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뭔가 이상하구나 (1)
웅성웅성.
수많은 아이들이 에슈아의 영지에 모여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릴라이와 아이작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으로 대충 세어봐도 애들이 하나, 두이, 서이, 너이, 오십, 백…….
결국 100명도 넘는 아이들을 보며 릴라이는 도저히 한마디 안 하고는 배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뭔가 이상하구나.”
야. 지금 이게 이상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날 문제냐?
“분명 성자 후보는 25명이라고 들었는데.”
그래 미친놈아, 주교 놈도 그렇게 말했잖아.
“왜 성자 후보가 148명이지?”
그러니까! 왜 늘었냐고, 새끼야!
그들은 지금 성자 후보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가모가 소집 공문을 보낸 것이 한 달 전이었다.
이만한 후보들이 모이기엔 빠듯한 시간일 수도 있지만, 성자 후보들은 모두 교황청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성법의 힘을 받으면 교황청이 있는 수도에서 동부의 에슈아 영지까지 오기 충분했다.
문제는 성자 후보가 24명이 아니란 거지.
하물며 숫자만 뻥튀기된 거면 말도 안 하지.
“실은 국적이 다른 성자 후보도 있다고 합니다.”
“뭐? 국적이 다르다니?”
“그게… 이웃 나라 왕자께서 성자 후보라며 오셨던데요.”
“뭐?!”
허이고, 하다 하다 성자 하려고 귀화까지 하시겠다.
뭐, 원래도 인간 진영에서 성녀 같은 성인의 존재는 컸다.
대륙의 정세가 바뀔 만한 일이니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단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거지.
뭐 아이작으로선 좋은 일이긴 했다.
“설마 폐하까지 이곳에 와주실 줄이야!”
객들을 맞이하는 에슈아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에게 누가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황제의 발걸음에 귀족들도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 참여율이면 사실상 공식 선발전 아닙니까?”
“예. 이 정도의 눈이 모였으면 교황청도 무시할 수는 없겠죠.”
“만약 여기서 아이작 도련님께서 제일 좋은 걸 갖고 오시기라도 한다면……!”
사실상 성자로 인식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랬기에 아이작을 위해 보물고를 열어준 릴라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상 밖이구나. 가모님이 하신 말이 함정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안 올 줄 알았는데.”
사실 릴라이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작에게 좋은 성물을 쥐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여차하면 아이작의 반지도 자신이 성력을 채워줄 생각까지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함정이라 생각할 리가 없지, 이 친구야.”
“!”
릴라이를 향해 반갑게 다가오는 청년이 있었다. 릴라이의 친구인 시몬은 지금 에슈아 때문에 제국의 모든 가문이 난리가 난 걸 아느냐며 웃었다.
“무려 에슈아의 자식들이 참여한다니까, 절대 빠질 수 없다더군.”
릴라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에슈아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주니 명예로운 일이로군.”
“아니? 약해빠진 에슈아 사내놈들이 둘이나 들어가니까 함정은 절대 없을 거라던데. 하하하하.”
빠직.
숙부는 물론, 에슈아 가문의 기사들의 핏대가 서는 소리가 들렸다.
에슈아의 사내들이 세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 만한 대목이었다.
“그래도 아이가 크게 될 상이군. 역시 에슈아 놈들은 종족이 다른 거 같아. 옆에 서 있으면 무슨 엘프랑 망둥어를 붙여놓은 거 같다니까?”
칭찬을 하려 해도 이미 늦었어, 새끼야.
“하물며 가모께서 그런 걸 걸었는데 안 올 수가 있나. 교황가도 안 오고는 못 배길걸.”
가모? 그런 거?
아이작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숙부의 친구는 능청스럽게 릴라이를 찔렀다.
“참, 아이작한테 약혼녀는 아직 없겠지? 마침 우리 가문에 이 아이 또래가 있는데, 네가 가주님께 좋게 말을… 커헉?!”
시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황급히 내려가는 바지를 부여잡았다.
벨트가 사라진 것이다.
“릴라이! 너 이 자식!”
그사이 릴라이가 휘황찬란한 보석 벨트를 아이작에게 안겨주었다.
