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이건 또 의외군 (2)
사나운 불길에 장로들도 드물게 놀랐다.
아니 놀란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마치 인류의 멸망이라도 직관하듯 놀란 눈으로 성령을 보았다.
세상에, 저걸 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일이 생길 줄이야!
“저 성령 소환진! 저건 성령의 왕이 아닙니까!”
틀림없었다.
인간을 똑 닮은 생김새며, 힘의 크기며.
과거 마족과의 대전쟁 때 딱 한 번 나타난 적 있다는 최고 성령의 특징과 똑같다.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라도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귀한 존재였다.
문제는 저놈이 인간에게 우호적이 아니란 거지.
그 증거로 불려 나오자마자 저렇게 성질내는 것 좀 봐라!
화르르륵!
“허헉!”
성령의 화염에 곳곳의 기둥에 금이 생기며 갈라졌다.
장로들이 기겁해서 가주를 볼 만했다.
“가주! 아무리 그래도 왕급을 불러내시다니요! 농이 지나치십니다! 에슈아 공작령을 불태워 없애실 생각입니까!”
“억울하네. 내가 안 불렀는데.”
“예?!”
“불러낸 건 저 자식인데.”
뭐?
저 자식이라니, 설마 아이작을 말하는 건가?
“그게 무슨… 잠… 피하십시오! 으악!”
콰르르륵!
무시무시한 불꽃이 천장까지 치솟아 올랐다.
위스퍼는 그 맹렬한 불꽃에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 성령도 재능이 있어야 상급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왕급의 멱살을 끌고 오시다니, 역시 주인님! 대단하십니다!]
위스퍼는 기뻐했지만, 정작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는 기색이었다.
아니. 미친.
왜 왕급이 나오는데!
물론 아이작은 알고 있었다.
어떤 공을 고르든 성령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야 가주 놈이 모든 공에 ‘성령 소환진’을 그려 놓았으니까.
‘보물고의 일이 슈리의 짓인지 아닌지, 날 시험해본 거지.’
소환진은 3개였지만, 그중 2개는 그래봐야 ‘일회성’ 계약 소환진.
한번 불러내면 사라지는 용병이었다.
‘심지어 그리 좋은 놈도 아니다.’
그러니 정답은 불이었다.
셋 중 유일한 ‘종속’ 소환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 소환진으로 불러낸 성령만이 소유가 가능했다.
한마디로 안목 테스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대마법사들조차 가르침을 얻으려고 했던 마왕이 그깟 것도 못 느낄 것 같은가?
‘소환진도 술법의 영역이거늘. 애송이 놈이.’
아무튼 <초월계위>를 위해 신들도 대가를 주며 꼭 데리고 다니는 성령이었다.
상급일수록 무조건 좋지만 아직 젖먹이가 아닌가.
‘일단 중급이나 하급이어도 충분해.’
그래서 적당히 겸손해지기로 한 아이작은 소환진에 성력을 추가로 부어줬다.
그러면 못해도 중급은 확실하게 떠주겠지…는 뭐, 인마?
왕급?!
아이작은 도리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씨! 이 정도로 왕급이 뜨면, 온 힘을 다하면 도대체 뭐가 소환되는 건데!’
교황처럼 신이라도 소환할 거냐, 이 미친 성자 몸뚱이 새끼야?!
물론 진짜로 소환되기라도 하면 쌍욕 나오니까 엄한 생각 말자.
반면 장로들은 눈빛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지금껏 계약 소환진으로 왕급이 나온 전례가 있긴 합니까?”
“크흠, 글쎄… 백의 신앙의 아이와 교황가 아이도 건국제 때 불러냈던 것 같긴 한데…….”
“허어! 잠깐 이벤트로 분신체를 불러냈던 그거하고 같습니까? 저건 무려 종속 계약 소환진으로 불러낸 본체! 하급신을 가문에 둘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저 아이가 불러냈고?”
“보물고에서의 활약은 정말 슈리가 한 일이 아니었단 건가?”
“……!”
장로 놈들아, 그만 쳐다봐라. 눈알 빠지겠다.
아무튼 그래.
