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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41화 (41/272)

제41화. 이건 또 의외군 (1)

에슈아 본관 일대.

청의 신앙 총본산엔 어쩐 일로 사람들이 많았다.

“진짜로 오셨어?”

“와, 나 실물은 처음 봤어.”

“정말 아이작 도련님한테 성령을 주신대?”

“그래! 지금 난리 났다니까!”

가주의 귀환 소식에 몰려온 에슈아의 제자들이었다.

쉽게 말해 험난한 등용을 거쳐 에슈아의 직속이 된 엘리트들이라 할 수 있었다.

<치어>라 불리는 3품 생도부터 에슈아의 <범고래>라 불리는 주력 1품들까지.

그들은 추후 청에서 임무를 맡는 에슈아의 검이 되거나, 다른 나라나 구역으로 파견 나가 청을 기르는 주교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에슈아를 우상으로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가주의 귀환?

후계 싸움?

하물며 그 상대가 가문에서 거들떠도 안 봤던 젖먹이야?

한마디로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바뀔 수도 있는 중대한 사항… 아니, 이렇게 꿀잼인 상황에서 지금 훈련 따위가 손에 잡히겠는가!

생도들은 당연하고, 1품 기사들까지 아닌 척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고엘 님, 완전 죽 썼다며? 속이 말이 아니시겠는데.”

안 그래도 저택 안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사들은 킥킥 웃었다.

“애초에 고엘 님이 너무하시긴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에슈아의 순혈 핏줄을 내쫓을 생각을 하다니.”

“별관은 또 어떻고? 하필 해골왕이 나타났던 거기에 보내려 하셨다잖아?”

“둘째 마님 쪽 자식들도 참 지독하다. 아무리 배다른 형제여도 조카 아니냐? 돌잡이도 실은 아이작 님을 죽이려고 제안한 거잖아?”

2품 기사들이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이자 1품 기사들이 눈치를 주었다.

“그쯤 해라. 고엘 님도 절반은 그 귀한 교황가의 핏줄이신데 얼마나 열 받으시겠냐. 에슈아에서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교황가에서 한자리 받아먹었을 텐데.”

“에이, 그래도 교황가보단 에슈아가 천만 배 낫지!”

“글쎄? 서열로는 장남과 윗서열에 밀려, 실력으로는 천재 막내 릴라이 님에게 밀려. 그나마 가문 운영을 잘하니까 봐주시는 거지.”

“맞아. 그래서 슈리 도련님을 가주로 만들어서 섭정을 맡으려고 하시는 거잖냐. 뭐, 난 다 이해한다.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마당에 난데없이 혈통에 실력까지 겸비한 아이작 도련님이 나타나셨으니 얼마나 똥줄이 타겠… 떠헉.”

말하던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담벼락과 이어진 문에서 고엘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긍지 높은 에슈아의 기사들에게 뒷담이나 즐기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그, 아니, 그… 사형들! 아, 도망가셨어!”

1품 기사들은 언제 함께 있었냐는 듯 슝 사라져 있었다. 괜히 상급 기사들이 아닌지 흔적도 안 보였다.

결국 고엘에게 걷어차인 2품 기사들은 머리를 박았고, 고엘은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빌어먹을 장남의 아들……!!’

이젠 하다 하다 아이작 때문에 평민이나 다름없는 놈들의 입방아에까지 올라야 해?

하지만 괜찮았다.

고엘은 교황과 닮은 사나운 눈으로 저택 안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가주에게 대차게 깨진 고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장로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가주를 보았다.

장로들 대다수는 원로들과 달리, 교황가인 후처 쪽 핏줄들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가주는 그런 이들에게 한마디 했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성령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냥 준다고는 안 했다.

-예?

-애초에 성령을 주겠다고 한 이유는 따로 있고.

이유가 있다고?

장남의 아이라 예뻐서가 아니고?

-해골왕의 육신을 빼내기 위해 불이나 물에 넣으면 저 아이에게 하자가 생긴다.

