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13화 (13/272)

제13화. 인연 (3)

성녀(聖女).

악을 징벌하기 위해 신이 보낸 철퇴.

성스러운 빛을 휘두르는 토벌대의 용맹한 청사자.

신성제국 제일의 빛이며, 제국에서 제일가는 지조 높고 명예로운 기사…….

뭐 부르는 말은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냥 대충 퇴마사라는 이야기였다.

오직 <마왕>만을 없애기 위한 최고 등급의 빛의 기사.

그것도 보통의 마왕이 아니었다.

인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악에 최저라 불리는 ‘해골왕’만을 말살하기 위해 신이 공들여 만든 존재.

미의 신부터 최강의 전투의 신, 하물며 이름 없는 잡신까지, 온갖 신들이 모여 만든 존재였다.

그래서 어찌 되었냐고?

어찌 되기는.

신이 내린 그 천상의 미모에 마족들까지 해롱거리며 휘둘렸다. 마족 진영은 성녀의 압도적인 전투 실력에 초토화가 되었다.

사람들도 당연히 그 파죽지세와 같은 진군과 함께 해골왕도 금방 토벌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골왕이 누구인가.

-허어, 그놈들은 참 쓸데없는 곳에 공들이는 걸 좋아하네.

해골왕은 신이 보낸 빛의 기사를 가차 없이 붙잡아 사람들 앞에 매달았다.

꼬맹이라 의욕도 나지 않아, 다신 오지 말라고 아량 있게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기는 개뿔!

-마왕을 죽이는 게 나의 사명!

자폭해서 뒤졌다!

‘이 미친 것들!’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성녀들은 해골왕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심지어 생명력은 신의 가호를 받아 바퀴벌레 수준이었고, 원래도 강했던 힘은 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해졌다.

덕분에 가장 마지막으로 만났던 81대째 성녀와 부딪쳤을 땐 솔직히 해골왕도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녀와 성녀와 연관된 자들을 철저하게 멸망시켰다.

다시는 일어날 생각도 못 하도록.

기고만장하게 마왕 토벌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짓밟았는데.

분명 그랬…는데.

‘이런 미친, 성녀 가문이라고?!’

성녀 가문의 자손이라는 말에 해골왕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니, 물론 성녀의 핏줄이면 최고 혈통이지. 능력만 봐도 더 바랄 것 없는 최고의 몸이다.

신들한테 복수하기에 완벽할 정도로 강하고 좋았다. 오히려 이 핏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볼 정도로.

문제가 있다면 하나뿐이지.

동시에 그는 왜 에슈아의 성기사들이 해골왕의 이름만 나오면 눈빛이 변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슈아는 대대로 신의 주적을 처리하고, 유일하게 성녀를 배출하는 긍지 높은 가문.”

“성녀님은 대대로 해골왕의 멸망만을 위해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해골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빌어먹을, 그러고 보니 성녀의 성을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왜 눈치를 못 챘지?

성녀가 특정 가문의 사람이면 자신이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성녀님은 행여 가문 사람들에게 마왕의 손길이 닿을까, 모든 정보를 은폐하던 분이셨죠. 복장까지도 철저하게 감추셨습니다.”

“어찌나 가문 사람들을 위하시는 분이었는지…….”

아니, 그런 건 밝혀야지!

안 밝히니까 이런 선량한 피해자가 생기잖아! 젠장!

“심지어 해골왕은 마왕 주제에 싸우지도 않고, 도망만 치다가 성녀님을 미로 같은 곳에 던지기나 했던 치졸한 놈이었죠.”

“분명 일부러 상대도 안 하고, 살려서 돌려보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 맞습니다. 무인으로서, 기사로서의 긍지가 꺾이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롭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테니까요. 간사한 마족의 수장답습니다.”

해골왕은 딸랑이로 뒷목을 또 잡았다.

아니, 그냥 자폭하는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것뿐이거든!

살점 튀기는 꼴을 지들이 봐야 그런 소리를 안 하지.

그리고 살아 있으면 장땡이지, 긍지니 뭐니 고리타분한 소리나 하고 앉아 있다니.

‘툭하면 깜빡이도 안 켜고 난도질하는 야만인 놈들.’

자신이 왜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애초에 몸을 쓰는 것보다 머리를 쓰는 것에 자신이 있기도 했지만, 시체 꼬라지를 보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과거의 일 때문에 피나 시체는 생리적으로 역겨웠으니까. 부모를 앗아갔던 일이 트리거가 되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면 뼈까지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럼 마법으로 성녀를 처리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했지!

신의 힘이 깃든 성녀의 마법 방어력은 대대로 상상을 초월했다.

죽이려면 철저히 무력화한 뒤 직접 모가지를 날리거나 심장을 뽑아야만 했다.

하다못해 자신 외엔 그 누구도 성녀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할 정도로 용가리 통뼈였고 말이다.