“자, 아이작. 저 못생긴 망둥이 삼촌이 선물을 주셨구나, 이런 거 좋아하지?”
“따야!”
“야!”
그게 본인의 벨트임을 모를 리 없는 시몬이었다.
“이게, 능력을 훔치는 데 쓰고 있어?! 니가 그러고도 성직자냐… 커헉!!”
파각! 파각! 파각!
이번엔 시몬 옷의 금단추를 몽땅 뜯어갔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였다. 그리고 그건 릴라이의 능력인 신속.
“어이쿠, 이번엔 못생긴 삼촌이 순금까지 주셨구나. 광산을 가진 부자 삼촌이니 앞으로 돈줄로 삼으면 된단다. 아, 우리 아이작 맛있는 거 사주라고 까까값도 주셨네?”
“?!”
심지어 저 새끼가 지갑까지 뜯어갔다!
시몬이 몸을 더듬는 모습에 옆에 있던 기사들은 경악했다.
세상에, 모범생 릴라이 도련님이 도둑질이라니!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청렴한 분께서 저런 파렴치한 짓을 하시다니!
반면 릴라이는 어린 조카가 돈을 좋아하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순도 99% 금에 아이작이 이빨 없는 입으로 헤죽헤죽 변태같이 웃어댔다.
‘오냐, 광산이란 말이지.’
그러고 보면 저놈의 적색 액세서리에 새겨진 곰 문양이 낯익긴 했다.
인간 진영에서 꽤 금싸라기로 중요한 땅에서 봤던 문양이다.
분명 붉은색 백작가, 에이지 가문이었나?
거물 귀족들의 보물 창고를 관리하는 가문이었는데.
어쨌거나 그런 상단 가문이면 무인 가문보다 천만 배 쓸모가 많겠지. 내부를 뽑아먹을 수 있어야 신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특히 저놈이 엄지에 끼고 있는 오래된 적색 반지가 쓸모가 많아 보이는데…….
반면 졸지에 거지꼴이 된 시몬이 너무하다는 듯 보았다.
“고작 농담 하나에 사람을 벗겨 먹다니.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왜 이래, 우리 약한 조카 계속 쳐다보면 더 뜯어간다?”
나 참. 삐쳤네, 삐쳤어.
시몬은 혀를 찼다.
릴라이가 농담으로 웃어넘기지 않는 것도 처음이다.
본인은 굴욕을 삼켜도 조카의 문제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건가?
설마 에슈아 놈들한테 전우애가 아닌 가족애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따야.”
“으악! 잠깐, 이놈아! 반지는 안 돼! 반지는!”
하물며 에슈아 놈 중에 돈에 미친 새끼가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는데!
결국 반지를 강탈한 아이작은 반지를 입에 텁 넣었다.
그걸 보며 시몬이 어째서인지 기겁을 했지만, 릴라이는 킥킥 웃으면서 아이작을 시종에게 데려가게 했다.
“벌써 돌잡이 시간이네. 반지는 입에서 빼내서 씻은 뒤 돌려 주지.”
“저 반지, 진짜 중요한 거야. 진짜 꼭 돌려줘야 해!”
“?”
부자 가문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도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하지만 정작 시몬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교황가는? 폐하도 오셨는데, 여기 안 왔나? 교황파도 쫄래쫄래 모였는데?”
릴라이는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쪽이 여기에 올까 싶다만.”
5대 공작가 중 하나이자, 현재 성자의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 불편해할 존재.
금의 공작가, 베리트.
성녀 가문인 에슈아 가문을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놈들이었다.
시몬은 알 만하다며 어깨를 들썩였다.
“하긴, 그 성격 더러운 왕족 나리들이 이런 곳에 출두할 리가 없지. 베리트 외엔 평민이라면서 한 공기도 맡기 싫어하는 놈들 아니신가?”
“시몬, 말조심…….”
“흥, 왜! 우리 아들도 성자 후보야! 매일 코밑에 똥 바른 것 같은 표정인 교황가 놈들보다 더 좋은 걸 가져오기만 하면 돼……!”
그런데 그때였다.
“격이 낮은 친구와 어울리는 것. 하물며 뒷담은 좋지 않지. 에슈아.”
“!”
