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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45화 (45/272)

제45화.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 (2)

청의 본부.

에슈아 성 근처에는 수도원과 청의 훈련장이 있다.

그곳은 어린 3품부터 1품 기사들까지, 사형‧사제 관계인 자들끼리 숙식과 수련을 병행하는 장소였다.

뭐, 평소엔 장로들이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지금은 모처럼 가주가 성에 계신 때였다.

물론 계시는 이유가 아이작이 사고 칠까 봐…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하물며 그 아이작 도련님이 펑펑 터트린 성의 보수비 청구서를 보며 한껏 한숨이 느시긴 했지만… 어쨌든 가주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임엔 틀림없었다.

그만큼 모처럼 가주께서 평온하게 가르침을…….

쾅!

…은 개뿔이.

훈련장이 박살 나는 소리에 기사들은 모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가주와 교황청에서 나온 사절단이 있었다.

“각하! 왜 이러시는 겁니까!”

“돌아가.”

“예?!”

“아이작은 수도에 보내지 않는다.”

그랬다. 이번에 온 사절단은 아이작을 수도에 직접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각하! 올해는 다르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아이작 님께서 지난 10년간은 소환을 거절하셨지만, 올해 건국제만큼은 오셔야 합니다!”

건국제.

초대 황제와 초대 교황의 위명이 높은 만큼, 제국에서도 신경 쓰는 유서 깊은 행사다.

무엇보다 건국제에서는 사제들과 기사들의 서품식, 서임식이 거행된다.

하지만 매년 있는 축제라 유난 떨 것도 없건만. 왜 유독 올해만 중요하다며 지랄을 하느냐고?

“올해는 드디어 성자 후보들께서 사제품을 받는 해입니다!”

그래, 저게 문제다.

‘뭐, 한마디로 성자 후보들이 아카데미 졸업 나이가 되었단 거지.’

그게 어쨌냐고?

신성제국으로서는 드디어 기다린 10년이라는 것이다!

괜히 성자 후보가 아니라고, 역대 최고의 천재들이 모인 세대였다!

그런 아이들이 사제로서 활동을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간 10년 동안 그 아이들이 이룬 업적은 보통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직 아이작 공자만 10년간 소식이! 아니 얼굴조차 비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10년 전, 보물고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신 분인데요!”

아니, 새끼들아.

그거야 어릴 때 이야기지. 어릴 때 좀 똑똑하고 천재 같은 아이가 한둘인 줄 아나?

가주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은 다른 모양이다.

“다들 소문이 자자합니다!”

“예. 청의 가주께서 성녀들을 기르는 동쪽 성에 두고 키우실 정도면! 아이작 님은 10년간 도대체 얼마나 훌륭하게 자라셨을까요?”

시발, 안 자랐다고.

1센티미터도 안 자랐다고!

괜히 수도에 안 보내는 줄 알아?

“어디 그뿐입니까? 저희가 오는 길에 목격했습니다! 역사가 깊은 에슈아 성까지 박살 내게 하는 청의 교육 방식에는! 감탄, 또 감탄했습니다!”

뭐? 뭔 교육? 그게 교육으로 보였나?

가주의 얼굴을 본 청의 기사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뿐이 아닙니다! 손자분에게 매주 200킬로그램이 넘는 초콜릿과 100킬로그램의 당과가 배달되고 있다죠?”

…어떤 미친새끼가 과자를 그렇게 처먹이는데?

“듣자 하니 가주께서 주시고 계시다고!”

…뭐, 인마?

“손자분이 얼마나 훌륭히 성장하고 계시면 미성년 성직자들에겐 금기시되는 당과를 그리 보내시는 걸까…! 역시 청은 다릅니다!”

이거, 애한테 뭘 처먹이고 있는 거냐고 까는 거지?

가주의 얼굴을 보는 기사들은 더더욱 땀을 흘렸다. 창백해진 얼굴엔 핏기도 없다. 장로들은 이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사절단들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희 같은 교육자들 입장에선 아이를 안 보내주시니 서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하.”

“아니 물론! 절대 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5대 가문 정도면 본래 10살부터 입학할 필요가 없죠! 슈리 공자를 10살 때 보내주신 것만으로도 저희에겐 충분한 영광입니다!”

“그래도 아이작 님 정도의 인재시라면 다른 성자 후보들과 같은 때에 사제가 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좋다고 봅… 헉.”

가주는 우득 목을 꺾었다.

‘뭐, 그래. 다들 기대할 만하지.’

자신도 그랬고.

해골왕의 마력 때문에 그딴… 사고뭉치로 자라기 전까지는 그랬지.

‘뭐, 그 젖먹이 모습으로 성법을 익혔다면. 지금쯤 오히려 교황가 손자를 뛰어넘는 괴물이 되었겠지만.’

