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이 정도야 쉽지 (3)
“기뻐해라, 아이작!”
아이작은 낯익은 목소리에 젖병부터 떨어트렸다.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정원에서 릴라이가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저 대가리에 꽃을 단 해맑은 얼굴을 봐선 또 징글맞게 책을 읽어주러 온 것 같은데.
아니 뭐 그래. 책 좋지.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려는 조기교육 마음가짐, 아주 좋아!
엄마, 아빠란 단어도 모르는 애새끼한테 백과사전 두께의 역사책을 읽어주는 게 문제긴 하다만 그것도 뭐 상관없어!
오히려 역사를 알아두면 여러 술법들의 기원(origin)을 알 수 있었다.
기원을 알면 술법들을 더 빨리, 더 잘 다룰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이 치맛바람 숙부 놈이 역사책을 들이미는 건 오히려 좋다!
들이미는 게 하필 해골왕이 성녀한테 개털리던 이야기니까 문제지, 시발!
[세상에 주인님. 아무리 빈곤해도 성녀의 지갑을 털고 도망가시다니. 마왕이 아니라 좀도둑 아닙니까.]
아, 좀생이 새끼들.
역사책에 별걸 다 적어놨네, 젠장.
아이작이 졸 때 모든 이야기를 대신 들어둔 위스퍼가 실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마족 체면 신경 좀…….]
닥쳐! 그깟 지갑 좀 훔쳐갔다고 죽어라 쫓아와서 남의 다리를 뜯어간 성녀들이 더 나빠!
아무튼 이번엔 또 뭔 책을 가져왔나 했더니, 뜻밖에도 릴라이는 책이 아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보고 놀란 건 아이작을 돌봐주던 아실리였다.
“세상에, 반지군요!”
뭐? 반지?
설마 돌반지? 금반지인가?
아이작은 기분이 좋아진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실제로 릴라이가 반지 케이스를 열자 아름다운 현물이…….
“자, 숙부가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
선물치고는 지나치게 낡아빠져서 철기시대 원시인의 유품처럼 보인다만.
하물며 돌반지치고는 금이 1mg도 안 섞인 고물 덩어리로 보인다만?
그래서 아이작은 항의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우드득.
멀지 않은 곳에서 질투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작의 또 다른 숙부인 고엘, 아니 싹퉁바가지였다.
그리고 저놈은 왜 죄도 없는 반지한테 저 지랄인지는 모르겠다만, 표정이 표정이었다.
마치 사촌이 땅을 샀다는 말을 들은 표정인 걸 보면, 필시 평범한 반지가 아닌 거겠지.
그 증거로 반지를 노려보는 고엘은 이를 갈고 있었다.
‘빌어먹을, 왜 하필 저게 넘어가서는.’
사실 고엘도 일이 이딴 식이 될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고엘은 에슈아 가문의 5남이자, 신성제국의 교황파로서 에슈아의 실권을 하나씩 가져오고 있었다.
에슈아 가문에 교황가를 끌어들이고, 가주의 자리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기껏 소공작인 장남까지 사라져서 자신들이 가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릴라이 저 대가리 꽃밭 놈이 끼어들어서.’
장남과 성녀의 아이인 아이작이 있으면 자신들이 실권을 쥘 수 없게 된다. 하다못해 아들인 슈리가 교황이 되는 길도 막힐 것이었다.
그래서 마족과 드래곤이 있는 보물고를 이용해 젖먹이 조카를 없애려고 했는데.
-예? 지금 뭐라고?
돌잡이 문제로 원로회에 불려간 고엘은 미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아이작에게 뭘 지원해 준다고요?
-새삼 뭘 묻느냐. 원래 돌잡이 땐 보물고에서 1회용 축복들을 뿌려서 들여보내지 않느냐. 위험하니까.
보물고의 축복.
쉽게 말해 보물고에 들어갈 때 달아주는 생명줄이었다.
부정행위 때문에 아이템의 도움을 받는 건 안 되지만, 최소한의 목숨 줄은 허락해 준다는 것이다.
그 룰을 알고 있기에 슈리도 바로 온갖 좋은 축복을 받아둔 것이고 말이다.