신성 진영 놈들이 기겁을 할 정도로 좋은 놈인 건 잘 알겠다.
하지만 저만한 놈이랑 어떻게 계약하지?
[간단합니다.]
뭔데?
[두들겨 팹니다.]
알기 쉬워 좋구나.
[어느 진영이든 따까리 만드는 방법이 뭐 그리 다르겠습니까? 신들이라면 자세한 방법을 알지도 모르나, 물으러 갔다간 성불당할 테니까요.]
그건 그러네.
뭐 두들겨 패기에는 이쪽이 쥐어 터질 것 같다만.
“커헉!”
“장로님!”
아니나 다를까, 성령은 장로의 멱살을 잡아 날렸다.
[예의도 모르는 놈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내 앞에서 성법을 쓰려 해?]
“장로님, 괜찮으십니까!”
“크윽, 일단 붕괴를 막을 겸 신전에 결계부터 치려 했더니……!”
[네놈이 뭔데 내가 파괴하려는 걸 막아? 뒤지고 싶어?]
허이고. 저게 성령이야, 마족이야?
가주는 어째서인지 아이작을 빤히 보고만 있었지만, 아무래도 소환된 성령의 성격은 별로 좋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깟 성격이 대수랴?
[주인님! 이 불은 설마!]
그렇다.
‘이건 《항마(抗魔)》의 불!’
마족을 퇴마하는 불이다.
순수한 마력인 위스퍼가 먼저 반응할 만했다.
그러나 불길을 보는 아이작은 쌍수 들고 웃고 있었다.
왜?
‘저건 귀한 놈이다.’
신계에서 하도 많이 봐서 알았다.
뭐, 신들이 대접을 해주라는 꼴이 같잖아서 놈들의 먹이에 새똥(?)을 타기도 했지만.
아무튼 성령 중에서도 희귀한 놈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마족이라면 기절초풍을 하고 도망갈 불이겠지만, 글쎄?
[지금의 주인님이라면 오히려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그래!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바로 그거야!
신성 진영이 ‘항마’ 속성의 성령에 환장하는 이유는 마력을 성력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월계위에 다다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밑 작업이 뭔데!
바로 ‘순수성’이다!
성력이든 마력이든, 불순물이 없을수록 강해지기 때문에 불순물 제거가 필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 더러운 마력들이 있었다.
그게 묘하게 많아서 아까웠는데, 저놈이 있으면?
‘쓸모없는 마력은 성력으로 전환하면 그만 아닌가?’
이거 완벽한 리사이클 아닌가?
어차피 마력이 창이라면, 성력은 방패!
신들을 이겨 먹으려면 성력도 강해야 했으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저놈은 불이라 아예 불순물만 태울 수 있어요! 쓰기에 따라선 평소라면 버려야 했던 마력도 더 드실 수 있다고요!]
그래! 잘 안 뽑히는 유니크 속성에, 심지어 왕급!
한마디로 지금 여기서 저놈을 안 붙잡으면 바보란 것이다!
저만한 등급이 또 <종속 계약 소환진>으로 나올 리 없으니까!
그래, 그렇지!
내가 신들하고 웬수 사이만 아니었어도 진작 따까리로 삼았지, 시발!
‘저놈은 계약할 수 없다.’
아이작은 아까워 죽겠다는 듯 끄악 머리를 움켜쥐었다.
사실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왕급 성령은 전부 신계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성령은 신성 진영의 대표 세력!
하급일수록 인간과 가깝지만, 상급일수록 신계와 가깝다.
그리고 내 따까리란 녀석이 원수와 시시덕거린다?
열 받겠지?
심지어 그 따까리란 녀석이 해맑게 지 친구를 소개해 준답시고 신들을 우르르 끌고 온다?
빡치겠지?!
무엇보다 아이작은 본인이 좋을 때까지는 신들과 엮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능력이 아깝다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놈이 신계와 가까운 이상, 너무나 아깝지만 지금은 아래 급으로 교체해달라 하는 게…….
“아이고, 가주! 빨리 저걸 돌려보내십시오! 이제 보니 저거, 신들께서도 손절 친 그놈 아닙니까!”