릴라이 말로는 아이작이 해골왕의 마력 때문에 성법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된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하여간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해골왕이다.

‘정녕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가주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사제품은 됐다. 때가 되면 알아서 교황청을 찾아가겠다.”

“아니! 들어 주십시오! 올해 서품식은 황녀님의 생신과도 겹쳐서 특별히 교황 성하께서 진행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교황이?”

가주의 표정이 놀란 듯 바뀌었다.

설마.

“예! 맞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사제품을 받는 이들에게 영웅의 작호를 내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작호는 별호 같은 것으로, 힘의 영역을 수배 이상 키워준다. 받으면 무조건 이득이다.

“하지만 손자는 사제품을 받을 나이가 아닌데.”

“각하. 저희가 왜 왔겠습니까! 실력이 있으면 나이가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아이작 공자면 대륙 최연소 사제도 가능할 겁니다!”

“예! 안 그래도 마도제국에서 14살의 최연소 상급 마법사가 나왔다고 저희를 우습게 보… 기세가 등등해지지 않았습니까!”

가주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정규 시험이 아닌 다른 루트를 써보겠다는 거군.

뭐, 주어진 기회를 막을 것까진 없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어차피 소용없겠지만.”

“오오, 영광입니다!”

기사들은 혀를 찼다.

‘괜히 가주께서 동쪽 탑 출입을 금하신 게 아니거늘.’

또 머리 가죽이 벗겨져서 나오는 희생양만 늘겠구만.

* * *

“찌금부터 시키는 대로 하면 용서는 해쭈지.”

‘시발, 저 괴물 놈의 새끼……!’

슈리는 눈앞의 젖먹이의 모습에 창백하게 질렸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젖먹이의 뒤에서 꿈틀거리는 섀도우 리치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야 그냥 비명만 지르고 넘어갔지, 15살이 된 지금이었다.

섀도우 리치를 부리는 아이작이 정상으로 보이겠는가? 심지어 그 섀도우 리치가 전보다 더 흉악하고 강하게 진화한 게 보이는 지금?

‘시발, 곧 죽는다는 놈이 해골왕의 마력으로 뭘 하고 있는 건데?’

하물며 아이작은 어째서인지 슈리의 앞에서만 걸어 다니고, 말까지 하며 슈리를 괴롭혔다.

어른들한테는 걸음마도, 말도, 성법도 못 쓰는 척하면서 말이다.

괜히 슈리가 10살이 되자마자 아카데미로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아, 때끼가 사람 열 받게.”

…아니, 말 못 하는 척은 그냥 짧은 발음 숨기느라 그런 걸지도.

곧 슈리는 억울한 듯 몸을 털며 일어났다. 아무리 별난 놈이라고 해도 이젠 15살과 젖먹이의 체급 차이였다.

심지어 이놈은 저주를 받아 못 자라는 몸. 이제 이딴 동생을 무서워할 이유는…….

“이딴 동생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따고?”

“……!?”

슈리는 땀을 주룩 흘렸다.

이 새끼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그러나 아이작은 가증스럽다는 듯 딸랑이를 흔들었다.

“시르면 쌍관없는데. 성찍자가 거짓말해도 대겠어? 마른(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키워준 거잖아, 새꺄. 뛰질려고.”

“우씨, 너 마족 부린다고 어른들한테 이른다!”

“해봐.”

“!”

슈리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이작은 빡친다는 눈으로 말했다.

“때끼가 이제 아카데미 들어가서 얼굴도 잘 못 본다고 반항을 하네?”

“……?!”

“낌슈리! 니가 말하는 게 빠를까, 죽는 게 빠를까? 응? 형아.”

“…죄송합니다.”

“아랐으면 주물러.”

“…넵.”

슈리는 젖먹이의 어깨를 주물렀다.

“하, 때끼. 원래는 수수료 절반만 받을 생각이었는데 쭈둥이 잘못 놀려서 왜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나 사제 대서 성자 먹으려면 차칸 일 해야 하는데.”

슈리는 이제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성자, 성자아아?

얘가?

마왕군이 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이 새끼가?

“가족 좋다는 게 뭐야, 형아. 서로 어려울 때 돕고 도와야지.”

이 새끼는 이럴 때만 가족이고 형이지!

슈리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시발. 10년 전, 이놈한테 약을 가져다준 게 잘못이지.’

비록 집안 내에서는 적이긴 했으나, 그래도 10년 전.

슈리는 아이작의 도움으로 보물고의 보물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심지어 친척이자 교황가인 키나 베리트보다 좋은 물건으로!

어린 슈리는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하는 얼굴은 난생처음 봤다.

-네가 그 키나를 이기다니!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이작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죽지 말라며 여러 약을 챙겨준 게 아무래도 화근…….

-따야야(너 의외로 나쁜 놈은 아니구나)?

아니, 빌어먹을 재앙의 시작인 거 같다.

