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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없앨 예정인데요-48화 (48/272)

제48화. 시급하다 (1)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슈리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엘덴 사제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무려 아카데미의 학년장을 할 정도로 우수한 슈리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으로도 볼 때, 저거 최소 전치 20주다.

아니, 뭐. 교황청의 치료를 받으면 5주 정도로 줄겠지만…. 그리고 사실 저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일 정도의 폭주였다.

아이작이 성령의 폭주를 막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큰 피해가 있었겠지.

‘엘덴 교수는 자업자득인 것 같다만…….’

그도 그럴 게 슈리는 똑똑히 보았다. 모두가 해골왕의 마력을 막으려 할 때, 오직 엘덴 사제만이 성령에게 다가가는 것을.

그리고 성령에게 고통의 성법을 쓰다가 도리어 반격당해 저 모양 저 꼴이 되었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반격이 성령의 짓이 아니란 거지!

그렇게 신음을 흘리는 슈리의 시선이 아이작을 향했다.

‘틀림없다. 저놈이 반사 성법을 썼어!’

그래! 성령의 짓으로 보이지만, 슈리가 아이작의 행동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던 것이다!

왜?

왜긴 왜인가! 애초에 이 응접실에서 인명 구조…. 시발, 뭔가를 할 거라고 끌고 오게 한 게 아이작이었으니까!

‘…원래는 저택을 부숴서 가두는 계획 아니었나?’

그래서 무사히 대피시키는 걸로 구조를 할 거라고.

그런데 계속 지켜보고 있었더니, 뭐?

반사 성법으로 엘덴 교수를 공격해?

‘아니, 뭐. 성령에게 고통 성법을 쓰려 한 게 수상하긴 하다만.’

성령을 가르칠 만큼 성령에 관심이 많은 교수였다. 왕급 성령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거란 생각은… 솔직히 안 든다.

하지만 이쯤 되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 새끼, 승인자를 치워버릴 거라더니 조질 생각이었냐!’

대피시킬 거란 말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던 거 아냐?!

하지만 아이작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감히 내 성령을 훔쳐가려고 해?’

내가 10년 동안 얼마나 힘들게 붙잡고 있던 놈인데?

실제로 성령은 바로 튀려고 했던 놈이었다.

10년 전에도 해골왕의 마력을 없앨 수 없단 말에 충격을 받은 릴라이가 무릎까지 더럽히며 부탁했지만, 개무시를 했지.

-이제 겨우 1살인 아이입니다. 제발 몇 년 만이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더 살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5대 가문과는 이미 연이 끊겼다. 가만히 있으면 이 젖먹이도 알아서 죽고 나도 자유가 될 텐데, 내가 왜?

그런데 그런 놈을 어떻게 붙잡았냐고?

-쾅!

-가주! 성령의 힘 때문에 동쪽 성과 신전의 지붕까지 날아갔습니다!

-그래. 아주 시원하게 벗겨졌군.

-아, 아니 저기? 일라이?

-피해보상 청구한다.

-아니, 잠깐! 잠깐! 박살 낸 거, 이 꼬맹이야! 해골왕의 마력이 내 힘을 자극해서!

-그래, 4일이면 정화할 수 있다고 하더니. 이젠 남의 집을 날려.

-아, 아니!

-뭐 됐다. 신전은 곧 신의 집, 우리도 신께 진언을 드리면 그만이니까. 감히 신의 신전을 박살 내다니 간이 부었어. 곧 성령계에 응징의 번개가 떨어지겠군.

-뭐?!

-아아, 죄 없는 성령들이 다치겠어. 마음이 몹시 아프군.

-야!

-싫으면 손자 놈을 정화해주는 것으로 퉁쳐줄 수도 있는데.

-시발, 이 양아치가!

뭐,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지껄이는 가주의 인성에 아이작도 박수를 보냈다.

아무튼 그렇게 도망치려 할 때마다 당근 겸 에슈아의 중요 시설을 박살 내고!

무려 잠도 안 재우고 72시간을 일하게 하고!

아무튼 그렇게까지 해서 10년을 잡아놨는데, 감히 내 초월계위를 위한 정화조를 그리 쉽게 훔쳐 가려 해?!

아이작은 아장아장 걸어서 성령에게 갔다.

다리가 짧아서 폼이 영 안 나는 게 짜증 나긴 하지만 뭐, 괜찮았다.

이제 이것도 안녕,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젖먹이 몸도 단번에 성장시킬 건데 이 정도야 뭐 어때.

그는 성령을 보았다.

“쩡신이 드냐?”

[…내가 왜…….]

“이상한 물찔이 니 몸으로 들어가서. 성력으로 밀어냈쪄.”

