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쟤 도대체 뭐야? (4)
5대 광성(光聖)이라는 말이 있다.
대륙을 대표하는 5개의 신앙이란 의미다.
그리고 그 5개의 빛 중 푸른 신앙을 이끄는 인도자 에슈아.
자고로 에슈아가 어떤 가문인가!
5개의 빛 중 가장 고결한 ‘검’!
마(魔)를 멸함으로써 약자를 지키는 신앙!
최전선에서 마(魔)와 싸우는 이들인 만큼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유혹에 강해야 한다.
그래서 푸른 검 에슈아는 누구보다 청렴하고, 용기롭고, 정직하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아니 그러니까 망할. 아무튼 가장 고결하다는 평을 듣는 가문이란 거다!
분명 그러할 텐데.
“땨땨땨땨(하하하, 꿀이구만)!”
[캬캬캬컄! 빌어먹을 성직자 꼬맹이들아! 어서 주인님께 힘을 바쳐라!]
“뜌야(양분이 되어라)!”
슈리는 신나서 <성력 흡수> 반지를 흔드는 젖먹이를 보며 얼굴을 움켜쥐었다.
아이작이 반지를 흔들 때마다 강력한 성력이 반지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다른 후보들의 힘을 남김없이 빼앗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저게 마족 새끼인지, 성직자 가문의 핏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물론 정작 힘을 빼앗기는 장본인들은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어어? 왜 성법이 멈추지?”
“이것도 시련인가!”
“허억, 에, 에슈아는 돌잡이 때부터 이런 극한의 시련을 겪는구나!”
“존경스러운 놈들……!”
아니라니까, 쫌!
물론 이 상황을 아는 건 슈리 정도일 것이다.
에슈아의 순혈 핏줄 때문이었다. 에슈아의 핏줄들은 마(魔)에 대비할 수 있는 튼튼한 육체와 피에 섞인 특수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걸 목격한들,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도 못한다!
아니, 씨! 어떻게 말해!
주최 측 꼬맹이가 성자 후보들의 힘을 탈탈탈탈 뽑아내며 악마처럼 처웃고 있다고!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말해 봤자 아무도 안 믿어줄걸?
저 반지는 원래 주변의 성력을 조금씩 지원받는 반지였다.
한마디로 한 줌씩만 가져갈 수 있다는 의미다.
저딴 공갈 갈취 수준으로 성력을 주구장창 뜯어낼 수 있었으면, 애초에 성녀의 반지가 아니라 도둑놈 반지 취급… 아니, 하급품 취급도 받지 않았겠지!
릴라이 숙부도 그걸 아니까 충전량에 맞는 하급 성법을 걸어준 것일 테고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위력을?
마치 반지의 힘을 업그레이드한 것 같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저게 저 아이의 힘인가?
하지만 그런 슈리의 시선에 아이작은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본래의 힘을 끌어낸 거다만.’
아이작은 알고 있다.
수백 년 전 성녀들이 자기 하나 죽인다고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 반지도 원래는 주변의 생명력까지 빨아들여 성력을 모아주던 신의 선물이다.
성녀 본인들도 그 희생의 무거움을 알기에 더욱 필사적이었겠지만…….
‘미안한데,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낫잖아.’
성녀들은 게으른 신 놈들의 명령 하나 때문에 끌려온 토벌자였다.
자신이 왜 죽어줘야 하는데?
성녀와 함께 온 주변인들은 무슨 죄가 있어 피를 흘려야 하는데?
그래서 해골왕은 성녀와 싸우면서 몰래 물건들의 힘을 봉인해놨다.
그래야 신의 토벌이라는 이름하에, 애꿎은 호위 기사들이 희생되거나 성녀도 자폭할 생각을 못 할 테니까.
실제로 그 뒤로 무의미한 혈투와 희생들은 사라졌다.
단지 성녀가 길치가 되거나, 남의 침실 담벼락을 넘어오는 일이 많아졌을 뿐이지.
