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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도 귀신을 봅니다-234화 (233/272)

234.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한 여인이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배 쪽에 가지런히 모은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여인의 머리색은 은빛을 띠고 있었고, 외모는 아름다운 것을 넘어 성스러워 보였다.

공간 속엔 어떤 잡음도, 소음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평온과 안식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여인의 주변으로 머리색과 같은 은빛의 기운들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소리 없이 맴돌고 있었다.

순간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던 은빛의 기운이 갑자기 멈칫거렸다.

그러곤 조금 전의 평온은 거짓이라는 듯 몸부림을 치듯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을 띤 기운과 시커먼 빛을 띤 기운으로.

우우우웅!

츠츠츠츠!

그렇게 기운이 분리되자 감겨 있던 여인의 눈이 천천히 떠지며 누워 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일으켜 세워졌다.

여인이 몸을 바로 세우자 새하얀 기운은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시커먼 기운들은 거리를 벌리며 한곳에 뭉쳤다.

츠츠츠츠!

마치 적의를 내뿜듯 섬뜩한 소리를 내뱉는 시커먼 기운의 모습을 보며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니?

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커먼 기운이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검은빛을 띤 머리카락 색이 시야를 확 사로잡는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디아나, 내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어. 네가 하려는 짓은 너무도 무모하고 잔혹해.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지? 넌 그동안 숱한 죽음을 보아 왔던 존재잖아.

-그래서 더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야. 그래서 숭고할 수 있는 거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며,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기에 슬픈 것이야. 그런데 넌 그 죽음을 너의 욕심으로 강제하려 하고 있어.

-그 끝과 시작의 굴레가 계속되어 왔기에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변하지 못했던 거야. 살아남은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전해진 이야기들은 또 다른 탐욕을 낳고 욕심을 만들어. 그렇기에 난 죽음과 탄생의 고리를 한 번에 끊으려는 거야. 그리고 난 그것을 너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넌 거부했어.

-아니, 넌 애초에 나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어. 그래서 나 몰래 그 조각을 흡수했던 거고.

-아니, 네가 나와의 거래에서 내 편을 들어 줬다면! 나의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줬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디아나의 외침에 여자아이, 아니 죽음의 여신 텔라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부터 걱정하긴 했었어. 네가 아이들을 너무 사랑했던 게.

-지금 우리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말이야.

-아니, 상관있어. 사랑하면 자신도 모르게 닮게 돼.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네가 가장 사랑했던 아이들인 인간들과 상당히 닮아 버렸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으려고 널 남겨 둔 게 아니야, 텔라!

-네가 남겨 둔 게 아니야. 내가 끝까지 버틴 거지. 태초의 조각으로 나를 집어삼킬 순 있었지만 흡수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그 말에 디아나가 얼굴을 굳히자 텔라가 바로 말을 이었다.

-힘으로 따지자면 내가 너보다 강했어. 아무리 네가 태초의 조각을 흡수했다고 해도 나의 힘을 완전히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그게 억울해서 나를 끝까지 방해하는 거야? 카론의 몸에 들어가면서까지?

-아니, 그건 내가 아니야. 이젠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새로운 텔라지.

-뭐?

-네가 꾸며 냈던 이야기들이 진짜가 됐다는 뜻이야. 죽음의 낫을 이루고 있는 영혼의 조각은 이제 나와 어떤 관계도 없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해. 카론을 선택한 것 역시 나의 의지가 아니라 그 조각의 의지야.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누구에게나 평온함과 안타까움만을 내비치던 디아나의 표정에 표독스러움이 담겼다.

그 모습에 텔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모습이 네가 변했다는 증거야. 하나뿐인 나의 자매야.

-아니, 변한 건 너야. 네가 나를 믿지 못하고 그런 계획을 세운 거야. 애초에! 처음부터! 넌 나를 이기고 이 세상을 혼자 지배할 생각이었어!

디아나의 목소리와 표정은 점점 더 표독스러워졌고, 날카로워졌다.

그에 텔라가 씁쓸한 표정을 지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신 차려! 빛의 신이라면서 고작 태초의 조각 두 개에 그렇게 흔들릴 거야! 내가 빠져나왔다고 이렇게 무너지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런 정신으로 네가 원하는 걸 어떻게 하겠다고 그러는 거냐고!

-…이게 나야. 본래 내 모습이라고!

지이이잉!

디아나의 몸에서 회색빛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사방을 뒤덮었다.