그 말에 성령은 단번에 모든 상황을 눈치챘다. 번득이는 눈이 도망치려는 누군가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거지 같은 교황청의 사제 놈이!]

“허억!”

살의를 품은 성령이 도망가려는 엘덴의 앞에 나타났다.

[이 빌어먹을 놈이 내게 수작을 부렸구나.]

“무, 무슨 말씀이신지.”

[수작 부리지 마라. 네놈이 두르고 있는 그 물건들은 뭐냐. 방화 용품이 아니냐. 금의 신앙의 냄새가 나는데, 누구의 사주를 받았지?]

“이거는, 오해입니다. 에슈아 공작령 인근에 사나운 불의 성령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저희 사제들의 안전을 위한 대책용으로…….”

성령은 가증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럼 그런 걸로 해주마.]

“감사ㅎ…….”

[나도 말하겠다. 모든 불의 성령들에게 명령해서 앞으로 교황가 사제들하고는 모든 연을 끊으라고.]

뭐라고?!

엘덴은 물론, 장로들도 놀랐다.

아니, 저놈은 성령의 왕.

분명 아래 성령들에게 명령할 힘이 있긴 하지만. 불의 성령이 성직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쓰이는 건데!

아마 금의 신앙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당황한 엘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제들은 신과 계약을 맺은 존재들입니다. 특히 교황가라면 더욱 그렇죠! 신과 조약을 맺은 성령이 그 규율을 어길 순……!”

[상관없는데? 신들하곤 손절한 지 오래라 난 그딴 규율 영향 안 받아.]

“……?!”

[뭐, 오해는 말아라. 나도 우리 성령들의 안전을 위한 대책용일 뿐이니. 불이 무섭다며 그리 방화 용품을 끼고 다니는데 우리를 얼마나 믿지 않는지 알겠다.]

엘덴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상황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령은 엘덴의 품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 망자초의 기운을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뭐, 정말 오해였다면 취소해 주겠다만, 별로 그럴 것 같진 않구나. 샅샅이 조사를 해주지. 나와 이 젖먹이에게 뭔 짓을 하려 했는지.]

그 말을 듣는 아이작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응, 잘한다.

잘하고 있는데 지금 네가 해야 할 건 그게 아니거든? 너 뭔가 잊고 있는 게 있거든?

곧 성령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설마 네가 날 구해줄 줄은 몰랐다. 성력으로 날 구하고, 해골왕의 마력까지 제어하게 되다니. 원래라면 그 시점에서 계약 종료지만, 날 구해줬으니 당분간 옆에서 빚을 갚도록 하지.]

감사를 표하는 성령의 말에 아이작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푸훕!

그래, 그렇지! 이거야!

계획대로야!!

멍청한 신성 진영 놈들은 이래야지!

‘빚진 건 절대 못 참는 빡대가리 새끼들!’

아이작은 엘덴에게서 망자초의 기운을 느꼈을 때부터 이 상황까지 계획했던 것이다.

감히 추천서를 계류한다는 눈엣가시는 치워버리고, 성령에겐 빚도 지우고!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아이작은 슬쩍 장학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끙끙거리는 엘덴을 붙들고 있었다.

“엘덴 사제님은 일단 내가 모실 테니, 자네는 교황청으로 가시게.”

“예. 교황청에 이 일을 알려야겠습니다.”

아이작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역시 사람을 아작 냈는데 추천서까지는 너무 양심이 없었나?

할 수 없지. 다음 구조대상자는 이놈들로…….

“아이작 공자의 추천서도 넣어 두겠습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공자라면 꼭 올해 사제품을 받아 교황 성하께 작호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건 맞네. 나도 위에 부탁해 보겠네.”

아이작의 눈이 초승달로 변했다.

* * *

일주일 뒤.

“예? 그럼 정말 아이작에게 사제품이 내려온 겁니까?”

“그래. 아이작도 올해 받게 됐다. 교황청의 승인이 떨어졌다.”

릴라이는 가주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원래는 필기 테스트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설령 가능해도 내년쯤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가주는 대답 대신 수도에서 온 서신을 보여주었다.

“본래 추천서를 써주려면 사람을 구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을 만족시킨 듯하구나. 구조 대상자는…….”

“장학사님들과 에슈아 사람들인가요?”

“아니. 성령이다.”

“예?”

“뭐, 왕급 성령이면 나라에서 둘도 없는 귀인이니까. 장학사들은 아이작이 왕급 성령을 가진 것에 대해 비밀로 한 듯하다만.”

가주는 편지를 접었다.

장학사들도 눈치를 챈 것이다. 가주가 그간 아이작을 내놓지 않았던 이유를.

아이작의 행동이나 모습으로 조롱당할까 창피해서?

아니다.