그러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이라 그런 건지, 마족을 고기로 만드는 법만 배워서 그런 건지.
돈은 바보같이 많이 들고 다녀서 올 때마다 짭짤하게 소매치기를…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오래된 탓도 있겠지만, 사실은 기능을 떨어트린 거라는 거.
그리고 그렇게 만든 술자가 여기 있네?
그럼 다시 술법을 풀고 기능을 원래대로 되돌리면 그만이네?
자신을 죽이는 데 쓰는 게 아니라면, 그걸로 자신이 꿀 빨면 그만이네?!
“땨땨땨땨(성력 더 내놔, 이놈들아)!”
“으앙, 나 이제 졸려.”
“히, 힘이……!”
쿵! 쿵!
그래도 양심상 생명력까지는 뜯어내지 않았다.
아까 골렘을 처리하느라 소비한 성력을 채우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물론 빌어먹을 성력 따위, 굳이 채우고 싶지도 않지만.
‘성력을 굶주리게 하면 또 마력을 멋대로 성력으로 바꿔버릴 테니까.’
망할 몸뚱이.
무엇보다 3관을 위해서 힘을 최대한 모아두는 편이 좋았다.
‘2관이 마족이었으니, 분명 드래곤은 3관에 있는 거겠지.’
드래곤이면 자신을 아는 놈일 수도 있다.
골렘과 달리 마법을 쓰면 자신인 걸 눈치챌 수도 있으니, 최대한 성법으로만 승부를 봐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성법으로 가죽을 벗겨야 바가지 씌워서 비싸게 팔 수 있거든. 푸헤헤.
뭐, 힘을 뺏긴 본인들은 죽을 만큼 억울하겠지만, 오히려 머리 박고 감사해줬음 했다.
‘어차피 너희들로는 해골왕 육신의 마기를 못 견딜 거란다. 중독을 생각하면…….’
그런데 그때였다.
화르르륵!
“!”
금색의 불길과 함께 2관 안에 있던 살인멸구 인형이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쾅!
타들어가기보단 영멸에 가까웠다.
마치 조금의 불순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순금색의 순결한 빛.
그렇게 금(金)의 신앙을 상징하는 불길이 단숨에 불순물인 마족의 꼭두각시를 제거하고.
“겨우 찾았다.”
“키나 베리트!”
제일 꼴찌였던 키나 베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빛의 새에서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작이 2관 문을 연 것을 보고 다급하게 성령을 소환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모습에 슈리는 절망한 듯 키나 베리트를 보았다.
‘벌써 성령까지 소환할 수 있는 거야?’
아니, 슈리뿐이 아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급 마족의 침공에서나 사용하는 귀한 신성 정령이었다.
물론 비전투용 성령이고 아직 크기가 작긴 하지만, 이건 단순히 재능을 운운할 수준이 아니다.
압도적인 천재!
그러나 정작 키나 베리트는 아이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하니 놀랐다. 나 말고 여기 마족을 쓰러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키나 베리트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교황인 할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던가.
너보다 뛰어난 아이는 없을 거라고.
성자 후보는 모두 성자인 네 종이 될 것이라고. 모두가 네 발아래 꿇을 존재라고 하셨는데……!
드물게 떨리는 눈빛에 아이작은 코를 후볐다.
저거, 보나 마나 지 할아버지의 개소리를 떠올리고 있는 거구만.
교황 일가가 할 말이야 빤하지.
대충 성자 후보들은 본인의 종이 될 거라 했으려나?
‘하지만 종이 되는 건 너다.’
저 자식이 천 년에 한 번 태어날 수준의 천재면 뭘 하는데?
‘이 몸뚱이는 수만 년에 한 번 태어날 천재란다.’
마왕이 보는 눈이 있지, 괜히 이 몸에서 살아갈 생각을 한 줄 아냐?
[그냥 다이아수저라서 빌어 붙으신 거잖습니까.]