릴라이는 상대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베리트 추기경!”
20대 중반. 갈색 머리에 릴라이보다 연상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시몬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설마하니 귀하신 추기경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왜 눈치 없이 교황 가문 사람, 그것도 베리트가의 가주가 여기까지 왔냐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를 있지도 않은 사람 취급하는 베리트 추기경은 릴라이를 썩은 오물 보듯 얼굴을 찡그렸다.
“감히 성자 후보라고 떠드는 에슈아의 아이가 궁금해서 왔네만, 아이는 보이지 않는군.”
릴라이는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아이작이 교황청의 주교에게 독살당할 뻔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놈과 연관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에슈아, 아니 특히 아이작을 싫어할 인물이었으니까.
‘설마 교황가의 아이도 참여한 건가?’
사실상 성자라는 소리를 듣는 그 아이가?
아니나 다를까.
“약해빠진 에슈아의 사내아이가 돌잡이를 열다니. 부디 뭐라도 들고 올 수 있어야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 텐데.”
역시나다.
이번에 굳이 이곳에 나타난 것도 어떻게든 에슈아를 흠집 내려고…….
‘아니. 아니지!’
뭔가를 깨달은 릴라이는 새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성자 후보가 148명으로 불다니.
공식으로 인정하지도 않은 아이들이 돌잡이에 참여하는 걸 교황청이 납득할 리가 없었다.
즉, 추기경은 알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보물고 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상하지 않을 곳.
하물며 성자를 건 자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성자를 가리는 신성한 자리에서 치졸한 짓을 할까 싶다만…….’
안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에슈아의 아이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이미 마수가 끼쳤을 수도.
‘아이작!’
어린 조카가 위험했다.
* * *
에슈아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의 소문은 유명했다.
비운의 아이.
성녀 가문에서 태어난 들러리 약골들.
얼굴하고 핏줄만 쓸모가 있지, 정작 본인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마디로 만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에슈아는 예전만은 못해도 무려 신성제국의 황제와 교황을 지탱하는 5대 공작가 중 하나였다.
하물며 신화가 된, 최강의 마왕인 해골왕을 상대한 전설을 가진 가문.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가치가. 또 누구에게는 에슈아의 우월한 유전자가.
모두가 노릴 만큼 다양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약한데 가치는 높다?
참으로 좋은 사냥감이다.
동시에 신성제국의 귀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신성제국의 중심 파벌인 교황가가 성녀 가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러면 여기서 에슈아를 욕되어 보이게 하면 교황가에 점수를 딸 기회가 아닌가?
이를테면 약이라도 먹여서 보물에는 손도 못 대게 한다든가.
주최 측이 빈손으로 나오면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그러니 작은 장난을 쳐두어라.
부모의 명령을 받은 몇몇 아이들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였다.
분명 그랬는데…….
“따야, 따야 따야.”
“……????”
보물고 입구.
100명이 넘는 성자 후보 모두가 괴이한 얼굴로 아이작을 보고 있었다.
슈리는 시선을 받는 게 부끄러운 건지. 같은 식구가 아니란 듯 슬쩍 남인 척했다.
아이작은 음료수를 걸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아이작에게 음료수를 준 성자 후보 무리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에슈아의 아이, 아이작은 모인 성자 후보들 중 유일한 젖먹이였다.
분명 타깃인 걸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음료를 따라서 건넨 참이었다.
보물고 안은 찜통이고, 젖먹이 아이가 목이 말라 보여 불쌍해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물통은 광활한 보물고에서 허락된 유일한 소지품. 물병 안에는 분명 에슈아를 욕보이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설사약이 타져 있었다.
그런데 왜지.
“따으야(야)!”
왜지??
“따뜌야(한 잔 더 따라봐)!”
이 새끼, 왜 약 먹고도 멀쩡하지???
“뜌똵야(니들, 거기에 약 걸쭉하게 탔잖아)!”
심지어 눈깔이 술 취한 듯 맛이 갔는데?
“똬야야야야(마력 차오르니까 빨리 더 따라보라고! 성직자 병아리 새끼들아! 어른 말이 우습냐)!!”
심지어 이 새끼, 더 내놓으라고 물어뜯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