-하, 하자요?!

-청의 신전의 불과 물은 너무 강력해서, 다가오는 마를 모조리 배척해 버린다. 구마성법을 써야 하는 상급 성직자에게는 하자가 생기지. 무슨 말인지는 릴라이, 네가 더 잘 알 거다.

-상급 성직자의 필수 조건인 구마(九魔)를 익히기가 어렵겠군요.

-그래. 구마를 익힌 이후에 넣는 게 맞지. 원래는 저 아이가 5계위 이상 갈 일이 없을 것 같았기에 제안했던 거지만.

-그, 그러면… 아이작은 재능이 있어도 평생 4계위 수준에서 만족해야 한다는.

-그러니 셋 중 하나를 고르게 할 것이다. 불, 물, 성령. 만일 성령을 고르면 성령이 해골왕의 마기를 정화해줄 것이고, 불이나 물을 고르면 그게 지 팔자인 거지.

그럼 그렇지! 역시 아버님!

아무리 자식들에게 정이 없으신 분이라지만 가주로서는 역시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 분이다!

4계위면 나쁜 건 아니다만 5대 가문 사람이면 사실상 사람 취급받을 수도 없지!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던 고엘은 크흐흐흐 웃었다.

‘어린놈이 성령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냐?’

성령의 기운은 아이가 느끼기에 굉장히 미약하다. 그 기운을 감지하는 것부터 오랜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청의 신전에 모두 모인 지금.

“뽑아라.”

가주는 아이작의 앞에 3개의 공을 올려놓았다.

아이작은 좀 떨어진 곳에서 난리를 치는 이들을 보았다.

“아이작! 숙부 말 알아듣지? 하얀 거다! 그걸 고르면 숙부가 해골왕 스트레스 인형을 사주마!”

“아이작, 이 새끼 말 무시해라. 네가 청의 신앙 사람이면 마땅히 파란색을 골라야 하는 거다. 그걸 고르면 위대한 주신님의 인형을 사주지.”

저 시벌 놈들. 그냥 둘 다 죽일까?

그런 숙부들을 한심하게 보던 아이작은 가주가 바닥에 놓은 공을 보았다.

불(火)기를 머금은 빨간 공.

물(水)기를 머금은 파란 공.

성령의 기운을 머금은 하얀 공.

“골라라.”

아무래도 이 중에서 고르라는 의미 같았다.

아이작은 물끄러미 가주를 보았다.

마흔쯤 될까. 에슈아를 상징하는 은발에 농담을 질색할 것 같은 차가운 파란 눈.

마치 고고한 늑대 같은 사내였다.

그리고 누가 에슈아 핏줄 아니랄까 봐, 멜리사는 절세미녀였다면 이놈은 소싯적 여자들을 엄청 후리고 다녔을 것 같은 미남.

그래, 시가나 물려주면 딱이겠군.

얼핏 신사적인 외견에 단정한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지만, 아이작에겐 똑똑히 보였다.

성법만 쓰는 사제로 보이나 저 제복 안에 얼마나 단련된 근육질의 몸이 있는지.

‘맞붙으면 처맞… 아니, 지금은 일단 뒤지겠군.’

괜히 과거 마왕들을 줄줄이 토벌하고 다니던 추기경이 아니었다.

힘을 숨기고 있지만, 거대한 파도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느낌.

확실히 젖먹이가 된 이후, 지금까지 본 성직자 중에서 가장 강하다. 아니 해골왕 시절까지 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세다.

릴라이 따위는 그냥 딸랑이를 든 어린애로 보였다.

뭐, 그래도 역시 이 몸이 더 강하지만.

아무튼 이놈이 굳이 ‘하자’ 이야기를 한 것도 그렇고. 딱 보니 자신에게 보는 눈이 있는지 테스트를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어린놈의 자식이 마왕을 우습게 보네.’

아이작은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두 숙부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탁!

곧 아이작이 공을 고르자, 가주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나만 골라.”

“…….”

칫. 새끼 안 통하네.