-슈리는 이미 교황청에 연락해서 축복을 받아 두었다지?
-예. 아이의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아이템만 아니면 되니 룰 위반은 아니잖습니까?
보물고의 축복 장치?
그래 봐야 쓰레기였다.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에 가까운 시련일수록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법!>
누가 성녀들의 돌잡이 장소 아니랄까 봐.
성녀의 보물고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은 그야말로 기본, 하급 축복들뿐이었다.
고엘이 괜히 돈, 인맥을 총동원해 교황청의 축복을 받아둔 것이 아니었다.
교황청의 축복이면 신성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상급 축복이니까!
‘그러니 릴라이. 교황청에 뒷배도 없는 네 조카는 싸구려로 버텨봐라. 좋은 물건을 가져오는 건 내 자식이다.’
불만을 품는다 해도 뭐 어쩔 건데?
설마 성녀의 자식이 성녀 보물고의 축복을 거부하기라도 할 셈인가?
지가 어쩔 건데?
그렇게 고엘이 릴라이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을 때였다.
-참, 그렇지. 보물고의 축복 장치가 고장 났다더구나.
-그래서 가모님이 이번엔 특별히 성녀의 보물을 빌려주라 하셨다.
-?!
망할, 지금 뭐라고?!
-오! 그래그래, 성녀님의 물건이면 축복에 버금가겠지.
-에잉, 교황청의 축복보다 귀하지.
-그러니 릴라이는 성녀의 전당에서 물건을 골라가도록.
커헉!
성녀의 보물이라니!
아무리 교황청에서 축복을 받았다 한들, 성녀의 보물과 비교가 될 것 같은가!
눈이 돌아간 고엘은 바로 외쳤다.
-그 보물, 저희 애한테도 빌려주십시오!
-엥? 넌 이미 교황청에서 필요한 걸 받았다지 않았느냐. 게다가 슈리는 성흔도 있고.
-아, 아니. 그게.
-애초에 아이작은 성흔이 없으니 보물고에 넣어보자 한 건 네가 아니냐.
-성녀의 보물이라 해도 고작해야 하급 수준이다. 숙부가 되어 성흔도 없는 조카의 생명줄까지 탐하는 것이냐. 성직자가 그러면 안 되지.
-떼끼, 그렇게 안 봤는데.
아니, 씨! 그게 아니라!
결국 그렇게 릴라이는 성녀의 보물을 골라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집어간 게 저것이다.
[엘더링]
신의 작은 기적이 담긴 반지.
수백 년간 해골왕과 싸워오면서 이젠 수명을 다해가는 물건.
비록 앞으로 한두 번밖에 못 쓸 낡아빠진 물건이지만, 저 반지가 교황 쪽에서 은밀히 탐하던 물건이란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원래는 교황청에 기부식으로 빼돌려주려 했거늘.’
어쨌든 그런 상황이었다.
고엘은 이를 갈며 아이작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속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그가 상냥한 얼굴로 걸어왔다.
“우리 조카는 언제 봐도 사랑스럽구나.”
“?”
“이 집에는 좀 적응이 되었느냐? 소중한 조카가 울고 있진 않을까 이 숙부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
아이작은 미친놈 보듯 고엘을 보았다.
시발, 이 새끼가 드디어 돌았나?
어째 에슈아의 핏줄들은 죄다 종족값처럼 미남 미녀인 것 같은데, 이놈은 교황이랑 닮은 얼굴로 웃으니까 좀 역겹다.
“릴라이. 선물을 하려면 제대로 해라. 줘도 이딴 고물을 주느냐.”
“고물이라니요. 이 물건은 성녀님의…….”
아실리가 뭐라 하려 했지만, 고엘은 어디서 하인 출신이 끼어드냐는 듯 노려보다가 아이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작은 내게도 무척 소중한 조카아이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장소에 들어가는 건데. 제대로 발동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폐기품보다 훨씬 좋은 걸 줘야지.”
그렇게 말한 고엘은 품속에서 비슷한 크기의 상자를 꺼냈다. 동시에 아이작이 든 반지 케이스를 교환하듯 집은 건 덤.