장로의 말에 아이작의 고개가 무섭게 끼긱 돌아갔다.
뭐? 손절?
지금 쟤들이 손절이라 했냐?
“손절이라니, 설마 왕급이면서 신들을 싫어하는 그 돌연변이를 말하시는 겁니까?”
맞네.
지금 저 새끼, 신들한테 절교당한 불쌍한 아싸 놈이라고 한 거지? 그치?
반면 장로들은 뒷목을 잡았다.
“하필 그 많은 왕급 성령 중에서도 저 무례한 놈이 나옵니까!”
“글쎄. 머리 색으로 까이면 나라도 신들하고 손절하겠다.”
“가주님!”
장로들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능력만 보면 최강이지.’
항마 속성은 5대 신앙이 모두 소환해 내려고 애쓰는 놈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히려 저만한 것을 소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에슈아의 위상은 더욱 올라갈 것이다.
신들께서도 저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만큼, 종자들이 길들였단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실 것이고 말이다.
그래, 다룰 수만 있다면!
“저건 신을 미워하는 양아ㅊ… 불손한 놈입니다. 신들께서도 오죽하면 저걸 버리고 항마 속성도 아닌 동생 놈을 우두머리로 앉혔겠습니…….”
[닥쳐라! 하찮은 인간 놈들이!]
“컥!”
장로들을 기합만으로 날려버린 성령은 가주를 험악하게 내려다보았다.
대답의 여하에 따라 에슈아의 땅을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폐허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눈빛.
[청의 우두머리이자 인도자인 일라이 에슈아는 답하라. 무슨 생각으로 감히 날 <종속> 소환진 따위로 불러냈느냐.]
대가를 바치고 의뢰를 하는 일회성 소환진이 아닌, 종속 소환진으로 불렀다?
이건 인간의 부하로 만들겠다는 명백한 의도.
당연히 뒤지고 싶냐는 눈빛이었지만, 가주는 뻔뻔했다.
“내가 안 불렀는데.”
[뭔 소리야! 성령 계약 관리자, 가주의 권한으로 억지로 불러낸 거잖아! 명부의 힘을 써서!]
“아니라니까?”
[거짓말 마라! 너 아니면 누가 이 몸을 소환할 수 있다고……!]
“쟤가 소환했는데.”
[쟤?]
가주가 누군가를 가리키자, 성난 성령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감히 어떤 버러지 놈이…….]
“따야(너 손절당했지)?”
어떤 놈이…….
“따야야(팽 당한 거 맞지)?”
잠시 침묵한 성령이 가주를 보았다.
[…저기. 누가 날 소환했다고?]
“걔.”
[…누구?]
“따야(이 봉 새끼. 너어는 딱 걸렸다)!”
“걔라고.”
[……!]
성령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이런 똥오줌도 못 가릴 똥쟁이 어린애가?
말도 안 된다.
제아무리 에슈아가 성녀라는 초인을 배출하는 가문이라고 해도 그렇지!
[일라이! 네놈들은 성녀를 만들라고 했더니, 사내아이한테 지금 뭔 실험을 하고 있는 거냐!]
“안 했어.”
[안 하긴 뭘 안 해! 봐라, 표정까지 맛탱이가 갔잖아!]
눈이 돌아간 젖먹이는 스읍 침을 닦았다.
‘뭐? 능력은 좋은데, 빌어먹을 신들하고는 원수라고?’
이 무슨 생선이 살에 뼈까지 발라져서 뜨끈한 밥에 올려져 있는 소리를 하고 앉았지?
위스퍼도 히죽거렸다.
[특등식 밥이네요. 저만한 거는 놓아주는 게 바보죠.]
그래, 바로 그거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령은 헛웃음을 흘렸다.
[보나 마나 일라이 네놈이 손자의 선물을 준답시고 헛짓거리 한 거겠지. 계약 명부에 저 꼬마의 이름을 써주고, 소환까지 대신 해준 거야.]
“거, 사람 말을 안 믿네.”