그리고 괜히 성녀는 산 채로 존재를 멸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성녀는 죽여 봤자 해골왕의 손해였다.

신들 입장에서는 성녀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신의 힘을 많이 소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숫자를 무작정 늘릴 순 없었다.

늘린다면 그 힘을 회수해야 신계에 큰 무리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 만큼 해골왕이 성녀를 죽여주면, 오히려 고마워하며 냅다 다음 세대를 생산해 보냈겠지. 이번엔 업그레이드까지 마쳐서 말이다.

한마디로 성녀를 살려두는 것이야말로 신들의 힘을 소비시키는 방법.

그래서 일부러 싸우자는 것도 무시하고, 죽을 때까지 헤매라고 무인도 같은 곳에 툭 던져 놓았지만…….

“역대 성녀님들께서 모두 분통해하셨죠. 싸워주지도 않을 거면 차라리 죽이거나, 마왕이면 마왕답게 노예로 잡아가라! 하고요.”

시발! 고어물 찍는 또라이 데려다가 뭐에 써먹으라고!

곧 황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해골왕에 대한 분노는 이해하네. 그 간악한 해골왕만 아니었어도 에슈아 가문이 저물 일도 없었겠지.”

닥쳐, 돈줄!

성녀를 쓰러트리지 않았으면 내가 뒤졌어!

아무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약세 취급인가 했더니, 나를 처리 못 했다고 그만한 정통성과 힘을 가지고도 명예가 추락한 거군.’

어렵지 않은 이야기였다.

성녀의 존재 의의는 해골왕의 말살이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토벌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성녀가 신성제국에서 수백 년에 걸쳐 어떤 취급을 받아 왔겠는가.

그리고 역대 교황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에슈아 가문과 성녀를 신성제국의 수치로 취급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그놈들이라면 그런 녀석들이었다.

‘그래도 뭐, 괜찮아.’

성녀가 조상님?

그게 뭐 어떻단 거지?

성녀가 조상님이라 해도 해골왕은 떳떳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들을 쇠락시킬 의도긴 했어도, 성녀를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해골왕 때문에 미로에 갇혀 아사하신 성녀님만 열 분이십니다.”

…아씨, 풀어주는 거 잊었네.

“미로면 차라리 낫지. 화병 걸려서 돌아가신 분들이 다섯 분이시다.”

…아니, 좀!

최강의 기사란 것들이 왜 전부 좀스럽게 그런 걸로 뒤져! 뒤지기는!

교황만큼은 아니지만, 하필 오래전 악연과 한솥밥을 먹어야 한다니, 이런 민망한 경우가 다 있나.

그래도 뭐, 사실 괜찮았다.

악연이라 해도, 마왕과 신의 대리자라는 위치상 싸웠을 뿐.

불구대천지원수라는 단어는 교황 쪽과 어울렸고, 성녀하고는 미운 정과 애증이라는 단어가 더 맞았다.

아마 숙명만 아니었다면 되레 죽이 잘 맞았을?

그러니 해골왕으로서는 딱 한 명만 보지 않으면 되었다.

바로 마지막으로 봤던 81대 성녀.

유일하게 신성드래곤의 힘까지 쓸 수 있던 여자라, 해골왕조차도 목숨의 위협을 느꼈던 최강의 성녀 멜리사.

부딪치기도 가장 많이 부딪쳤고, 가장 연이 길었던 성녀였다.

‘하지만 그 녀석을 본 게 최소 50년 전이다.’

지금이 언제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만났던 그녀의 나이와 자신이 봉인되었을 시간을 합친다면 최소…….

“해골왕이 봉인된 지 150년이오. 그사이 마족들의 세력이 더욱 커진 만큼, 성자는 신성제국이 다시 힘이 키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지. 황실에게도 귀한 아일세.”

좋아, 도합 200년!

멜리사, 이미 죽었네.

살아 있으면 이미 좀비지.

“하물며 지금 에슈아에는 성녀가 없지 않은가. 그 아이를 낳고 부군과 함께 행방불명 상태니.”

옳지, 그렇지!

가문에 성녀가 없댄다!

무려 날 낳고 행방불명되었댄다!

그럼 더욱 쉽게 이 가문을 먹을 수 있겠… 아니, 이게 아니라 잠깐만.

지금 행방불명된 게 내 부모라는 거잖아!

해골왕은 골치 아픈 듯 얼굴을 짚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방치된 이유를 깨달았다.

‘이제 보니 고아라서 날 찾으러 오는 게 늦은 거였군?’

아니 뭐, 좋았다.

능력도 좋았고, 가문도 좋았고, 대충 다이아수저 중에서도 왕족급 수저고.

모든 게 좋은 상황이다.