손자…라기엔 원수겠지만, 아무튼 할아버지의 말에 아이작은 끌어안았던 3개의 공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었다.

마침내 아이작이 공 하나를 뾱 들어서 내민 순간.

희비가 갈렸다.

“아……!”

“아!”

아이작이 뽑은 건 다름 아닌 빨간색의 불의 공.

얼어붙은 릴라이는 좌절했다.

“저만한 아이가 4계위 수준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그러나 고엘 세력의 장로는 그런 릴라이가 몹시 탐탁지 않은 듯 크게 나무랐다.

“어허. 이게 절망할 문제라고 보느냐? 에슈아의 사내아이는 4계위만 가도 가문을 빛낼 수준이다!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조카의 목숨과 저울질할 생각을 해?”

응, 젖먹이 목숨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성자가 안 되게 하려는 꼴, 잘 보고 있고요.

그리고 고엘, 넌 입꼬리 씰룩거리는 다 보이니까 표정 관리 좀 하시지?

가주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 쉬었다.

“좋다, 그게 네 팔자인가 보구나.”

릴라이는 절망했고, 고엘은 히죽 웃었으나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나무랐다.

‘아버지도 참 사람이 나쁘시긴.’

아직 성법 훈련도 안 한 꼬맹이였다.

설마 성녀처럼 봉인된 공의 성력까지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기대를 거는 건 좋지만, 최소한 현실성이 있어야지.

가주는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게 좋다면 할 수 없지.”

그 말과 함께 아이작이 뽑은 붉은색 공이 쩌억 갈라지면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 항마의 불길이 치솟는 순간, 고엘이 웃음을…….

“어?”

어어?

그들은 불길 속에서 나온 정령의 모습에 제 눈을 의심했다.

“성령?!”

“뭐야, 왜 성령이!”

강력한 성화의 불길을 뿜어내는 작은 요정의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저건 성령이었다.

고엘은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듯 가주를 보았다.

“아버지!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저 공에서 성령이!”

그러나 팔짱을 낀 가주는 되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령이 하나만 들어 있단 소린 안 했는데?”

뭐가 어째?!

가주의 뻔뻔한 행동에 릴라이와 고엘은 서로 다른 의미로 믿기 힘들어했다.

원리원칙을 절대적으로 고수하시는 분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하지만 가주는 진지했다.

물론 본래라면 모든 공에 성령을 넣는 짓 따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모에게 죄책감을 가지게 하는 사내아이 따위가 가문에 필요할 것 같은가.

하지만 스스로 성화(聖火)를 쓰는 아이라고?

‘물’을 근간으로 하는 에슈아에서?

가주가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에슈아는 본래 ‘물’의 신앙.

하지만 그런 에슈아에서조차 극상극인 ‘불’은 특별했으니까.

‘<불>은 에슈아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중요한 비전.’

에슈아를 밝히는 등불이었다.

그래서 가주는 그걸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저 젖먹이가 어디까지인지.

해골왕의 육신을 가지고 나온 건 정말 다른 사람의 도움이었는지.

교황가의 금을 녹인 건 우연인지, 아니면 운명인지.

그랬기에 그는 하얀 공에만 일부러 봉인을 조금 풀어두었다.

함정이었다.

보통이라면 그 힘에 이끌리겠지만, 가장 좋은 건 <불>.

하얀 공은 꽝이었다.

만일 하얀 공을 골랐다면 더 이상 두고 볼 가치도 없었겠지.

그리고 아이는 마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을 골랐다.

‘하지만 이건 또 의외군.’

불의 성령을 불러낸 건 좋은데, 하필 불러내도 저놈을 불러낼 줄이야.

[일라이! 감히 왕인 날 인계에 불러내? 네가 정녕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필 교황도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우두머리급을 불러내다니.

인간 중에 저놈과 계약한 놈이 있긴 했던가?

그 증거로 놈은 계약은커녕, 청의 저택을 모조리 없애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가주는 상당히 기쁜 듯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거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젖먹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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