닥쳐라.
아무튼, 지금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이작에게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냈다.
“설마 1관 때처럼 네가 다른 애들을 함정에 빠트린 거냐? 만약 그런 거라면…….”
그때 쓰러진 아이들이 외쳤다.
“아냐! 저 아이는 우리 대신 시련을 통과해 주려다가 이리된 거야!”
“가야 할 방향도 알려줬다고.”
“우리한테는 은인이야!”
“…….”
슈리는 양심에 찔리다 못해 푹푹 피가 고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키나 베리트의 말에 그딴 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허! 젖먹이가 은인이라고?”
“!”
“너희는 성자 후보면서 창피하지도 않아? 교황청에서 수업을 받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하다 하다 저런 애한테 도움을 받을 수준이라니.”
슈리도 부정하진 않았다.
애초에 이 보물고는 누구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 구조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되레 키나 베리트를 혐오하듯 보았다.
“지금 제일 꼴찌가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야?”
“!”
“함정은 우리가 다 찾아내고. 저 애랑 우리 꽁무니나 쫓아온 놈이 뭔 자랑인데?”
“그러고도 무슨 성자 타령? 저 아이가 훨씬 더 성자에 가깝거든?”
“여기서 나가면 다 말씀드릴 거야. 넌 아무것도 안 했고, 에슈아가 제일 뛰어났다고.”
키나 베리트는 흠칫 놀랐다.
아무리 어려도 알았다. 이건 단순한 돌잡이가 아니란 걸.
가문 간의 싸움이기도 하다는 걸.
“아버지한테 말할까? 에슈아가를 따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성녀 가문을 후려치길래 어느 정돈가 했더니. 에슈아 사내아이들 보고 능력도 없다고 한 거 누구야?”
“……!”
키나 베리트가 울컥한 듯했다.
얼굴을 씰룩거리는 슈리는 양심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고, 아이작은 취한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캬! 그래, 이 더럽고 치사한 성직자 병아리들아!
이 다굴 좋아하는 성직자 새끼들! 이거지! 어서 더 해! 조져!
자고로 귀족이 있는 국가를 점령하려면 인망은 필수!
날 따른다는 놈들은 특별히 붕붕이로 삼아주마!
그때였다.
[2관을 통과한 걸 축하한다. 나는 이 보물고를 수호하는 최종 문지기.]
“!”
3관으로 가는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2관의 꼭두각시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3관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모양이었다.
물론 그냥은 안 보낼 모양이지만.
[택해라. 너희는 여기서 보물을 고르고 시험을 종료하겠느냐, 아니면 3관에 도전하겠느냐?]
“당연히… 3관.”
[아 참고로 이건 경고다. 내 시련을 통과하면 바로 3관의 보물을 얻게 되겠지만, 만약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다.]
“……!!”
아이들은 술렁거렸지만 아이작은 다른 의미로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에서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군요. 주인님.]
본인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확실하다.
‘드래곤.’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 아이들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 나는 3관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2관은 무슨!”
2관에 있는 보물들도 충분히 국보급의 보물이었으나, 3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니까.
거기엔 신화급 보물과 무엇보다 해골왕의 육신이 있다.
“3관의 물건만 가져가면 가문의 위상이 바뀐다!”
“맞아!”
[그래, 죽어도 좋으니 전원 시련을 보겠단 거지.]
그 으름장에 아이들은 더욱 굳었다.
얼어붙은 아이들의 공포와 함께 천장에서 석상이 떨어졌다.
쿵!
“뭐, 뭐야. 또 석상이야?”
하지만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석상이었다.
“저 생김새! 주신님의 석상이야!”
[맞다. 마지막 시련은 단순하다. 신께 숭배드려라.]
숭배?
[각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려 너희의 경의를 신께 보여라. 석상을 향해 신앙심을 증명한 자들만 3관에 갈 수 있다.]
