 사람들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둠의 의회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냐.

하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많은 이들은 크레타 제국으로 향했다.

대부분은 가진 것들이 많은 귀족들이나 대상인들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연줄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크레타 제국으로 귀화하려고 했다.

크레타 제국은 그런 이들을 모두 받아 줬다. 그리고 보란 듯이 대륙에 그들의 신상을 공개하고 처형해 버렸다.

가차 없이 처형을 진행한 칼도르테 황제는 대륙을 향해 조롱하듯 말을 던졌다.

‘내가 말했을 텐데? 네놈들이 할 수 있는 건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깨달아야 했다.

크레타 제국의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둠의 의회가 어떤 곳인지를 말이다.

그리고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던 500년 전의 지옥이 바로 코앞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리엔의 앞으로 오십 명의 인영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인영들의 표정 역시 리엔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몇은 코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올 것처럼 얼굴을 잔뜩 붉힌 채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족히 2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거구의 사내가 더는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테이블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사내, 바쿠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뜻에서였다.

“저 밖에 있는 새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이 우리 주군을 깎아내리는 게 안 들린단 말입니까! 지들이 웃고 떠들면서 주둥이만 나불거릴 때 우리가 뭘 어떻게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새끼들이! 지껄이는 말들을 왜 병신처럼 마냥 듣고 넘겨야 하냔 말입니다!”

말에 점점 분노가 담기자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말투조차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리엔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엘프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쿠, 진정하게.”

“이게 진정할 수 있는 일입니까! 샤키아 님은 화도 나지 않으십니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네.”

“그건 샤키아 님이나 많이 하십시오! 전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진정 같은 건 할 줄 모릅니다!”

바쿠의 말에 샤키아가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바쿠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 바쿠가 눈에 잔뜩 힘을 주며 그를 노려봤다.

뭐가 잘못됐냐. 나를 말릴 생각 하지 마라.

이 시선에 샤키아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엘프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네. 나 역시 화가 난다네. 휴버트는… 이곳에서 사귄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여기서 왜 휴버트 님 이름이 나오는 겁니까!”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는 바쿠의 눈동자에 핏줄이 잔뜩 솟아올랐다.

더불어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말아 쥔 채로 잘게 몸을 떨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샤키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쿠의 머리 위로 물의 하급 정령을 소환해 물을 쏟아붓게 했다.

촤아아악!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바쿠가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폭발시키려고 할 때, 샤키아의 잔잔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머리 좀 식히면서 화를 가라앉히게. 자네가 왜 그러는지 잘 아니까 말이야.”

“아니, 샤키아 님은 모르실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자네 탓이 아니네.”

샤키아가 불쑥 던진 말에 바쿠가 굳으며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휴버트, 그 친구라면 분명 탓하기보단 이렇게 말했을 거라네. 자네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스피키오 왕국을 지원하는 일은 휴버트와 바쿠가 맡았었다.

이건 두 사람이 정한 게 아니라 카론이 직접 명령을 내린 거였다.

바쿠를 필두로 움직이고, 휴버트는 뒤에서 조언자 역할을 하기로 했었다.

하나 결전의 날이 다가왔을 때 앞으로 나선 사람은 바쿠가 아닌 휴버트였다.

워낙 긴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 바쿠의 성급하고 불같은 성격을 우려해 휴버트가 나서기로 했던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 모두가 숙연함을 감추지 못할 때, 바쿠가 몸을 거칠게 떨며 입을 열었다.

“휴버트 님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겠지요. 하지만 나까지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네. 그래야 휴버트, 그 친구에게 빚진 걸 갚을 수 있을 테니까.”

샤키아의 말에 바쿠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다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크흑!”

악다문 이를 뚫고 짧은 신음이 새어 나오자 댐에 난 작은 구멍처럼 휴버트를 향한 미안함과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앙!”

바쿠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떨구며 그의 슬픔에 동참했다.

“흑흑! 젠장!”

“너무 큰 사람을 잃었어.”

“빌어먹을 어둠의 의회 새끼들.”

“크흑! 정말 좋은 분이었는데.”

휴버트는 팬텀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팬텀의 단주들 사이에선 큰형 같은 존재였고, 단원들에겐 아버지와 같았다.

또한 스승처럼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았다.

리엔의 손자인 데릭만 해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단검들을 챙겨 들고 스피키오 왕국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릴 정도였다.

그런 개차반이었던 데릭조차 이성을 잃고 달려갈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이곳에 모인 이들만이 아니라 팬텀에 속한 모든 이들이 바쿠와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단주들이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이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리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느끼는 그 슬픔과 분노는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두세요.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모두 터트릴 수 있게 해 주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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