[닥쳐라, 직접 확인하겠다. 저게 정말 날 불러낸 소환자라면 <종속 계약 소환진>의 법칙에 따라 내 공격에도 견디겠지.]
릴라이는 화들짝 놀랐다.
“기다려 주십시오! 견딜 수 있다 해도 영향이 없는 건 아닙니다! 아이한테 너무 무모한… 큭!”
릴라이가 아이작을 데리러 가려 했지만, 그 전에 화마가 아이작을 덮쳤다.
“아이작!”
화르륵!
거친 불길에 아이작이 죽길 바라는 고엘조차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불길에 휩싸인 아이작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과거 왕급 성령의 목을 딴 적이 있었다.
친한 인간 하나가 죽는 일이 있었는데, 그 일에 원인을 제공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급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저놈?
‘센데?’
느껴보면 알았다.
아마 수많은 성령들 사이에서도 꽤 이름을 날리는 놈인 게 틀림없다.
그리고 조금 뜨겁긴 하다만 지금 이깟 게 대수냐?
‘이 새끼, 그냥 필터기가 아니라 고급 노예 당첨이다.’
성령은 그런 아이작의 눈을 보고는 기가 찼다.
[니들은 하다 하다 성녀를 키울 때 쓰는 약까지 먹였냐!]
“뭐?”
[쟤 눈깔을 봐라! 정상이 아니잖아! 저 새끼 아픈데 처웃잖아!]
저 정도면 성녀 전용 강화 약을 먹고 부작용이 온 수준이 아닌가!
[아무리 에슈아가 저주를 받아 여아가 절멸했다고는 하나, 사내아이한테 무슨!]
“안 먹였다니까. 그리고 절멸 안 했어.”
[그럼 진짜로 저게 날 불러낸 거란 말이냐?]
“그렇다고 했잖아.”
[……!]
가주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분명 지난 천 년간, 항마의 성령을 소환해낸 가문은 없었지.’
마지막으로 불러낸 게 신성 진영의 최고 전성기였을 때니 말이다.
그리고 가뜩이나 불의 속성인 듯한 아이작이 저것과 계약을 한다면 어떤 괴물이 될지.
솔직히 기대가 안 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니 저걸 돌려보낼 것 같으냐.
가주가 무미건조한 눈을 반짝였다.
“이걸로 저 젖먹이가 네 소환자라는 건 납득했을 것이고. 네 선택은 두 가지다. 소환된 성령은 특별한 기각 사유가 없는 한, 에슈아 직계와 계약을 해야 하지. 저 젖먹이와 계약을 하든가, 아니면 피의 계약을 어기고 형벌을 받든가.”
가주의 말에 성령은 어처구니없어했다.
확실히 성령들은 5대 가문과 피의 계약이 되어 있다.
신성 진영을 이끌어가는 자들로서 일종의 협약이었다.
그러나 성령은 비웃었다.
[그래. 확실히 그런 조약이 있었지. 하지만 그 조약의 계약 대상은 상급까지지. 왕급은 해당 사항이…….]
“왜? 계약서 어디에도 왕급은 안 된다는 조항은 없는데?”
이 양아치가?
성령은 가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난 무시하면 그만이야. 형벌? 왕급이 그딴 걸 두려워할 줄 아나? 인계에 불려나온 김에 잘됐네. 이 에슈아 땅을 멸망시키고 난 자유를 즐기겠다.]
“자유라.”
[어이쿠, 설마 날 공격할 건 아니지? 조약에 따라 날 공격할 순 없잖아. 성령인 난 조약을 무시해도 되지만, 피조물인 너희들은 신이 만든 룰을 잘 지키고 살아야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둔한 놈들아.]
아이작은 코를 후볐다.
거, 나보다 어린 놈이 왜 자꾸 나이 타령이지.
‘확실히 굉장히 센 놈인건 맞다만.’
[그럼 잘 있어라, 멍청한 고래 놈들.]
가주가 말했다.
“뭐, 갈 수 있으면 가보든가.”
[그게 무슨… 떠헉!]
돌연 성령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비명을 지른 건 성령뿐이 아니었다.
“아이작!”
아이작이 도망치려는 성령을 붙잡아 입에 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