음, 그러니까 이 새끼가 물건을 바꿔 가겠다는 거네.
“동생아, 다른 가문 후보들도 모이는 자리다. 체면을 생각해야지. 이런 걸 주면 5대 공작가의 이름이 울어. 너만 해도 그렇다. 성녀 가문의 정신? 상급 성기사가 돈도 안 되는 최전방대에 들어가니까 이런 고물밖에 못 주는 거다.”
“……!”
고엘이 내민 반지는 릴라이가 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싸 보였다.
기능만 봐도 최신식 기술을 담은 물건임을 모를 리 없었다. 릴라이로서는 솔직히 구하기 힘든 물건이다.
“특별히 교황청에서 좋은 축복을 걸어온 물건이다. 내일 들어갈 보물고에서는 이쪽이 더 도움이 될 테지.”
릴라이는 번쩍이는 반지의 모습에 꾹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으로는 성녀의 물건이 뒤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빛바랜 초라한 골동품과 번쩍이는 새 물건이었다.
하물며 성녀의 명예가 떨어지고, 교황청과 다른 5대 가문의 위상은 높아지고 있는 상황.
뭐가 더 조카에게 좋아 보이는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곧 그 표정을 읽은 듯, 고엘은 픽 웃으면서 성녀의 반지를 회수해가려 했다.
“이거는 내가 다시 돌려놓고 오겠… 어엉?”
고엘은 당황한 듯 아이작을 보았다.
꽉.
아이작이 고엘이 가져가려는 성녀의 반지를 놓지를 않았다.
니 새끼가 뭔데 가져가냐는 얼굴로.
고엘은 난처한 듯 낑낑거리면서 반지를 빼내려 했다.
“아이작…! 더 좋은 걸 주지 않았느냐. 이거 말고, 이쪽이 네 것… 아악!!”
아이작은 꺼지라는 듯, 고엘이 쥐여준 반지 상자로 고엘의 얼굴을 찍어 내렸다.
퍼억!
“도, 도련님!”
당황한 아실리가 아이작을 안고 물러섰고, 고엘은 피를 흘리는 얼굴을 부여잡았다.
고엘의 하인도 놀라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바로 의원을……!”
하지만 평소라면 불같이 화를 냈을 고엘이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그래, 다 이해한다. 아직 성물 보는 눈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무려 교황께서 주신 물품이다. 네게도 훨씬 더 좋은…….”
응. 시발, 더 필요 없어.
아이작은 교황의 반지를 냅다 연못에 던져버렸다.
풍덩!
“아악!”
고엘의 물건이 연못에 빠지자 모두가 놀라고, 고엘은 연못으로 달려갔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아이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교황의 힘이 들어간 걸 쓸 것 같냐?’
더러워서 제발 받아달라고 해도 안 쓴다.
그리고 낡아서 본래의 색을 많이 잃긴 했으나, 척 하면 척이었다.
무려 마왕과 수백 년간 목숨 걸고 싸워왔던 성녀의 고귀한 아이템이었다. 당사자가 못 알아볼 것 같은가?
도대체 왜 성녀가 한물간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는 않지, 시발.
아무튼 어중간한 성물 수십 개보다 수천 배의 가치가 있는 게 성녀의 물건!
뭐, 지들도 그걸 아니까 은근슬쩍 교환해 가려는 거겠지.
물론 아까는 가치가 없다고 까긴 했지만, 그건 엄연히 돌반지로서의 가치. 성물로서 가치를 매기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야 지금 세대의 인간들 눈에는 고물딱지라 하급품으로 보일 만도 하다만.
‘이거 돈 주고도 못 사는 최상급이야, 왜 이래.’
이놈이 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은 내구도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해골왕에겐 이걸 새것처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아마 빛바랜 다른 보물들도 다 복구시킬 수 있을걸?’
하지만 그걸 모르는 릴라이는 가슴이 먹먹한 듯 말문을 잇지 못했다.
저 어린것이 마치 낡아 빠졌어도 교황청 물건보다 성녀의 물건이 더 가치 있다고 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교황청은 성녀를 천덕구니 취급하고 있었다. 성녀의 아들인 릴라이로서는 몹시 기쁘고 고마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게 어린아이의 변덕일지라도.