젖먹이에게 보호자가 없는 건 좀 하자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귀족가의 아이라면 보통 유모가 붙을 것이고, 오히려 어설프게 이어진 혈육 관계보다 사용인이 움직이긴 편했다.

문제가 있다면 교황으로부터 지켜줄 강력한 아군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인데…….

“아이의 부모가 없어도, 가모님이 계시니까요. 교황에게서도, 마왕에게서도, 아이는 외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에슈아가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 성녀 대신에 가모가 있구나.

그럼 상관없었다.

누가 됐든 교황만 견제해줄 수 있다면 상관없었…….

“하지만 멜리사 경은 지금 해골왕의 부하들을 토벌하러 가지 않았는가? 복귀하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은데.”

그래그래, 멜리사가 내 부하들을 토벌하러…….

아니, 잠깐.

누구?

멜리사?

“가모님은 그 해골왕과 마지막으로 싸우신 전대 성녀이자, 최강의 성녀셨습니다. 그 정도의 일에 시간을 오래 지체하실 분도 아닙니다. 가모님께서도 손주를 기대하고 계실 테고요.”

가모의 정체를 알게 된 해골왕은 순간 피를 토할 뻔했다.

아니, 멜리사!

왜 아직도 안 죽고 살아 있어!

‘인간이면 양심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라, 좀!’

수백 살을 처먹다 못해 애로 변한 해골왕이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쪽이 아니었다.

‘젠장, 들키면 그 즉시 성불이다.’

해골왕의 얼굴이 썩어 들어갈 때, 황제가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떠한가? 부모를 해한 범인의 윤곽이 잡힐 때까지 황실이 돌봐주겠네. 그편이 멜리사도 안심하고 가문의 과업을 끝마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에슈아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울컥한 얼굴이었다.

에슈아의 기사들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반응을 읽은 건지,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에슈아의 기사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서로가 더 잘할 수 있는 걸 하자는 것이지.”

공동의 목표.

그건 교황과 교황청을 말하는 것이었다.

에슈아로서도 자신들을 천덕구니 취급하는 교황청을 증오할 것이고, 황실도 눈에 거슬리는 교황의 세력들을 눌러두고 싶을 테니까.

정치와 거리가 먼 에슈아 가문은 하던 대로 국경의 수호와 퇴마 일에 힘쓰라는 의미였다.

그게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라고.

“황실이 이 아이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네. 무엇보다 에슈아는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이 아닌가. 사내아이는 황실에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사내아이의 육성은 이쪽이 더 전문일 것 같은데.”

그러자 그들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외람되오나, 말씀을 올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무엇이지?”

“확실히 에슈아의 기사들은 성녀 호위가 주된 사명입니다만, 그 이전에 마(魔)를 전문적으로 제거하는 퇴마기사. 마가 발생하는 제국 최전선에서 싸우는 부대이기도 합니다.”

운을 뗀 에슈아의 기사들의 눈이 고요하게 빛났다.

“퇴마에 있어서는 신성제국에서 가장 따라올 곳이 없는 곳이 에슈아가 아니겠습니까. 제국을 지키는 최전방의 칼로서 도련님을 지키고, 사내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드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군기가 바짝 든 눈빛에 황제는 흥미로워했다.

“사내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

숙부는 기사들의 말이 맞다는 듯 당당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그 아이에게 주실 수 있는 건 그래 봐야 비단과, 성, 금괴, 땅 정도이실 것입니다. 물론 재화 좋죠. 하지만 에슈아는 그런 금력과는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걸 줄 수 있습니다. 목숨과도 맞바꿀 수 없는 명예와 도전 정신. 그리고 불굴의 정신을…….”

그런데 그때였다.

무엇을 본 건지 숙부가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요람에서 탈출한 해골왕이 엉금엉금 황제에게 기어가고 있었다.

놀란 기사들이 요람과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도, 도련님?”

요람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해골왕이 향하는 장소가!

덥석!

황제의 앞까지 기어간 해골왕의 작은 손이 황제의 발목을 잡았다.

곧 황제는 다리까지 툭툭 치며 안아달라는 해골왕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

“오! 그래, 우리에게 와주는 것이냐!”

“도련님?!”

에슈아의 기사들은 기겁해서 해골왕을 잡으려 했다.

지금 상황에선 가면 안 된다는 듯, 어서 이리 오라는 듯,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애타게 손짓만 허공에서 휘둘렀다.

“도련님, 이쪽, 이쪽! 까꿍!”

작은 목소리로 관심을 이끌려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황제에게 안긴 해골왕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응, 니들 필요 없어.

그냥 황실 귀빈 할래, 까꿍.

“도, 도련님! 어서 이리 오세요!”

싫다, 이놈들아.

군대냐?

새끼들이, 명예와 불굴의 도전 정신은 얼어 죽을.

황제에게 꼭 안긴 해골왕은 들은 척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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