아이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실패하면 죽는다고 해서 쫄았는데, 고작 이런 게 시련이라니!
목소리는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너희의 각오를 시험해본 것뿐이다. 이곳까지 온 너희의 용기를 포상하지. 어린아이라도 경의만 보이면 끝나게 해주마.]
모두가 환호했지만, 유일하게 한 명만큼은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지금 어느 새끼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아이작의 눈은 흉흉했다.
주신한테?
장난하냐?!
원수 같은 놈들이었고, 최후엔 사기를 친 놈들이었다.
아무리 석상이라도 꿇을 수 있을 것 같냐?!
아니 안 해!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아이들 모두 약식이 아닌 정식 인사법으로 신을 향한 공경을 표현했다.
목소리가 흡족해했다.
[잘 배웠군. 좋다. 보내주마.]
그 목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발치에 빛의 문양이 떠올랐다.
테스트에 통과한 자들에게 새겨지는 문양 같았다.
[너희는 포기하고 죽음을 택할 것이냐?]
화들짝 놀란 아이들이 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남아 있는 모두가 통과 표식을 받고, 이제 어쩌면 아이작밖에 안 남은 것 같은 상황.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아이작은 멀뚱하게 앉아 있다.
아이작을 내려주었던 슈리는 눈치를 보았다.
아직 어려서 말을 못 알아들…을 리는 없고. 오히려 멀뚱을 떠나서 석상의 모가지를 딸 듯이 노려보는 게 심상치 않다.
슈리는 불안한 듯 땀을 흘렸다.
저거, 손에 폭탄구 만들고 있는 거 같은데, 착각이지?
‘분명 이 일은 기록되어 바깥에 알려질 텐데.’
저대로면 아마 신앙심이 없는 걸로 평가받아 자질 자체를 의심받을 것이다.
키나 베리트는 지금까지 저 아이를 신경 쓴 게 허무해졌다.
재능이 있어 봤자, 신앙심이 없으면 꽝이지.
‘보나 마나 성자 후보에서 박탈되겠군.’
결국 슈리와 키나도 무릎을 꿇었으나, 아이작은 여전히 요지부동.
통과 표시를 받은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왜 안 하지?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아니 지금까지 다 알아들었잖아. 신앙심에 문제 있는 걸지도…….”
“…그, 혹시 에슈아가 최근 신앙심을 잃어간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그래서 해골왕을 못 잡은 거라던데…….”
아이들의 눈빛이 묘해졌다.
슈리는 에슈아가 뭇매를 맞겠다 싶어 엎드리게 해주려 했지만, 도리어 아이작에게 처맞았다.
그 광경에 목소리는 굉장히 불쾌해했다.
신앙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젖먹이. 왜 넌 무릎을 꿇지 않지?]
“뜌야야야(시발, 너부터 꿇어)!”
[쯧, 성자 주제에 불경하구나. 성녀 가문의 아이면서 분수도 모르는 것인가?]
어쩌라고, 씹새야.
“땨땨땨땨(너도 저 석상처럼 멱을 따줄까)?”
그 말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 아이작의 머리통을 짓눌렀다.
쿵!
강제로 아이작의 무릎을, 머리를 꿇리려는 것이다.
힘을 고스란히 받는 아이작은 핏대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뚝.
[주인님?]
뚜둑.
[주인님! 잠깐, 만요!]
아, 한계다.
인내심 끊기는 소리 들린다.
몰라, 보물고고 자시고, 저 새끼도 박살 내고 육신만 찾아오면 되지.
알았냐. 앞으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축복 걸어준 숙부 놈 짓인 거다. 아무튼 그런 거야!
곧 아이작이 석상을 박살 내려는 그 순간,
[훌륭하군! 진정한 성자의 자세야! 넌 3관으로 가라! 너는 합격이다!]
시발, 그래! 합격이지.
좋다. 어디 저 도마뱀 새끼, 뒤지게 죽여볼…….
“…….”
……………….
…뭐,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