그 모습에 텔라가 언제 목소리를 높였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강한데도 너에게 흡수된 건 염려 때문이야. 너와 나는 본래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버텼던 것 역시 네가 이렇게 흔들릴까 봐 걱정돼서였어.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어. 내겐 그냥 소멸하기 싫어서 거짓말을 지껄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거짓말은 네가 했지. 너의 뜻대로 모든 걸 이루기 위해 네가 아끼는 아이들에게 말이야.

-아니, 난 배려한 거야. 진실을 알기에 아이들은 너무 연약하니까.

-그런 배려를 아이들이 원할까?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 배려를 아이들이 싫어할 리도 없고.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디아나의 모습에 텔라가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너… 단순히 변한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존재가 됐구나? 예전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지금부터 난 너를 소멸시키고 태초의 조각들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겠어. 그다음 카론을 찾아 다른 태초의 조각들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어 모든 것들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이 될 거야!

디아나가 짙은 탐욕을 드러내자 텔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찾지 못할 거야. 카론은 신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신의 눈을 피하다니?

-못 믿겠으면 직접 찾아봐. 어디에서도 카론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나도 몰라. 신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이들이 누군지.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네. 진짜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야.

디아나가 살기를 드러내자 회색빛 기운들이 반기듯 요동치며 공간 전체가 빠르게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디아나의 몸에서 회색빛의 기운들이 뿜어져 나와 텔라를 향해 움직였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뻗어 오는 회색빛의 기운에 텔라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저항하지 않고 그냥 네게 모든 걸 넘겨주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너에게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츠아아아아!

텔라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뿜어져 나와 회색빛 기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모습에 디아나가 차가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런 약한 기운으로 뭘 하겠다는 거지?

-맞아. 난 약해. 나의 힘이, 권능이 대부분 너에게 넘어갔으니까.

-나보고 인간을 닮았다고 하더니 정작 네가 그렇네. 되지도 않는 발악은 인간들의 전유물인데 말이야.

-난 부정하지 않아. 그들을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너를 반대했던 거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회색빛, 아니 혼돈의 기운과 죽음의 기운이 서로 충돌했지만 어떤 폭발도, 충격도 일어나지 않았다.

혼돈의 기운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죽음의 기운을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 텔라는 저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돈의 기운을 향해 스스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디아나가 미간을 좁혔다.

-뭘 하려는 거야?

-각인시켜 줄게. 네가 누군지 절대 잊지 못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텔라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혼돈의 기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막 혼돈의 기운과 부딪치려고 할 때, 그녀의 몸이 시커먼 기운으로 화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화아악!

시커먼 기운들은 빠르게 혼돈의 기운을 피해 곧장 디아나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오는 죽음의 기운을 보며 디아나가 코웃음 쳤다.

-고작 생각한 게 이거라니 실망이야.

디아나의 앞으로 혼돈의 기운이 모습을 드러내며 죽음의 기운을 흡수했다.

순간 텔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손을 뻗자,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죽음의 기운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츠츠츠츠!

죽음의 기운들을 손끝에 모은 텔라는 혼돈의 기운들을 가르기 시작했다.

하나 텔라의 기운은 너무도 약했다. 손끝에 모인 기운들이 빠르게 흩어지며 혼돈의 기운에 흡수돼 버렸다.

그런데도 텔라는 포기하지 않은 채 디아나와의 거리를 좁히고 또 좁혔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릿하게 다가오는 텔라의 모습에 디아나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디아나의 물음에도 텔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로 혼돈의 기운을 가르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츠츠츠츠!

그러는 사이 죽음의 기운들은 물론이고 텔라의 영혼까지 혼돈의 기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너무 필사적이라 안타까워 보이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 디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지금!

그 외침에도 텔라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디아나가 갈등하듯 텔라를 노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혼돈의 기운들이 파도처럼 텔라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막 덮치려고 할 때, 텔라의 손가락이 디아나의 가슴에 닿았다.

순간 텔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잊지 마. 네가 누군지, 그리고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혼돈의 기운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자 끝까지 버텨 왔던 텔라의 영혼이 파도에 쓸려 가는 모래성처럼 흩어져 버렸다.

스아아아!

그 모습을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텔라의 손가락이 닿았던 부분을 바라봤다.

그곳엔 작고 검은 점 같은 게 찍혀 있었다.

스르륵.

작은 점은 순식간에 흐려지더니 텔라처럼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뭘 한 거니?

그렇게 중얼거릴 때, 텔라를 흡수한 혼돈의 기운들이 다시금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혼돈의 기운들은 몸으로 스며들었다.

하나 결과는 조금 전과 달랐다.

-크윽!

디아나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혼돈의 기운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몸으로 스며든 혼돈의 기운이 그녀의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들었다.

-지배하는 건 나야. 모두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그 말을 끝으로 디아나는 눈을 감은 채 혼돈의 기운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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