고엘로서는 열이 뻗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게 어떤 물건인데. 당장 건져와!”
고엘의 명령에 그의 종자가 재빨리 나무 막대기를 뻗으며 휘저었다.
“죄, 죄송합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방금 들어간 걸 왜 못 찾아!”
“그, 그게, 그사이 깊은 곳으로 빠진 것 같은…….”
“애가 던진 게 왜 깊이 빠져! 핑계 대지 말고 똑바로 못 찾아?!”
찾아질 것 같냐, 이놈들아.
그냥 톡 던진 것 같아도, 그냥 던진 게 아니었다.
두 번 다시 찾지 못하도록 몰래 무게 마법을 걸어두었다.
아마 연못 바닥을 뚫고 지하 암반층까지 들어갈걸.
그걸 모르는 위스퍼는 역시 주인님이라고 했다.
[역시 신성 진영의 수장에게도 굴하지 않으시는 주인님! 물건이 쓸 만해도 더러운 놈들의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으시겠다는 기개! 역시 마족의 표본……!]
‘새벽에 네가 다시 찾아와.’
[예?]
‘나중에 프리미엄 붙여서 비싸게 팔 거야.’
[…….]
침묵한 위스퍼가 진심이냐는 듯 한마디 했다.
[…정말 제가 주워옵니까?]
‘그럼 내가 주워오리?’
위스퍼는 좌절했다.
* * *
“그럼 성녀님의 반지는 결국 아이작 도련님의 것이 된 겁니까?”
호위 기사의 말에 고엘은 불같이 화를 냈다.
“아이작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아이작의 이름만 들어도 성질을 내는 그였다.
반면 욕만 퍼먹은 기사는 안절부절못했다.
“성녀님의 그 반지는 주변인의 성력을 빨아들여서 자동으로 축복을 발동하는 물건 아닙니까. 안 그래도 가모님께서 성자 후보들을 부르신 상황입니다. 아이작 도련님에게 더욱…….”
“유리할 거라고?”
“예, 예…….”
기사는 눈치를 봤지만, 고엘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 반지. 본인의 성력을 안 써도 되니, 아직 성법도 못 쓸 아이에겐 최적의 물건이야. 그러니 그걸 골라준 머리는 칭찬해줄 만해. 하지만.”
“!”
“그걸 제대로 쓰려면 주변에 최소 20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돌잡이에 몇 명이나 올 것 같으냐? 성자 후보 전원?”
“그.”
“가뜩이나 성녀의 대한 여론도 안 좋고, 애초에 에슈아에서 제안한 거다. 지금도 귀족들 모두가 에슈아의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판이지. 우리야 손해 볼 일이 아니니 입은 다물었다만, 다 합쳐서 10명은 올 것 같아?”
하필 돌잡이 장소도 에슈아의 안방인 셈이었다. 성자 후보를 가진 귀족들로서는 도발당하는 느낌이라 아마 모두가 무시할 것이란 소리였다.
초라하게 텅 빈 잔치장을 보면 본인들의 급을 알게 되겠지.
그러니 순진하게 그런 반지를 쥐여준 어리석음이나 탓하라며 고엘은 비웃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뭐? 몇 명?”
돌잡이 당일, 고엘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148명?! 정말 성자 후보가 148명이라고 했어? 그만한 인원이 왔다고? 여기에?”
“예. 정확히는 성자 후보 148명에, 그를 따르는 하인들과 귀족들까지 3,789명…. 예상과 다르게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모여든 것 같습니다.”
뒷목을 잡은 고엘은 할 말이 많았지만, 욕을 아끼기로 했다.
“뭐 보나 마나 이름 없는 놈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든 거겠지.”
“아니 그게… 실은 후작가 등 대귀족들부터 다 아실 만한 중앙 귀족들께서…….”
“뭐?”
고엘의 동공이 떨렸다.
하인은 주인의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또…….”
“또 뭐! 누가 왔는데!”
“황제 폐하까지…….”
고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자존심 높은 귀족 놈들이 왜 와.
뭔데. 이 인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