조롱받은 세월이 몇백 년인데 새삼 그딴 걸로 귀가 간지러울까.

아이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다른 이유였다.

‘그 젖먹이 모습으로 나가면 노려진다.’

아이작을 내보내기엔 손자 놈이 가진 성령이 너무, 아니 지나치게 귀했다. 실제로 교황청의 서신에도 쓰여 있지 않았는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아이가 가지게 된 그 훌륭한 능력을 모두의 앞에서 보여주십사 합니다.

발신인은 교황청이라고 쓰여 있지만 보나 마나 다른 추기경들이겠지.

다른 5대 가문 가주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가주는 모든 에슈아에 발설 엄금을 내렸던 것이다.

아이작이 왕급 항마의 성령을 소환했다는 말은 당분간 비밀로 하라고.

뭐, 장로들은 당황했었지만.

-어째서입니까! 이는 엄청난 업적입니다! 소환했단 사실만으로 에슈아의 명예를 단번에 올릴 수 있는 기회인데요!

-그까짓 명예, 아이의 목숨보다 중요한 게 아니다.

-!

젖먹이가 상대면 얼마나 뺏기 만만해 보일까.

하지만 그 말에 릴라이가 뭘 걱정하냐는 듯 웃었다.

“그건 모두 아이작이 스스로의 몸을 못 지킬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그래서 가주도 아이작에게 시험을 해본 것이다.

“사제품을 받으면 아카데미를 졸업한 셈이 되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은 학력과 지식이 있어야 하지. 그게 안 되면 보류고. 그래서 학자들을 시켜 테스트를 보게 했다만.”

“그래서 결과는……!”

가주는 나무라듯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은 그동안 그놈에게 도대체 뭘 가르친 거냐?”

“예, 예?”

가주의 표정에 릴라이는 당황했지만, 곧 가주가 한숨을 쉬었다.

“만점 수석이다. 태도가 불량한 게 흠이지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가주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이작에게서 희망을 봤기 때문이리라.

그만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몸도 자라고 성력도 다룬다? 기대가 안 되는 게 이상한 일이다.

“어? 여기 개봉 안 한 결과지가 하나 더 있는데요.”

“그거는 인성 테스트다. 뭐, 사제가 되기 위한 기본 테스트지. 굳이 볼 것도 없다.”

릴라이는 반갑다는 듯 테스트지를 펼쳤다.

“아, 이거 기억납니다. 성법이 걸려 있어서 거짓말을 써도 반드시 속마음과 신앙심이 드러나는 테스트지요. 저도 속마음을 들켜서 어찌나 놀랐는지.”

“허, 그게 아무리 사고뭉치여도 어지간한 범죄자나 쓰레기가 아니면 염려할 것도 없다. 무난하게 나와.”

릴라이는 수긍했다.

뭐 다소 걱정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오, 패기가 넘치는걸요.”

[Q. 본인을 낳고 길러준 가문에 대한 생각은?]

[A. 정복. 내 거.]

가주도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후계 자리를 주지.

“더 읽어봐라.”

[Q. 사제가 된 후엔 무엇을 할 것인가?]

[A. 신들의 모가지를 땀]

[Q. 신성제국 헬라의 사제로서 나라에 대한 나의 의지와 포부를 기술하시오.]

[A. 나라를 멸망시킨다]

“…….”

“…….”

릴라이도, 가주도 말을 잃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테스트 용지는 절대 거짓말을 쓸 수 없다. 거짓말을 써도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제가 되기 전 신앙심을 알아보기 위한 기본 테스트…는 시발!?

사제가 되기 전에 이단 심문으로 끌려가겠네! 아니, ‘끌려가겠네’가 아니라 진짜 이거 끌려간다!

장난이 아니고, 이거 신앙심이 0이다 못해 마이너스, 지하를 뚫고 내려간 수준이다!

조금만 답이 불순해도 바로 사제 자격 정지를 받는데, 이딴 답이 나온다고?

이단 심문관에게 걸리면 즉각 고문 및 처형!

“…아, 아버지. 이 결과지를 본 사람은.”

“현재로선 너와 나, 단둘뿐이다만.”

“…만약 사제가 되어 또 테스트라도 치르면 여러 명이 보게 되겠군요.”

“…….”

“…….”

둘은 깊게 침묵했다.

“아버지…….”

가주는 뒷목을 짚은 채 답이 없다.

이미 받기로 한 사제품은 취소할 수도 없다.

“릴라이.”

“예.”

“사제품은 이번에 네가 대신 받아놓고. 아이작은 당분간 집에서 못 내보낸다고 전해라. 사유는…….”

눈을 감은 가주는 미간을 지그시 짚었다.

“가정교육…이다.”

인성 교육이 시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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