실제로 약을 받은 아이작은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가늘게 웃었다.

그때 이후로 완전히 눈빛이 바뀌었지.

응, 그래.

마치 단순한 마차를 보는 눈빛에서, 사육 말을 보는 느낌쯤으로…….

아무튼 그 이후 평소엔 두들겨 맞으며 성법을 익혔고, 방학 때는 기합을 받으며 지식을 익혔다.

뭐, 그 덕분에 학년장도 되고, 월반까지 한 건 맞지만…….

‘정체가 뭐지?’

솔직히 어릴 때는 몰랐지만, 졸업을 앞둔 지금은 두려움마저 드는 것이었다.

아니, 슈리 역시 머리가 좋기에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다.

아이작의 지식 수준?

‘이미 아카데미 교수들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런 슈리를 보는 아이작은 픽 웃었다.

성격과 달리 표독스럽고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가. 생긴 건 교황 손자보다도 천만 배 교황을 닮아서 마음에는 안 든다만, 지금은 아이작이 직접 기르는 망아지.

어린 황태자가 귀족가 아이들을 시동으로 데리고 다니듯, 아이작의 시동이 될 녀석이었다.

“해골왕의 뿌하를 처형한다는 건 먼데?”

“아? 아아. 우리가 봤던 그 마족. 우리가 보물고에서 나간 이후로 명령을 전혀 안 들었다나. 마치 죽음만 기다리듯 먹을 것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왜일까?”

왜긴 왜냐.

나랑 만났으니까 더 이상 성직자들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는 거지.

아. 그래서 교황가 입장에선 쓸모가 없어져서 처형하려는 건가?

슈리는 그런 아이작을 이상하게 보다가 곧 뭔가 눈치챈 듯 헛웃음을 흘렸다.

“성자 후보로서 공을 쌓고 싶은 모양인데, 넌 어차피 안 돼. 그 마족은 이미 하늘 같은 선배님들이 처형하기로 하셨으니까.”

아이작은 미간을 좁혔다.

“떤배(선배)?”

슈리는 엣헴 으스대며 말했다.

“올해 사제품을 받는 나랑 동기들 말야. ‘공양제’라고, 그해에 사제품을 받은 사제들이 처음 신께 드리는 대의식이 있는데, 거기서 우리 신입들이 처형하기로 했어.”

아이작은 눈을 번득였다.

역시 한가롭게 아카데미고 뭐고 지랄할 때가 아니었군.

“또와라(도와라). 올해 따야 해.”

“뭘?”

“따제품(사제품).”

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핫 비웃었다.

“학교부터 들어가시지?”

아이작이 대답 대신 황금 딸랑이를 들었다.

빠각!

안면을 얻어맞은 슈리는 몸을 파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그, 방법이 없진 않은데… 그 방법은 많이 어려울 것 같구나.”

“먼데.”

“<추천서>. 이건 교황청 승인제라 나이도 안 따지고, 통과만 하면 하루 만에 사제가 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음서제도란 거네.

좋네, 불법이란 느낌 팍팍 나서 좋아.

사실 아이작이 슈리를 먼저 사제로 만든 건 시험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

[필기시험 : 해골왕을 처리할 성법을 창작하여 기술하고, 해당 성법을 이용해 어떻게 죽일지 서술하시오.]

[실기시험 : 마수 퇴치(스켈레톤 임의 소환)]

이 개놈들!

내가 날 죽이는 방법을 쓰라는 건 둘째 치고, 또 스켈레톤 사냥이냐앍!

예상대로 더러웠던 성직자들 시험에 진지하게 응해줄 필요 없지.

그러나 슈리는 픽 비웃었다.

“근데 넌 절대 안 될 거다…. 추천서를 써주실 교황청 사제님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업적을 세워야 해서.”

인성 뭐……?

“사람을 구해야 추천서를 써준다고. 구하는 대상이 귀한 대상일수록 유리하다는데, 어디 위험한 사람이 뚝딱 나와는 준대? 심지어 올해 사제품 수여는 딱 다음 달인데, 그 기한까지 맞춰서?”

그때였다.

아이작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슈리! 이런 곳에서 놀고 있었느냐!”

“아버지?”

“교황청에서 사제님들이 오셨다. 네가 1등으로 사제 시험을 통과해서, 황녀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는구나.”

“예?!”

그 말에 아이작의 눈이 슬그머니 슈리를 향했다.

“2주 뒤에 뵙자고 하신다. 사제님들과 함께 미리 수도로 갈 준비를 해라.”

“아싸! 황녀님이면 엄청 미인이라 들었는데.”

“슈리!”

아이작의 눈이 또르륵 굴러갔다.

구하는 대상이 귀한… 귀한 대상…….

…그래. 황녀 정도면 귀하지?

아이작의 눈이 슈리를 보며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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